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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6: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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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로마서를 마치면서
롬 16:17-27
07. 11. 25, 오전
지난 한 해 동안 로마서 강해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동안 특별한 주일 외에는 오랫동안 로마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의 진수가 가득 들어있는 로마서였습니다. 로마서 말씀을 마치면서 얻은 결론은 역시 주님의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른 뼈와 같이 바싹 마른 심령이라 할지라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의 대단원을 내리면서 끝까지 로마서 말씀을 선포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한 오랫동안 함께 로마서 말씀 앞에 귀기울여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통 편지를 쓸 때 먼저 인사를 하며 상대방의 근황을 물어 봅니다. 그리고 쓰고 싶은 본론을 장황하게 기록한 다음, 마지막 인사를 하며 글을 마칩니다. 그런데 편지를 다 썼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할 말이 또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편지 끝머리에 당구장 표시를 하고 덧붙일 말을 적습니다. 이것을 추신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편지의 추신에 해당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은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말씀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바울에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악한 것, 즉 이단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귀하고 복된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한번 악한데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잘못된 이단에 빠지면 모두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이단의 특징과 또 이단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이단의 특징
이단이라 하면 한자어로 다를 이(異) 끝단(端)이라 하여, 처음은 같은데 끝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이단 중에서는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신앙촌, 몰몬교, 통일교 등과 같이 이단임이 분명히 밝혀진 것도 있지만, 언뜻 보아서는 정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똑같아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단들이 자기들이 원조이고 자기들이 진짜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다릅니다. 겉모습은 똑같은데 알맹이가 완전히 다릅니다.
겉모습이 그럴듯하다해도 속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정말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알맹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의 특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무식하면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식하면 신세 망칩니다. 이단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넘어가서 패가망신합니다. 나중에 집 팔고 논 팔고 모든 재산 다 갖다 바치고도 다시 돌아오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빠져 나오고 싶어도 빠져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히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어떻게 됩니까? 백전백승합니다.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단의 세가지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단의 첫 번째 특징은 복음을 거스릅니다. 이단들은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가르칩니다. 이단들은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합니다. 자기 편의대로 해석합니다. 성경공부하자고 유혹하여 이상한 학설을 주장하며 지금까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행동하게 합니다. 말씀에 분명히 써 있는데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이론을 집어넣습니다.
이단의 두 번째 특징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분명히 (고전 14:33, 40)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고,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이단들은 이러한 교회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단들은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움을 하는 대신에, 자꾸 교회 안에서 싸움을 일으킵니다. 이단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아야 할 미사일을 기성교회로 발사하여 폭발하게 하고,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단의 세 번째 특징은 거치게 합니다. 덫을 놓아 산짐승들을 잡는 것처럼, 함정을 만들어 죄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단들은 자꾸 모이지 못하게 하며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결국은 믿음을 잃게 만듭니다.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이단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 대처해야 합니다.
2. 이단 대처 법
그러면 어떻게 이단에 대처해야 할까요?
이단에 대처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17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여기에서 '살피라'는 말은 계속 응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적이 오는지를 감시하는 보초병처럼 이단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들은 교묘해서 자기들을 결코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두 뿔을 달고, 시커먼 망토를 입고, 입을 쩍 벌리고 나타난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그럴듯하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접근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이단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선한 것에는 지혜롭고 악한 데에는 미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이단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유괴범들이 어린아이들을 유괴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맛있는 사탕이나 과자를 주면서 어린아이들을 유혹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먹음직하고 달콤한 것으로 어린애들을 유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사탕 뒤에 있는, 과자 뒤에 있는 악당들의 마수를 알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그들이 미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에 나와 말씀을 듣지 않고, 수요기도회에서 말씀을 듣지 않고, 새가족모임과 부흥사경회에서 말씀으로 양육받지 아니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녀들이 수학문제 하나를 풀려고 해도 공부해야 풀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EX)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비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1944년 12월 연합군은 6개월의 오랜 준비 끝에 독일군 진지 한 가운데를 공략하기 위해 한 작전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의 엉뚱한 책략에 의해 이 작전이 실패하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심한 폭우가 내리는 밤에 독일군들이 미군 복장을 하고 미군 지프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연합군 지역에 침투하여 여기 저기에 세워 놓은 방향 표지판들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연합군들은 표지판을 따라 무작정 나아가다가 독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오히려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작정 교회만 다닌다고 저절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덮어놓고 따라오는 군중들이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영생에 대해 갈급한 자, 가나안 여인처럼, 백부장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 말씀을 듣고 따라나선 안드레와 같은 사람들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인물들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영적으로 철이 들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아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아야 악한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양육 받고 말씀으로 훈련받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배운 말씀으로 무장하여 악한 이단들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이단을 대적하는 두 번째 방법은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17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여기에서 '떠나라'는 말은 '갈라서라', '피하라' '멀리하라', '배격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가까이 해서 유익한 것이 있는 반면, 가까이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은 가까이해서는 안될 당신입니다. 아예 이단하고는 상종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들을 대하면 대할수록 이단, 삼단, 사단에 빠집니다. 아예 그들을 단호하게 배척해야 합니다.
EX) 어느 교회 한의사 집사님이 카지노를 출입하다가 가정이 풍지박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허구헛날 남편이 한의원은 비워둔 채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하자, 부인 집사님이 남편의 도박을 막으러 갔다가 그 부인까지도 도박에 빠져 결국은 은행에 있던 돈과 고급승용차, 그리고 으리으리 번쩍하던 집과 한의원을 다 날렸다는 것입니다. 도박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심심풀이 도박이라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예 도박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단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이단들 근처에는 가까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단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다가, 자신이 이단에 빠지는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단들을 '돌이키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들을 '떠나라', 그들을 '멀리하라', 그들을 '배격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미혹의 천재들이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그들을 보면 말을 참 잘합니다. 재치가 있고 웃기기도 잘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꼬드겨서 돈을 거두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아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악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배격하시기 바랍니다.
3. 문안(:21-24)
이들은 사도 바울의 협력자이며 복음의 동력자였습니다.
1) 디모데 : 그 중에서도 디모데를 가장 먼저 손꼽아서 안사를 시키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바울이 각별히 신앙의 훈련을 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소년이었던 디모데가 자라나 이제 어엿한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는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는 그가 편지했던 그가 썼던 서신도 디모데에게 썼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이 디모데에 대한 애정이 돈독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바울이 이들을 만난 곳은 각기 다른 곳입니다. 누기오는 안디옥에서 만났으며(행13:1), 야손은 데살로니가에서(행17:5-6) 만났고, 소시바더는 베뢰아에서 만난 사람입니다(행20:4).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여행을 한 곳마다 거기서 신앙의 열매를 맺고 각별한 신앙의 동역자들을 얻었습니다. 특히 야손과 같은 사람은 단지 바울을 잘 대접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야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바울과 교제를 나누고 바울을 통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같이 바울의 동역자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3)대필자 더디오
바울이 대필자를 세워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필체가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에 눈에 안질이 있어서 그가 편지를 쓸 수 없었을 때 그의 모든 글들을 기록했던 사람이 바로 더디오였습니다.
4)가이오와 그 함께한 자들(23)
가이오를 본문에서 식주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이오는 기회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고 특별히 낯선 사람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던 자였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일은 항상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이러한 가이오의 봉사로 온 교인이 편하게 집회를 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교회에 적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잘 대접하는 교회입니다.
또한 그 성의 재무장관인 에스라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위직에 있으면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천민을 대상으로하는 종교로 인식이 되어 있었고, 로마를 대적하는 단체로까지 인식되어 있었던 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위나 명예가 주님을 믿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 중엔 두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목사를 기도로 돕는 성도가 있고, 둘재로는 기도케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복음을 위해서 쓰임받는 성도이고, 어떤 성도는 끊임없이 목사를 고민케 하고 기도하게 만드는 그런 성도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께 칭찬 받으며,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복음의 축복과 능력
25절부터 27절까지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울을 바울되게 한 것은 이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자신이 믿고, 자신이 증거하고,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이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자신을 견고하게 해 준 이 복음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또 구원받은 성도를 견고케 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복음에는 절망과 저주 가운데 사는 사람을 소망과 살맛 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로마서를 마치면서 사도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여러분의 복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은 절망 가운데 있던 자를 살려 주었습니다. 바싹 말라버린 마른 뼈와 같은 자를 생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 복음은 흔들리던 우리를 강건케 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강한 주의 군사로 만듭니다. 할렐루야!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대단원을 찬양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복음의 능력을 잊고 살고 있습니까? 마지막 로마서 말씀을 덮기 전에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말씀을 마치기 전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마지막 27절에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하고 외치며 찬양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축복의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세 무궁토록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마음껏 찬양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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