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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진실(Truths About Death)

마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20 추천 수 0 2013.04.29 23: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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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살전4:13-18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7월 31일 주일 설교 <왕국절을 위한 연속설교: 알 수 없는 나라 5>
“죽음의 진실”(Truths About Death)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이 질문들은 인류가 시작되고 나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인류의 정신사에 공헌한 수많은 종교와 철학들은 이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를 건너갔다 오지 않고서야 딱 부러지는 대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건너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이 본 것이 얼마나 진실인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 이후의 문제는 언제나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논어>(The Analects)에 보면, 제자 계로가 공자님에게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께서 “내가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대답하는 일화가 나옵니다. 아마도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 느끼는 솔직한 심정인 듯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가장 자신 있게 말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물질과 육신을 넘어 존재하는 영적 세계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우주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대해 이모저모로 계시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 계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체험하는 하늘나라는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기독교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건너갔다가 오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음의 세계를 거쳐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셨고, 지금도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죽음 이후에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죽음의 무게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죽음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4-55)

 

이렇게 믿는다고 해서 죽음에 따르는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적인 죽음에 따르는 이별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라고 부르짖은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확신한다 해도 죽음의 고통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고통과 슬픔보다 더 치명적인 ‘죽음의 독침’을 믿음은 무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과 ‘절망’은 죽음이 품고 있는 ‘독침’과 같습니다. 믿음은 그 독침을 뽑아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믿음의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안과 기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기독교는 조금의 의심도, 이견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영혼이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죽고 나면 인간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빠져 나와 심판대 앞에 서고 구원 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 옆에 달려 있던 강도 한 사람이 회개하면서 예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여기서 말하는 ‘낙원’은 하늘나라를 의미합니다. ‘오늘’이라고 했으니,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옮겨질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 1:23-24)

 

바울은 세상을 떠나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느낍니다. 다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교인들 생각에 계속 이생을 살아갈 이유를 발견합니다.

 

이처럼, 죽고 나서 곧바로 심판이 있고,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믿음은 상당히 보편적입니다. 임사 체험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 후에 곧바로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되는 경험을 합니다. <Heaven Is For Real>의 주인공 콜튼은 “죽고 나서 처음 만나는 것은 예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내세를 믿는 다른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고 나서 누구를 혹은 어떤 것을 만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죽음 후에 곧바로 내세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기독교만의 믿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다른 입장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영혼은 잠을 자고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믿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같은 믿음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있을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요 6:39-40)

 

이 말씀은 죽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까지 잠자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심판이 보류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재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살전 4:16-17)

 

이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 은유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령’, ‘천사장의 소리’, ‘나팔 소리’는 모두 은유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말도 은유입니다. 우주 저편 어느 곳에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숨겨져 있던 하늘나라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 때가 되면 죽은 사람들이 일으킴을 받아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죽고 나서 곧바로 하늘나라에 가는가, 아니면 죽고 나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가지 입장이 모두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렇게 쉽지 않은 문제에 봉착할 때면, 먼저 죽음 이후의 세계와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해 우리가 잘 못 믿고 있는 것 즉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죽음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육신은 죽고 영혼만이 영생한다고 믿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혼불멸설’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렇게 믿습니다. 성경에서도 영(spirit)과 혼(soul)과 육(flesh)이 서로 독립적인 요소로서, 잠시 동안 서로 협력하여 하나로 작용하는 것처럼 그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 즉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라는 기도는 마치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영혼불멸설은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영혼불멸설의 근거는 ‘이원론’(dualism)입니다. 이원론이란 이 세상이 선한 창조자와 악한 창조자에게서 나왔다는 믿음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창조주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악한 창조자가 있었다고 전제합니다. 육은 악한 창조자에게서 나왔고, 영은 선한 창조자에게서 나왔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선한 영혼은 악한 육신 안에 갇혀 있다고 믿습니다. 악한 육신으로부터 선한 영이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악한 것이며, 참으로 선하고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monism)입니다. 물질과 영혼이 모두 한 분 하나님에게서 창조되었다고 믿는 겁니다. 물질은 유한하고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은 유한하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본질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연약함과 제약으로 인해 때로 영혼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게 느끼고 보면, 육신이 악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 사도가 한 고백들이 그러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2절)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4절)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6절)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8절)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몸을 ‘장막집’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식으로 하자면 텐트입니다. 텐트는 임시적인 거처입니다. 영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합니다. 비좁고, 쉽게 뜯어지고, 낡아집니다. 그것이 육신의 속성입니다. 반면, 우리의 영혼은 육신과 물질의 한계를 넘어 서고 싶어 합니다.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를 가르고 있는 엷은 막을 뚫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육신의 한계 때문에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육신이 영혼의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은 죄와 악에 대한 유혹에 취약합니다. 거룩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육신을 제어하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육신을 통제하여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결심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육신을 지배하는 죄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집니다. 반면, 죄에 빠져 사는 것은 결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코올 중독자 중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결심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죄를 향하는 관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육신이 거룩한 삶의 원수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18절)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2-24절)

 

이 같은 말씀을 잘 못 받아들이면, ‘금욕주의’(asceticism)에 빠집니다. 금욕주의는 육신과 물질을 악하다고 생각하고 육신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씨름하고 있는 것은 육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를 향한 관성’입니다. 그것은 육신이 악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귀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고전 6:19-20)

 

어떻습니까? 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다르게 들리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육신을 원수처럼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육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탓하기에 앞서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다만, 물질과 육신에는 한계가 있고 죄를 향한 관성이 있기에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합니다.

 

이원론을 믿는 사람은 영혼불멸을 믿지만, 일원론을 믿는 기독교는 ‘부활’(resurrection)을 믿습니다. 부활은 ‘소생’(resuscitation)과 다릅니다. 소생은 죽음의 상태에 있다가 다시 과거의 육신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사로가 소생했으며, 어느 과부의 아들도 소생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소생한 사람들은 그동안에도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부활은 죽은 상태를 거쳐 그 다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함께 나아갑니다. 과거의 육신 그대로가 아니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됩니다.

 

이 같은 부활은 지금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일어났습니다. 부활은 영적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신에게도 함께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가 지금 아는 육신과 다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 홀연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

 

예루살렘에도 나타나셨고, 갈릴리에도 나타나셨습니다.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전설이니 신화니 폄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하늘나라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부활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은유를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부활에 가장 가까운 비유는 나비가 된 애벌레의 비유입니다. 물속에서 헤엄치며 살던 나비 유충이 어느 날 갈대를 기어 올라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죽습 니다. 물속에 있던 자녀 유충들은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장례식을 올립니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갈대 잎에 있던 꼬치에서 무엇인가 기어 나옵니다. 물속에 있던 자녀 유충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꼬치에서 빠져나온 그 물체는 크게 날개 짓을 하더니 공중을 훨훨 날아다닙니다. 나비가 된 것입니다. 그 나비는 호수 위를 빙빙 선회하다가 연못 속에서 놀고 있는 자녀 유충들을 내려다봅니다. 반가운 마음에 호수에 내려 앉아 발을 물속에 넣어 자녀 유충을 톡톡 건드려 봅니다. 자녀 유충은 방금 뭔가가 자신을 건드렸는데,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부활은 유충이 나비가 되는 것처럼 옛날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연못이라는 한계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가던 유충이 그 한계를 벗어나 확 트인 공간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차원으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나비가 물속에 있는 유충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 안에 들어와 우리를 만나주실 수 있습니다. 물속에 있는 유충이 나비와의 만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처럼 부활할 때, 비로소 환히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모두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말합니다. 과일 나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첫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압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매 년 그 나무를 통해 열매를 딸 수 있다는 보증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지, 그리고 부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부활에 대해 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는 이들에게 부활이 일어날 것이고, 부활이란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이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그 믿음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기독교가 믿는 것은 영혼불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잠시 동안 분리되었던 영혼과 육신이 새롭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동일한 모습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하여 새로운 몸이 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신령한 몸’(고전 15:44)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만난 어떤 학생이 기억납니다. 상당히 나이가 들어서 신학교에 온 그 학생은 부활의 교리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저의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참으로 곤혹스럽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선생의 책임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 그 학생이 그럽니다. “그럼, 부활할 때 어떤 몸으로 부활합니까? 지금 이 모습 이 대로 부활합니까? 이 모습으로 한 평생을 살면 됐지, 어찌 이 모습으로 영원히 살라는 말입니까?” 그는 자신의 몸매와 생김새에 대해 적잖이 불만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그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도신경의 “몸이 다시 사는 것과”라는 구절을 고백하면서 지금과 같은 몸으로 영원히 살 것에 대해 치를 떨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얼굴 생김새와 몸매로 인해 이 땅에서 받은 상처를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엄청난 돈을 들여서 고쳐 놓았는데, 부활할 때면 쌍꺼풀도 풀리고 코도 다시 납작해져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염려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이 땅에서 빼어난 미모와 몸매를 자랑하며 살았으니, 부활한 후에도 그렇게 뽐내며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십니까? 다 부질 없는 생각입니다. 모두 다 변모하여 신령한 몸을 입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가 되면 미의 기준도 바뀔 것이고,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는 시각으로 바뀔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는 모두 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감사할 것이며,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 중 수정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죽고 나면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산다는 믿음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믿음은 반만 옳습니다. 죽고 나면 우리의 영혼은 다른 세상에 가지만, 마지막 날이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세상을 대치할 것이며, 다른 세상에 있던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여 새로워진 이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찬송의 가사가 말하듯,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가 아닙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될 것이며, 이 땅에 임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심판에 불타 없어질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어느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든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바울 사도는 마지막에 몸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고전 15:53)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5: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은 모든 것에 완전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육신과 분리되었던 우리의 영혼은 마지막 날에 다시 육신과 결합하여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천사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상실했던 이 세상은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집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된 세상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곧바로 하늘나라에 간다는 믿음은 필히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반면, 죽음 이후로부터 부활 이전까지 중간기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잠 잘 뿐이라고 믿는 것도 역시 성경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믿을만한 증거들로 볼 때, 육신과 분리되었을 때,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하늘나라의 기쁨과 위로와 안식을 누립니다. 다만, 그 구원은 마지막 날에 부활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아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살전 4:14)

 

여기서 ‘잠든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은 ‘하늘나라에서 잠자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죽었다’고 하지만 그 영혼이 살아 있고 앞으로 다시 부활될 것이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잠자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기쁨을 누리다가 마지막 날에 예수와 함께 이 세상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 이후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배격하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성경의 많은 증언과 그동안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죽음 이후에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진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둘째,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하늘나라의 기쁨에 참여한다.

셋째,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은 변화되어 하늘나라가 된다.

넷째, 죽은 자들의 영혼은 새로워진 이 세상에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한다.

 

이 네 가지의 ‘죽음의 진실’ 중에서 쉽게 믿어지거나 이해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경험으로는 납득하기 힘듭니다. 죽음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재림이라니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니요?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다니요? 도대체 감당이 안 된다고 느낄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 ‘이해’가 아니라 ‘선택’이 필요합니다. 설득되지 않고는 결코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의 습성은 이런 경우에 큰 장애가 됩니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들일수록 스스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힘쓰다가 선택의 시점을 놓치는 잘못을 많이 범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도약은 언제나 선택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물론, 어느 지점까지는 이해하기 위해 진력해야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 가면 그 동안 알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에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고 어떻게 경험했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체험했습니까? 여러분은 그 동안 믿으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두고 깊이 묵상하면서 알지 못할 것에 대해 선택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으며, 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확인한 그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하늘나라의 삶에 대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의 부활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에 대해 증언해 준 사람들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따름입니다.

 

혹시,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남의 얘기처럼 들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하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는 죽음을 앞 둔 사람에게나 해 줄 것이지, 왜 아직 팔팔한 사람에게 이런 설교를 하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부디, 이 ‘죽음의 진실’이 왜 살아있는 사람에게 중요한지를 깨달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그리고 영원한 부활에 대해 믿는 것은 단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대한 준비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죽음의 진실을 참되게 믿는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 지역을 방문하신 감리교 원로 목사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는 85세의 고령이신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을 모시고 있던 후배 목사님에게서 이미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청렴하고 강직하시며 구도적인 자세로 일생을 사신 채인식 목사님이 그분입니다.

 

이번에 만나 말씀을 들으니, 2년 전에 위암이 발견되어 위의 대부분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수술은 잘 되었는데, 수술 후에 장 유착이 생겨 두 달 가까이 사경을 넘나드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런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그 목사님에게 그 같은 희귀한 일이 생겼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거의 두 달을 주사로만 버틴 목사님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 갈 마음의 준비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치의가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는 말을 한 마디 던지더랍니다. “아니, 목사님이시라는데, 하나님도 목사님에게는 별 소용이 없군요.” 알고 보니, 그 의사의 아내는 잘 믿는 사람인데, 그 의사는 믿음의 문턱에서 기웃거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거의 두 달 동안 각방의 노력을 해 보았으나 차도가 없자 짜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대로 돌아가시면 능력 있는 의사로 인정받던 자신의 이력에 큰 오점이 남겨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마음에 꽂힌 그 말을 생각하며 깊은 슬픔에 빠지셨습니다. 평생 목사로 살면서 잘 믿으려고 힘썼고, 정도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나름대로 헌신한다고 했는데,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가리는구나 싶으니, 회개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습니다. 평생을 구령의 열정으로 살아온 목사의 마지막 모습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의사의 불신을 확고하게 만들어 놓고 가게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너무도 슬프더라는 것입니다. 평생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달 가까이 기다리던 개스가 나온 것입니다. CT를 찍어 보니, 떡처럼 붙어 있던 장이 약간 분리된 것이 보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날로부터 서서히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었고, 유착된 장은 급속도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만든 그 의사는 외국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이 모든 과정을 몰랐습니다. 며칠 후에 그 의사가 와서 그 동안에 찍은 장사진들을 대조해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역시 목사님이시군요!” 그 이후, 가끔 진료를 받으러 갈 때면,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진심으로 부탁하곤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는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하늘나라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 원로 목사님께서 홀로 병실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실 때, 그분은 하늘나라와 충만하게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회의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던 그 의사는 그 목사님에게 나타난 변화를 통해 하늘나라의 흔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그 목사님을 뵐 때마다 기도해 달라고 겸손하게 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분명한데,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맛보고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다면, 죽음 이후에 그 나라를 충만하게 경험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육신에 머물러 사는 동안 성령을 통해 새 세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모든 것이 새로워져 새 하늘과 새 땅을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리라고 믿는 것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늘나라가 이렇게 분명하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같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물질이 우리가 바랄 모든 것이 아님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지만, 그 믿음은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발걸음을 새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을 허비하지 않고 진실로 잡아야 할 것을 잡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줄 것이고 발걸음을 잡아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전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하늘나라를 얻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같은 믿음에 늘 깨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죽음 너머를 보는 믿음,

육신 너머를 보는 믿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을 저희에게 주소서.

그 믿음으로

저희의 표정과 말투와 발걸음을 바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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