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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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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8월 14일 주일 설교 <왕국절을 위한 연속설교: 알 수 없는 나라> 6
“지옥의 은유”(Metaphors of Hell)
요한일서 4:18-19
1.
지난 5주간 동안 저는 하늘나라, 그 알 수 없는 나라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알 수 없는 나라에 대해 말하려다 보니, 때로는 알 수 없는 말처럼 들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나라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가지고 더듬어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듯, 그 나라에 대해 더듬어 찾아보았습니다.
이 설교 시리즈를 주의 깊게 들은 분이라면, 이 즈음에서 한 가지 질문이 들 것입니다. “왜 지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지?”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연옥’(purgatory)은 개신교회에서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옥은 마치 천국의 짝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전도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문구, “예수 천당, 불신 지옥”(Heaven with Jesus, Hell without Jesus)에서 보듯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해 말할 때면 항상 지옥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5주간 동안 지옥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이 시점까지 지옥에 대한 언급을 미루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그것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방식이었고 바울 사도의 방식이었으며 또한 다른 성경 저자들의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지옥에 대해서는 마치 의도적으로 언급을 자제하는 것처럼 생각될 만큼 드물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어 흠정역(KJV) 성경을 가지고 따져 보면, 마태복음에 ‘하늘나라’라는 말이 54회 나옵니다. 마태복음이 전부 28장으로 되어 있으니, 한 장에서 대략 2회 정도 나온다는 뜻입니다. 반면, 헬라어 ‘게헨나’(gehenna) 혹은 ‘하데스’(hades)를 번역한 단어 ‘지옥’은 모두 합하여 9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차이가 더 두드러집니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라는 말이 43회 사용되고 있는 반면, ‘지옥’이라는 단어는 3회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많은 편지 안에서 ‘지옥’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요한계시록을 ‘지옥의 묵시록’인 것처럼 오해하는데, 실은 이 책에서도 지옥이라는 단어는 4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통계는 성경의 번역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흠정역을 기준으로 할 때, ‘지옥’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 54회 나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선호하는 NIV 성경에는 14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옵니까? ‘게헨나’ 혹은 ‘하데스’를 굳이 ‘지옥’이라고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구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에는 13회 나오고, 새번역에는 24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로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울도 그리고 다른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취했던 태도와 삶에 대해 언젠가는 결산할 날이 올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대해 결단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설교했습니다.
예컨대, “주여, 주여!”하며 믿는다는 허울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는 관심 없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 7:23)
종말과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날에,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 종을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 24:50-51)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와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갈 1:9)
또 다른 곳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업신여겨 죄 가운데 빠져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롬 2:5)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그 안타까운 심정을 생각하면 ‘지옥’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고 위협하기도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다른 신약 성경의 저자들도 모두 하늘나라에 집중했습니다.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여 믿게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에 매료되어 믿게 하려 했습니다.
2.
사정이 이러한데, ‘천국의 복음’(Good news of Kingdom) 즉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이 ‘지옥의 화음’(禍音, Bad News of Hell) 즉 지옥의 공포스러운 소식으로 뒤바뀐 현실을 자주 목격합니다. 성경에서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잊히지 않을 만큼만 가끔 사용되고 있는데, 많은 설교자들과 전도자들의 입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이 절제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 중 어머니께서 초기 선교사를 도우며 ‘전도부인’으로 일했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어릴 적에 어머니와 선교사에게 받은 신앙 교육을 생각하며 치를 떠십니다. 그분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지옥 불’에 대해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너, 그러면 지옥 간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데 있어서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임어당(린위탕, Lin Yutang) 선생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오래도록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떠나 살았습니다. “나는 왜 이교도인가?”(Why am I Pagan?)라는 유명한 글을 썼던 그는 말년에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여 <이교도에서 기독교도로>(From Pagan to Christian)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는 “왜 좀 더 일찍 결심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방문한 교회마다 분노한 목사가 분노한 목소리로 분노한 하나님을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하늘나라보다는 지옥을, 구원보다는 심판을 더 강조하는 설교자와 전도자들은 항상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조급증이 만들어내는 복음의 왜곡입니다. 무엇인가 빠른 결과를 원할 때면 설득시키고 감동시키기보다는 위협하고 협박하려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중대한 협박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경향 모두 우리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타락한 본성이 우리의 설교와 전도에도 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나 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협하거나 협박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위협하고 협박하면 순종하는 시늉을 하지만 마음으로는 반항하기 마련입니다. 더디고 힘들더라도 설득시키고 감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들어가야 바른 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조급증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교회학교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끌어 대면서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너, 그러면 예수님이 좋아하실까?” “어허,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자기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을 끌어 들이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을 싫어하시며, 마침내 우리의 삶에 대해 결산하며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 이전까지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인내로써 기다리시고 깨우치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가 그분의 온전한 자녀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우리 대신 악역을 맡아 주시기를 청하는 겁니다.
제 어릴 적에 다니던 주일학교의 예배 장면이 기억납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시골 교회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남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예배 시간에 긴 장대를 들고 앞에 서 계셨습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이들을 감시하다가 장난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장대를 뻗어 위협했습니다. 때로는 실제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강단에서는 여자 선생님이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설교하고 있는데, 그 옆에는 골리앗 장군 같이 생긴 사람이 장대를 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환경에서 자란 제가 목사가 된 것이 기적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하나님을 끌어대어 자녀들을 혼내지 마십시오. 절대로,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아이를 위협하지 마십시오. 화가 나 있을 때는 절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고, 꾸짖을 때는 절대로 신앙과 결부시키지 마십시오. “네가 교회 다니는 놈이야?” 혹은 “너, 교회 가서 뭐 배우냐?” 이런 꾸지람은 아이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낼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교회 나오고, 하나님이 무서워서 유혹을 참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자라면서 서서히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할 꿈을 키워갑니다. 탈출하지 않는다 해도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가 두려워서 어떤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최소한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흔들려면 더 심하게 위협하고 협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불에 대해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갈수록 더 심각한 언어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제가 지금까지 지옥에 대한 언급을 미루어 온 두 번째의 이유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옥은 천국의 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성과 무게와 위치에 있어서 하늘나라와 지옥을 같은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에게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와 묻습니다.
“감독님, 천지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 같은 질문은 아주 진지한 사람에게서 나오거나, 아니면 심술궂은 학생들에게서 나오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학생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눈이 생깁니다. 그 청년이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심산인 것을 안 어거스틴은 그 청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 같은 놈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네.”
지옥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 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을 묵상하면서 천지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활동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천지창조가 시작되기 이전, 진짜 ‘태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원래의 하나님 나라 안에는 지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아래에는 지옥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오직 천사와 인간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죄악에 자신을 내어 준 이후일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고, 지옥은 나중에 필요에 의해 지어진 것이니, 지옥이 천국의 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과 ‘지어진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지어진 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 나라만 있었듯, 마지막 날, 모든 것이 변화하는 날이 되면 또 다시 하나님 나라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지옥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지옥은 천사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한시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대해 먼저 충분히 생각하고 지옥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나야만 지옥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옥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말자는 뜻은 아닙니다. 지옥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옥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편하다고 해서 애써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지옥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아주 드물게 나오는 지옥에 대한 언급 중에서 절반 정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면, 그분이 하신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미국 교회는 이 문제로 심각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2011년 3월, 미시건에 있는 초대형 교회 Mars Hill Church의 담임목사인 롭 벨(Rob Bell)이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타임> 매거진에서는 이 책에 대한 특집을 다루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권 교인들 사이에서 ‘팝 스타’격으로 추앙받는 젊은 목사가 지옥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뉴스였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벨 목사는 “지옥은 없다.”고 단정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대해 믿는 믿음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달리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세 개의 단어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지옥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단어를 강조했습니다.
1. ‘영원한’(eternal): 지옥에서의 고통은 한 순간의 휴식도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
2. ‘의식적인’(conscious): 지옥에서 겪는 고통은 마비되거나 경감되지 않고 언제나 100%의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다.
3. ‘고문’(torment): 지옥에서의 고통은 인간에 죄에 대해 하나님이 벌로 주시는 고문이다.
벨 목사는 이 세 가지 단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믿지 않던 사람이 지옥에 떨어져, 지금까지, 극대치의 고통을, 한 순간의 휴식이나 마비 없이, 100% 다 겪도록, 하나님께서, 고문을 가하고 있다는 말이 하나님을 왜곡해도 분수없이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 불과 몇 십 년의 범죄에 대해 이렇게 하실 리가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롭 벨 목사를 ‘이단자’(heretic) 혹은 ‘이교도’(pagan)라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가 “지옥은 없다.”라고 단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공격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으로써 지옥에 있는 영혼들까지 모두 구원하실 것이라는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온 ‘기독교 보편주의’(Christian universalism)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벨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들이 꼬리를 물고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 책들은 하나같이, 지옥은 존재하며, 지옥에서의 형벌은 영원하고, 휴식도 마비도 없으며, 항상 100%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고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2011년 6월에 열린 남 침례회 연례회의에서는 “우리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고문을 믿는다.”(We believe the eternal, conscious torment in hell)는 결의문을 채택했을 정도이니, 기독교인들 가운데 ‘지옥의 수호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로 놀랍습니다.
4.
저는 처음부터 이 논쟁을 지켜보았고, 한글 번역본에 안내의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아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볼 때에도 벨 목사의 논지에는 허점도 있고 위험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옥에 대해 여러 가지의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됩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같은 의문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며, 그 같은 의문을 품고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고, 교회를 사랑하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벨 목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벨 목사가 믿는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마지막에 지옥에 있는 영혼들까지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주장을 성경 본문을 증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유 불문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두 입장과 다른, 또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지옥이 있기는 하지만, 믿지 않는 영혼들은 그곳에서 영원한 멸망을 당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2011년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난 존 스토트(John Stott)가 이렇게 믿었습니다.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옥불은 “영원하고” “꺼지지 않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에 던져진 것이 불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 반대일 것입니다.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은 영원히 고문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태워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The [hell] fire itself is termed “eternal” and “unquenchable,” but it would be very odd if what is thrown into it proves indestructible. Our expectation would be the opposite: it would be consumed for ever, not tormented for ever.
이렇게 본다면, 지옥에 대해서 네 가지의 견해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1.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지옥은 존재하며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그곳에서 영원히 고문을 당한다.
3. 지옥은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에 지옥에 떨어진 영혼까지 다 구원하실 것이다.
4. 지옥은 존재하며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그곳에서 영원한 멸망을 당한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머지 세 입장은 모두 성경 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 같은 평신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에 앞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늘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이 세상에서 경험한 것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은유를 실재로 오인하지 말고, 그것을 통하여 전하려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3차원 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은유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대한 본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요한계시록 14장 9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그 짐승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 또 그런 자는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히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과, 또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온갖 은유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모든 은유들은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지옥의 끔찍한 광경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것들입니다. 지옥에 불이 타고 있고 유황이 끓고 있다는 것은 은유입니다. 환상을 통해 지옥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는 구더기가 몸을 파먹고 뱀이 들끓는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은유입니다. 심판에 직면한 사람의 참혹한 운명을 지상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도 역시 은유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서 지옥에서의 고문에는 단 1초의 휴식도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교리로 만드는 것은 성경을 잘 못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위에서 소개한 지옥에 대한 세 개의 서로 다른 견해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는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 모릅니다. 은유는 언제나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은유를 실재로 바꾸어 어느 하나의 교리의 틀에 억지로 구겨 넣는 것은 잘 하는 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 은유들을 자기 취향대로 해석하고 ‘지옥은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결코 잘 하는 일이 아닙니다.
5.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저는 하늘나라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미루어 왔습니다. 저는 오늘 지옥에 대해 설교하고 있지만,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옥에서 어떤 형벌을 받는지, 그리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또한 모든 것이 은유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의 저의 책임은 그 은유를 교리나 그림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위에 소개한 세 개의 견해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도록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은 다만 ‘지옥의 은유’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찾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옥의 은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반 지하’라는 말이 있지요? 집의 반쯤은 지상에 있고, 반쯤은 지하에 있는 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반 지옥’에 태어나는 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반쯤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C. S. Lewis가 말했듯,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면 이 땅에서도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반 천국’을 점차로 확장시켜 갈 수도 있고, ‘반 지옥’을 더 확장시켜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지옥을 선택하는 사람은 ‘반 지옥’을 ‘온 지옥’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반면,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천국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은 ‘반 천국’을 ‘온 천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지옥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여러 가지의 논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 중에 진실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장담하면서 제 욕심대로, 제 혈기대로 살아갑니다. 지옥의 가능성을 부정해야만 자신의 불의한 삶의 방식을 마음 놓고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없다고 판정한다고 해서 있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하늘나라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듯, 이 땅에서의 지옥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지옥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을 조크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옥의 은유는 우리 자신에게 주는 경고로 사용되어야 하고, 나 자신이 천국의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협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지옥행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협박하고 강요하는 데 지옥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반성하고 깨우는 데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 교만입니다. 이렇게 판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장담합니다. 바울 사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시오.”(빌 2:12)라고 권면하는데,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두려움도, 떨리는 마음도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부가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찾았습니다. 마음에 썩 드는 곳이 없어서 몇 주일을 지내다가 어느 날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례 목사는 고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 분은 지옥에 갔습니다.”라고 잘라 말하고는, 조객들에게 “여러분도 고인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그 목사, 진짜야! 장례식장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저렇게 용기 있는 목사라면 믿을 수 있지.” 그 부부는 그 집례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목사님이 용기 있는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려 깊은 분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외적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신앙의 모습과 그 사람의 내면의 영성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번번이 확인해 왔습니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코마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는 여전히 소통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고인의 지옥행을 선언하거나 장담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오직 고인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기도가 필요할 따름입니다.
6.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성탄 전야 예배 준비를 마치고 잠시 쉬려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의 딸이 코마 상태에 있었는데, 의사들의 권고에 따라 산소 호흡기를 떼려 하니, 잠시 가서 기도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차의 방향을 바꾸어 병원으로 가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엇 하러 가는가? 슬픔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하러?’ 저는 단지 위로를 위해 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서 함께 하는 것으로 인해 뭔가 실질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운전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와 함께 가 주십시오. 껍데기 위로만을 위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십시오.’
병실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울고 있었고, 큰 딸이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병실 한 편에는 처음 보는 중년 부부가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코마 상태에서 기계에 의지하여 호흡을 하고 있는 그 아가씨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영혼이 제 말을 듣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는 가십시오. 여기 걱정은 말고, 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팔을 벌리고 있으니,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품에 당신을 던지십시오. 제 말을 믿으십시오. 믿고 그 품에 안기십시오. 그 친절한 팔이 당신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병실 한 편에 서 있던 그 중년 부부는 한 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었고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이 그분들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의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동안 눈을 뜨고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동안 물끄러미 그 처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그 남편에게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보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동안 저로부터 빛 같은 것이 나와 그 아가씨의 얼굴에 내려앉고, 고통으로 인해 잔뜩 찡그러져 있던 그 아가씨의 얼굴이 그 빛에 스르르 녹아내리며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던 그 남편께서는 그 순간 ‘뭔가 있구나!’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저는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일입니다. 저는 그 아가씨의 영혼과 제가 소통하고 있다고 믿고 말을 했고 기도했을 뿐입니다. 기도하고 난 후, 아버지와 언니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두 분이 눈물을 훔치고 돌아서고 간호사가 산소 호흡기를 떼 내려 할 때, 그 아가씨의 미소 띤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부부는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서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그 부부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권면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교회에 찾아 나온 것입니다. 물론, 그 아버지께서도 그 이후로 꾸준히 예배에 나오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해 주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말할 때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지옥행을 단정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해도, 목숨이 끊어지고 부패 과정이 시작되는 그 시점까지 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을 오락가락 하는 사람을 붙들고 예수를 영접하라고 보채는 것이 과연 옳은지, 제게는 큰 의문이 있습니다. 그 대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그 사랑을 믿고 의지하도록 말해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얼굴을 돌리는 순간 회개는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복음으로 믿으십시다. 지옥불이 무서워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믿으십시다. 복음을 복음으로 전하십시다.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도록 위협하려 하지 말고, 십자가의 그 사랑을 전하여 그 사랑에 감복하여 믿도록 전하십시다.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깨워 일으킬 때만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하십시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심판에 대해서는 엄중히 경고하되, 지옥불로써 위협하는 일은 삼가십시다.
오늘 읽은 요한일서의 말씀을 명심하십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4:18-19)
우리 모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이 모든 일을 하도록 맡기고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전하십시다. 두려움은 신속하게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그 결과는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진정한 사랑은 더디지만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것을 완성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며 그 사랑을 전하십시다. 그 사랑을 아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 회개할 것이며, 회개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할 복음입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을 믿게 하시고
그 사랑이 일하도록 맡기게 하소서.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사실을,
결국 사랑이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믿게 하시고
그렇게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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