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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마에스트로의 조건(Conditions for Spiritual Maestro)
에배소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3386 추천 수 0 2013.04.29 23:16:37성경본문 : | 엡4: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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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10월 30일 주일 설교 <교회설립 60주년 기념 설교: ‘몸이여, 나의 몸이여!’(4)>
“영적 마에스트로의 조건”(Conditions for Spiritual Maestro)
에베소서 4:14-16
1.
요즈음 버지니아의 단풍이 절정입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마음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요술이 숨겨져 있습니다. 무심히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유심히 보면 기적 천지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여러 번 감탄을 하며 지냅니다. 운전을 하다가 갓길에 멈추어 서고 싶을 때도 자주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예술품은 하나님의 작품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몸이야말로 신비 그 자체입니다. 건강한 상태에 오래 있다 보면, 그저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겪어 보면, 몸이 얼마나 신기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저녁이 되어 잠에 드는 것도 기적이고, 아침이 되어 눈이 떠지는 것도 기적입니다. 저는 요즈음 자주,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며,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일어난 것이 기적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때로 온 우주를 정복할 수 있다고 교만을 떨지만, 사실은 자신의 몸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몸의 여러 지체가 작동하는 것을 관찰해 보면, 더욱 신비롭습니다. 우리 몸이 사지백체(四肢百體)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확히 따져 보면, 우리 몸의 기관은 일백 개를 넘을 것입니다. 그 기관들은 서로 생김새도 다르고 맡은 역할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어떤 일을 할 때면 그 기관들이 모두 그 하나의 일을 이루는 데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지으실 때, 몸의 모든 지체가 두뇌의 신호를 따라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집중하도록 디자인을 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두뇌의 신호에 상관없이 따로 노는 몸을 상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어느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로 인해 중추신경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의식을 잃었던 아들이 며칠 만에 의식을 찾는 순간, 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의식이 돌아오자 그 아들은 몸을 움직이려 했고, 뇌의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 아들의 몸은 제각기 따로 움직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마치 문어발처럼 제각기 움직이는 아들의 사지를 보고 그 충격에 쓰러진 것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상태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한 순간이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차려 입고 예배에 나와 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감격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 몸이 내가 하고자 하는 하나의 일에 순간순간 집중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하루에도 여러 번 몸을 쓰다듬어 주면서 “고맙다. 정말 고맙다!”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씩 그 기능을 잃어갈 것이고 마침내 모든 것이 분해되겠지만, 이렇게 몇 십 년 동안 제 역할을 해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두뇌로부터 전달되는 신호에 따라 몸의 모든 기관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집중한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기합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는데, 이 순간에 제 몸의 모든 기관은 말씀을 전하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입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손짓, 몸짓, 표정, 눈빛, 음성의 강약과 고저 등 모든 것이 합하여 말씀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하나의 기관이라도 두뇌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가령 제 손이 아무 때나 번쩍 올라간다거나 혹은 제 눈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윙크를 한다면, 제 설교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앉아서 듣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집중하고 말씀을 듣자.”는 두뇌의 지시에 온 몸이 협조하고 있기에 은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신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몸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제 몸이 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제 머리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신장 이식의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여 한 사람의 몸 전체를 다른 사람의 머리에 옮겨 붙일 수 있을 정도라는 보도를 읽었습니다. 그 보도를 읽고 그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그 몸의 주인은 누구일까? 몸의 주인일까? 머리의 주인일까?’ 당연히 머리가 그 몸의 주인입니다. 머리가 판단하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대로 몸은 따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몸의 모든 지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는 것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 비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16절)
우리는 지금 교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진정한 교회인지, 참된 교회로서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더욱 참된 교회가 되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60년을 감사하며 100년을 내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거룩한 소망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려면 가장 먼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나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연결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는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으면, 나는 마치 두뇌로부터의 신호 전달이 차단된 팔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팔은 제 기능을 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거나, 위험한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실상이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든든히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면, 그로 인해 교회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좋은 대로 봉사한다고 분주한데, 실은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 기능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고 또 때로는 큰 문제가 됩니다.
앞에서 읽은 에베소서 4장 16절의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두 개의 동사 ‘연결되다’와 ‘결합되다’의 헬라어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 동사는 계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제기한 질문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 항상, 늘, 언제나,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가?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면 늘 그리스도 예수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이 진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요 15:3-4)
3.
우선, 나부터 생각하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지체들이 각각 예수님과 든든히 연결되어 있으면, 그 지체들은 자연히 서로 연합하여 두뇌가 시키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도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일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는 동안 손과 발과 입술과 눈과 코와 귀가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관이 두뇌의 신호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사지백체가 하나가 되어 일하려면, 사직백체 각각이 두뇌의 신호에 복종하고 응답하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우리, 한 번 잘 해 봅시다.”라고 말하며 굳게 결의해도,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금세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실하게 연결되어 있으면, 그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며 문화가 달라도 서로 합하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에 휩싸인 교회는 두뇌의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신경에 손상을 입은 몸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두 제 각각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각각 자신을 돌아보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금 든든히 연결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에 순종하면, 교회의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다. 100명이 넘는 연주자들이 연주 홀에 가득 앉아 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악기는 다 다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연주자들은 다 각각 지휘자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서로 옆에 있는 사람의 연주에 맞추어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연주 소리도 듣지만, 각자가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지휘자입니다. 100명의 연주자들이 모두 각각 지휘자에게 집중하여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 아름다운 협주곡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목사가 아닙니다. 장로도 아닙니다. 당회도 아닙니다. 감독도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교회의 지휘자이십니다. 저와 여러분 각자는 그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이 보내는 싸인 하나 하나를 주목하고 민첩하고 정확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각자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르다 보면, 교회는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진리를 저 자신에게서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제가 제 아내를 가장 사랑할 때는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가장 너그러울 때는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입니다. 제게서 사심이 가장 보이지 않는 때는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잠겨 있을 때입니다. 반면, 제 마음이 가장 팍팍하고 까칠할 때는 예수님과의 연결이 부실할 때입니다. 제 마음이 인색해지고 편협해질 때는 제가 예수님과의 사귐에 소홀히 할 때입니다. 제 마음에 사심이 깃들고 부정한 생각이 자리 잡을 때는 분명코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을 때입니다.
여러분 속회에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속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든든히 연결되는 일에 힘써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까? 부부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께 든든히 연결되도록 힘써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할 일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 영향력이 다른 관계에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이 이렇다면, 교회에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4.
몸의 지체들이 두뇌와 든든히 연결되어 두뇌로부터의 신호가 막힘없이 전달되는 것은 건강한 몸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냥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두뇌로부터 전달되는 신호에 대해 정확하고 민첩하며 능숙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다. 연주 시간 20분이 넘는 대곡을 외워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심취하여 건반을 두드립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하게 연주합니다. 두 팔과 열 손가락을 사용하여 수 만개의 음표를 정확하게 터치하며 감동스러운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그의 열 손가락은 두뇌의 신호를 그토록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소화해 낼 수 있을까요?
그 모든 것은 손가락 하나로 ‘띵동’ 하고 음표 하나를 터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연습할 때 그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었습니다. 손가락이 꼬이고 음표를 잘 못 보기를 수 없이 반복합니다.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연주가가 되기를 꿈꾸며 연습에 연습을 반복합니다. 그 많은 연습의 초점은 두뇌로부터 전달되는 신호를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반응하는 데 있습니다. 연습을 할수록 두뇌로부터 손가락까지의 전달 시간이 단축되었고 정확해졌습니다. 이제는 그의 손가락 열 개는 두뇌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달인’이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마에스트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원리는 믿음에 있어서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믿음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진보하고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매일같이 레쓴을 받고 피아노 연습을 하듯, 우리의 영적 머리이신 예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반응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시 태어나는 것’(being born-again)과 ‘다시 만들어지는 것’(being made again)이 합해져야 완성됩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우리는 거듭납니다. 세례 받는 순간, ‘거듭난 나’는 ‘응애 응애’ 하고 우는 아기입니다. 그 아기는 그 이후의 믿음 생활을 통해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세 가지를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을 ‘영적 마에스트로의 조건’(conditions for Spiritual Maestro)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첫째, ‘내주 연습’(abiding practice)입니다. ‘내주’(內住)란 ‘안에 살다’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듯, 내 존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주일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안 됩니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냥 교회를 오락가락하다 보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그냥 두면 붙어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는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입니다.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내주 훈련’을 소홀히 하면 어느 새 포도나무 줄기에서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앞에 잠잠히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영적으로 삽니다.
둘째. ‘분별 연습’(discerning practice)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선택과 결정 앞에서 주님의 뜻을 묻는 연습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로울까?’라고 질문하고 살던 버릇을 버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일까?’라고 질문하는 버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과 사색과 실험을 통해 이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주님께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만 감지되는 주님의 신호를 분별하려면 자꾸만 시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혼동합니다. 잘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하다 보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그리고 연습을 통해 습득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해 운동감각이 발달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분별 연습을 통해 영적 감각을 발달시켜야 합니다.
셋째, ‘순종 연습’(obedience practice)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이 되면, 그것에 우직하게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당장’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탄이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을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갑니까? 우리의 자아가 강할 때는 그분의 뜻이 분명해도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하거나 미루고 싶어집니다.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마치 손해 보는 것 같고 불편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질끈 감고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 연습을 하다 보면, 내 뜻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자유와 기쁨을 경험합니다. 손해 보는 것이 있지만, 그 손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점점 순종하는 데 민첩해지고 신속해지며 용감해집니다.
5.
이렇게, ‘내주 연습’과 ‘분별 연습’과 ‘순종 연습’을 매일 지속하다 보면, 우리는 점점 능숙한 연주자처럼 혹은 잘 훈련된 운동선수처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민첩하고 능숙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연습과 훈련을 통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모두 다 영적 마에스트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부름이며, 모두에게 열어놓으신 문이며, 모두가 누리기를 원하는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14-15절)
여기에 사용된 두 단어를 잠시 주목해 보십시다. “흔들리다”라는 단어와 “이리저리 밀려다니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요!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파도에 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물체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사상과 풍조에 밀려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물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에 휘둘려 이리 저리 밀려다닙니다. 마치 홍수에 밀려온 나무통이 바다에 떠다니듯, 그렇게 정처 없이 흔들리고 밀려다니는 것입니다.
왜 ‘내주 연습’이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든든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고 밀려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분별 연습’이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철학과 사상과 풍조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잠시 방심하다 보면 어느 새 헛된 일에 발을 들여놓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 ‘순종 연습’이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향한 욕구가 너무도 질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훈련을 해 가다 보면, 거듭난 나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그리고 성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연결되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내주 연습’과 ‘분별 연습’과 ‘순종 연습’을 지속하도록 서로 돕는 데 우선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어떤 훈련이든 혼자 하면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앞 선 사람이 가르쳐주고 끌어 주면 더 빨리 성장합니다. 영적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떼어 주님과 사귀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로 모이고, 주중에 성경공부로 모이며, 정기적으로 속회로 모여서 서로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자라갈 때,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도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드는 데 있어서 민첩하고 능숙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오늘 읽은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16절)
이 구절의 마지막을 주목해 보십시다.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몸의 각 지체가 성장하는 것도 그렇고, 하나의 몸으로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그렇고, 그 성장의 열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마에스트로가 되는 것, 사랑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온전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 나 개인의 믿음의 열매이며, 교회의 열매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변화가 없다면, 다른 모든 면에서의 변화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갈구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해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 비슷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유사품에 속지 마십시다. 진정한 사랑에 무지함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도록 힘쓰십시다. 그분 안에 항상 머물러 살기를 힘쓰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민첩하고 정확하게 순종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자라가며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믿음의 길에 들어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길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피아노를 배우기로 했다면, 정명훈씨나 랑랑처럼 되지는 못할망정, 누구에겐가 마음을 담은 노래 하나 정도는 연주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아시시의 프랜시스나 캘커타의 테레사같은 영적인 마에스트로가 되지는 못할망정, 우리가 믿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우리의 삶으로 보여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설립 60주년을 지내며 100년을 내다보는 교회라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민첩하고 능숙한 면모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같은 거룩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다면,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와싱톤한인교회의 지체인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든든히 연결되어 있는가? ‘내주 연습’과 ‘분별 연습’과 ‘순종 연습’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이 훈련이 일어나도록 서로 돕는 일에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 그러한 실천을 통해 나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부디, 이 같은 질문들을 붙잡고 정직하고 신실하게 씨름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일에 마에스트로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저희로 하여금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지체가 되게 하소서.
주님께 든든히 연결되어 있으며
주님께서 보내시는 신호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민첩하게 응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고
그 사랑을 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보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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