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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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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11월 6일 주일 설교 <60주년 기념설교: ‘몸이여, 나의 몸이여!’(5)>
“은사로 되는 교회”(Church Run by Gifts)
고린도전서 12:4-11
1.
저는 자연을 관찰하거나 몸을 관찰하면서 ‘무신론적 진화론’(atheistic evolutionism)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자주 있습니다. 놀랍도록 정확한 질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목적을 향해 운행하고 활동하는 우주와 생명이 저절로, 우연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 생명이 잉태되어 태어나고 자라나 온전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노쇠하고 사망하여 분해되는 과정을 생각해 봅니다. 매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 봅니다. 참으로 정교하고 놀라운 질서가 몸 안에 숨겨져 있으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기능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기가 막힌 물체가 저절로, 우연히 진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과연 과학적일까요?
현대 기독교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히는 C. S. 루이스가 무신론적 진화론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런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 시계 부속품을 모두 분해하여 작은 통에 넣고 흔들기를, 온전한 시계로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조립될 때까지 계속해 보자는 겁니다. 우주의 나이가 140억년(14 billion years)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장구한 시간 동안 1초에 한 번씩 흔들기를 반복한다면, 언젠가는 온전한 시계로 조립될까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쓰면서 인간의 눈 때문에 고민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눈이 그토록 정교한 모습으로 진화하는 데는 우주의 나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윈이 볼 때, 진화의 증거는 너무도 분명한데, 우연히 그리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 없는 증거가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의 고민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두뇌로부터의 신호에 반응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과정을 관찰해 보면 신기하고 기가 막히는 것이 무궁무진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던 어느 의사 교우께서 제게, “목사님, 몸에 대해서 의사보다 더 많이 아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제가 곧이듣지는 않습니다만, 몸에 대해, 사물에 대해, 우주 원리에 대해 당연한 것까지도 왜 그럴까 질문하는 버릇이 제게 있습니다. 제가 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순전히 궁금증에 의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몸에 속한 여러 지체가 몸에 닥친 위험에 대처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다. 영화나 연속극에 보면, 어떤 사람이 칼에 맞거나 총에 맞는 순간, 어김없이 “으윽!”하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집니다. 왜 그럽니까? 저는 고통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칼에 맞거나 총에 맞아서 몸에 극대치의 위험이 닥치면,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그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 한 순간에 그 상처 난 곳으로 몰리는 겁니다. 온 몸의 피가 상처 난 곳으로 몰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한 순간에 다리가 풀리고 손이 떨리며 머리는 작동을 멈추어 하얗게 되는 것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위협을 받으면, 다른 지체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자원을 위험에 처한 지체에게 내어줍니다. 반대로, 몸의 한 지체가 강해지면, 그 에너지가 다른 지체에게도 흘러갑니다.
이렇게, 몸에 대해 관찰하다 보면, 시편 저자처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은 <새번역>보다 <개역성경>의 번역이 더 좋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우리의 몸을 관찰하면서 이 ‘신묘막측함’(divine mystery beyond human comprehension)을 느끼는 사람이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며, 합리적인 사람일까요? 오히려, 창조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신비 앞에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는 것이 더 정직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겸손한 자세로 과학을 대하고 보면, 진화의 길고 긴 역사 배후에 창조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몸을 관찰하며 하나님의 신묘막측함에 놀라는 것처럼, 우리는 교회를 관찰하며 하나님의 신묘막측함에 대해 놀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우리의 몸만큼이나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에게 몸은 별스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겠지만, 몸 안에 숨겨진 신비를 보는 사람에게는 ‘기적 덩어리’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외형만을 보는 사람에게 교회는 별스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일 것입니다. 세상에 흔한 다른 모임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교회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게 된다면, 시편 저자가 몸에 대해 한 고백을 교회에 대해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교회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교회가 신묘막측한 신비를 가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 각 사람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해 보면, 실로 경이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는 연습을 지속하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연습을 계속하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둘째,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감당하게 만들어 주는 성령의 은사들(gifts of the Holy Spirit) 때문입니다. 몸 안에 다양한 지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은사가 있습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믿는 이들에게 나타나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것을 보면, 경탄을 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은사(恩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은사란 ‘은혜로 받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선물은 모두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대가가 거론되면 선물이 아닙니다. 상품이 되거나 뇌물이 됩니다. 주는 사람이 주고 싶어서 아무 대가 없이 주는 것만을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주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주십니다. 물질적인 선물이 아니라 영적인 선물입니다.
우리 중에는 ‘은사’라는 말을 들으면, 열광주의적인 신자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니 ‘은사’니 하지 않고 예수를 믿고 싶어 합니다. 마치 은사를 독점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 왔고, 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자주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균형을 잃은 듯한, 그리고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곤 합니다. 그러니 성령 받지 않고 예수 믿을 길을 찾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 받지 않고 예수 믿을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옛날에 살았던 위인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에 살다 간 한 위인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분의 거룩한 성령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만난다는 말은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고,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바로 앞, 즉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다.
예수를 알면 성령을 알고, 성령을 알면 예수를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적 세계에 눈이 뜨이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물론, 입바른 말로 할 수는 있습니다. 습관으로 혹은 형식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담긴 진실한 고백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다음, 우리가 할 일은 내주 연습과 분별 연습과 순종 연습을 매일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더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할 때, 성령의 ‘열매’와 ‘은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과 생각과 말과 행동에 만들어내는 변화입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같은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주시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그 영적 능력이 아니고는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령 없이 참된 믿음 없고, 은사 없이 참된 교회 없습니다.
3.
그렇다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8절부터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홉 가지의 은사를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에 대한 통역.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일곱 가지의 은사를 열거합니다.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침, 권면, 나누어주는 일, 지도하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
이 두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선물의 몇 가지 예를 든 것입니다. 이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두 종류의 은사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 나에게 없었던 능력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로 기도하게 됩니다. ‘방언’의 은사입니다. 외국어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전혀 없는데, 다른 사람의 방언을 알아듣습니다. ‘통역’의 은사입니다. 손을 얹어 기도할 때 병이 낫습니다. ‘신유’(divine healing)의 은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의 아픔이 느껴지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공감’의 은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에 대한하나님의 뜻이 느껴집니다. ‘예언’(prophecy)의 은사입니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이러한 영적 현상들을 수 없이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저의 합리적인 이성이나 과학적 사고에 아무런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이 같은 은사들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 안에 머물러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우리는 손에 만져지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세상을 무미건조하게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축소시켜 놓은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 안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들이 가득합니다.
둘째, 우리에게 이미 있었던 재능을 성령께서 사용하여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열거한 은사 중에 섬기는 능력, 가르치는 능력, 지도하는 능력, 자선을 베푸는 능력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자신에게 있던 재능과 경험과 지식과 재물을 성령께 내어드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재능과 경험과 지식과 물질은 은사로 변모합니다. 나의 것이지만 성령의 손에 들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동일한 재능이요 경험이요 지식이요 물질이지만, 성령의 손에 들려 은사로 사용되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합니다. 그것은 재능입니다. 그 사람이 그 재능으로 노래하면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는 삶을 통해 성령의 감화를 받고 음악의 재능을 성령께 맡겨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하면, 그것은 재능이 아니라 은사가 됩니다.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통해 영혼을 만지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묵묵히 허드렛일을 찾아 행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면, 성령께서 그것을 은사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흘리는 땀은 주님의 거룩한 몸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흘리는 거룩한 땀이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두 종류의 은사 중에서 자신에게 없던 능력이 생기는 은사를 더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에게 영적 강자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은사는 아주 드물게 나타납니다. 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필요하다 싶을 때 주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초월적인 은사를 추구하다가 지치고 낙심합니다. 또한,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 강자인양 착각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필요하여 주신 것인데, 마치 자기가 믿음이 좋아서 그런 은사를 받은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은사를 제대로 아십시다. 은사를 제대로 구하십시다.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주시는 은사에 대해서는 주시는 분 성령께 맡기고, 우리는 지금 나에게 있는 재능과 경험과 지식과 물질을 성령께 내어 드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십시다. 늘 은사를 경험하고 사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설교를 하든, 찬양을 하든, 주차 안내를 하든, 교사를 하든, 주방 봉사를 하든, 골방에서 헌금 계수를 하든, 셔틀 버스 운전을 하든, 나의 재능과 경험과 지식을 성령께서 사용하도록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나의 작은 재능을 사용하여 주님의 몸을 세울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은사로써 사용되는 나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마음속에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4.
얼마 전, 공천위원회로부터 행정직 위원회의 장을 맡아 달라는 편지를 받은 분께서 제게 메일을 보내 오셨습니다. 그분은 공천위원회의 편지를 받고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두고 깊이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로부터 자신이 중요한 직책에 공천을 받은 것이 큰 영광이요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지만, 많은 기도 끝에 사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메일을 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게 봉사할 때는 운전대를 잡을 때와 주차 사역을 할 때이며,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막노동을 할 때입니다. 그 때, 주님의 평화가 저에게 늘 찾아옵니다. 저는 신앙의 지도력에서도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여 제게 맞지 않는 직책을 맡음으로 인해 목사님과 교회에 덕을 끼치고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를 주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제가 교회 봉사를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제 은사에 맞지 않는 직책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봉사를 마음껏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메일을 받고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분의 교회 활동을 통해서 섬김의 은사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들 앞에 드러나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편한 사역을 하고 싶어 하는데, 이 메일을 쓰신 분은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서 더 즐겁게 일하십니다. 고 양승길 장로님께서 떠나셔서 생긴 빈자리를 그 교우께서 채워가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결단을 하신 분도 계십니다. 그분도 역시 아주 무거운 행정직에 공천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거나, 직장 형편으로 보거나, 혹은 교회에서 맡고 있는 다른 사역으로 보거나, 그 부름을 받아들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양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예배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설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주일 저녁, 그분은 제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 오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목사님의 설교 중에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이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저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저의 부족함과 눈에 보이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 오히려 더욱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 뿐임을 깨닫습니다. 교회의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메일을 받고 또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는지요!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전 2:13)
저는 바울이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감사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들려지는 말씀을 다만 인간의 말로 듣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힘쓰는 성도가 있으니, 설교자인 저에게는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 주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성령께 의지하여 은사로써 설교를 하고, 성도들은 성령께 의지하여 은사로써 말씀을 들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나면, 미안해하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퇴하시고 기력이 쇠하여 뭔가 봉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혹은, 직장과 가정 일에 매어 어쩔 수 없는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탁드립니다. 미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빚진 마음을 담아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 기도보다 더 큰 헌신은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는 작은 행동만으로도 큰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은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도 매 주일 추가 주차장에 주차하십니다. 그러시지 말래도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미안함을 느끼고 분발하셔야 할 분들도 게십니다. 성령께 내어드릴 재능과 경험과 지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내게 유익한 것만을 찾아가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요청하면 귀찮게 생각하고 내 편의만을 위해 결정하는 분들이 또한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냥 모였다 흩어지는 인간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영원하도고 거룩하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의 재능과 경험과 지식과 재물을 드려 성령께서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리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마련하신 신비입니다. 그 신비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을 위해 여러분의 것을 드려 은사로 사용되지 않으면, 여러분의 이름이 교회에 등록되어 있을지라도, 주님의 몸의 지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손에 붙들려 은사로 사용되는 사람만이 주님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있는 것 중에서 성령께 내어드려 은사로 사용되게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믿는 믿음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몸을 위해,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믿는 믿음으로 도약하기를 바랍니다. 가장 먼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거룩한 결단이 될 것입니다.
5.
몸을 관찰하면서 그 신비에 눈을 뜨면,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물건이 생길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되듯, 교회를 관찰하면서 그 신비에 눈을 뜨면 똑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나려면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모두 성령께 자신을 드려 자신의 재능과 경험과 지식이 은사로써 사용되게 해야 합니다. ‘은사로 되는 교회’를 볼 때, 우리는 시편 저자처럼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화합하여 인간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은사로 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이 세상에 드러내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이유입니다.
이제, 교회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한 연속설교 “몸이여, 나의 몸이여!”를 마칩니다. 부디, 이 연속 설교를 통해 교회가 얼마나 거룩하고 영원하며 고귀한 것인지를 다시 확인하셨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가슴 벅찬 감격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의 지체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주님을 몸으로 보이고, 교회로 모여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
저희로 하여금
교회의 신비에 눈뜨게 하시고
그 신비에 지체로서 참여하게 하소서.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은사로써만 살아가게 하소서.
저희 각자를
참된 은사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주님의 몸을 위해
사용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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