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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습1: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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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11월 13일 주일 설교
포도 지게미에 앉아”(Sitting on the Lees)
스바냐 1:12-18
1.
얼마 전,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Muammar Gaddafi)가 반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그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인터넷에 올라 있습니다. 1969년부터 무려 42년 동안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사람의 종말로는 너무도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비디오를 보았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절대 권력이 얼마나 초라하게 종말을 맞는지를 목격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 동안 가다피가 저지른 잔인무도한 일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 끝난 것도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짐승을 잡듯 가다피를 에워싸고 그의 몸을 치고 차고 찢는 군중들의 모습은 결코 ‘정의’의 얼굴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 같은 사건을 보고 우리는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로잡히게 되어 있다)이라고도 하고 ‘인과응보’(因果應報, 어떤 일이든 결국 마땅한 보응을 받게 되어 있다)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정의는 살아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우주 질서에 무엇인가 있어서 잘못된 일은 결국 바로잡히고, 악은 징벌을 받고 선은 보상을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자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있지만, 정반대 증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당장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백주 대낮에 활개를 치며 다니는 것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다피가 결국 정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동안 그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잔인무도함에 떨며 숨죽여 살던 사람들에게 42년은 너무도 긴 시간입니다. 아마도, ‘과연 정의는 살아있는가?’ 혹은 ‘과연 신은 살아 계신가?’라는 의문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천복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다 자신의 짐을 받아 안으며, 주장하고 싸우기보다는 양보하고 희생하는 편을 택하고, 자신의 본분을 찾아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큰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가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저렇게 선한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 반대가 더 많습니다. 당연히 정의의 보상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동일한 혼란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번영 설교자들’(prosperity preachers)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믿음 좋은 사람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하며 만사형통해야 합니다. 시험공부 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얻을 것이며, 누구와 경쟁을 하든 이길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디 실상이 그렇습니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이 그 믿음 때문에 만사형통하며 살고 있습니까? 믿음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렵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희생하며 배신당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살아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일상사에 과연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과연 필요할 때마다 개입하실 뜻과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의 운명이 점차 기울어가고 있을 때, 스바냐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 (4절)
그 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 (12절)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일상생활 중에는 온갖 악하고 부정한 일을 행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를 드리고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성전 바깥에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성전에 십일조는 바쳤지만, 나머지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사치를 부렸습니다. 거룩한 몸짓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어두운 뒷방에서는 음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중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모든 죄악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현실에서 목격하게 되는 두 가지 증거, 즉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정의는 살아있다는 증거와 하나님은 계시지 않거나 계신다 해도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 이 두 증거를 보고 유다 백성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만 이 세상일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시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누구든지, 처음에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시다가 잘 못하면 회초리를 내려치시고 잘 하면 상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꽤 큰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을 줄로 생각했는데, 아무런 벌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으로는 꽤 큰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기 쉽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실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이라고 부릅니다. ‘무신론’(atheism)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반면, ‘실제적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일에 관심도 없고 개입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바냐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는 그냥 무신론자보다 더 위험하고 또한 더 위선적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는 온갖 탐욕을 불태우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을 합니다. 그 위선은 보는 사람을 역겹게 만듭니다. 무신론자는 회심하면 진실한 신자로 변화될 희망이 있습니다. 반면, 실제적 무신론자는 회심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신론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들을 가리켜 12절은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번역은 원문의 의미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포도 지게미(lees)에 오래 앉아 있는 인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 빗댄 비유입니다. 포도를 으깨어 통에 넣고 이스트를 첨가하여 발효를 시킵니다. 그런 다음, 약 20여일이 지나서 액체를 쏟으면 그것이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를 쏟아내고 남겨진 것을 ‘지게미’라고 합니다. 그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립니다. 쏟아낸 포도주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 주일마다 한 번씩 침전물을 걸러 주어야 합니다. 만일 포도 지게미에 포도주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곰팡이가 생겨서 다 망쳐 버립니다.
절묘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치 포도 지게미에 오랫동안 방치해둔 포도주처럼 죄악에 눌러앉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있으며,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손을 뻗어 징벌도 하시고 보상도 하신다고 믿는다면, 죄악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스바냐 시절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되 그분을 사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죄악에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삼위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을 초월하여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분은 나를 아시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머리카락의 수까지 헤아리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나의 모든 삶이 하늘의 CC TV를 통해 기록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마침내 그분 앞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낱낱이 결산할 날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스바냐 시절의 유다 백성처럼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처럼 우리도 혹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요즈음의 교인들을 가리켜 ‘종교 소비자’(religious consumer)라고 부릅니다. 쇼핑하듯이 교회 다닌다는 것입니다. ‘쇼핑하듯 교회 다니는 것’과 '교회 쇼핑'(church shopping)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만큼 어떤 교회를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를 다녀 보고 자신에게 가장 맞는 교회를 찾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를 정한 다음에도 여전히 쇼핑하듯 교회에 다니면 ‘종교 소비자’가 됩니다. 월마트나 타겟에서 값싸고 좋은 물건 고르듯, 교회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취하려는 사람들이 종교 소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좋은 상품을 찾기 위해서 늘 옮겨 다닙니다. 월마트에서 케마트로, 케마트에서 지마트로, 지마트에서 이마트로, 이마트에서 저마트로!
종교 소비자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찾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 삶에 관여하신다고 믿는다면, 교회에 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몸을 위해서 내가 드릴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내가 희생할 일은 무엇인지를 찾을 것입니다. ‘종교 소비자’에서 ‘종교 생산자’(religious producer)로 혹은 ‘종교 유통자’(religious distributor)로 변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교회 바깥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도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교회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이 부정한 이득을 보려고 손님을 속인다면, 그는 속으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고 하면서 연약한 아내 혹은 자녀에게 폭행을 가한다면, 그 사람도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시 돋친 말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질식시킨다면, 그 사람도 역시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배우자를 속이는 부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때로 목회자들의 숨겨진 부정이 드러납니다. 거룩한 외양을 쓰고 돈이나 섹스로 부정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그 같은 부정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 우리는 경악합니다. 어떻게 그토록 부정한 일을 행하면서 주일마다 거룩한 강단에서 예배를 이끌고 설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처음 부정을 저질렀을 때는, 설교하다가 강단에서 벼락 맞아 죽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아하, 내가 믿는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구나!”
4.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서 유다 백성의 실제적 무신론이 만들어낸 타락하고 부패하고 오염된 삶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종이호랑이처럼 생각하고 죄악에 뭉개고 앉아 살던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병풍에 그려져 있는 호랑이가 어느 날 진짜 호랑이가 되어 ‘어흥!’하고 튀어 나오는 것처럼, 그들이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께서 어느 날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포도 지게미에 너무 오래 내버려 둔 포도주를 쓸 수 없어서 통째 내다 버리는 것처럼, 죄악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던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빈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서기에 너무도 누리는 것이 많았고, 너무도 지은 죄가 많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기에는 죄악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달콤한 죄악의 맛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두려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만,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고, 스바냐가 예언을 했던 시대로부터 약 50년 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 안타까운 역사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실제적 무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저와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지 유다 백성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좋은 신자의 허울을 쓰고 실제로는 죄악을 일삼는 자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마주할 운명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포도 지게미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발효된 포도주를 쏟아내듯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래 전, 아삽이라는 이름의 히브리 시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실제적 무신론에 빠질 뻔 했던 경험을 시로 적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시 73:1-2)
아삽에 의하면,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는커녕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4절) 흐릅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고통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을 비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7절)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8절) 즐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들에게 물들어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11절)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며 악을 일삼는데도, 그들은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12절) 갑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아삽도 역시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13절은 아삽의 마음을 흔들고 있던 생각을 잘 묘사해 줍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5.
그렇게,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뻔했던 위기를 아삽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그 해답은 17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삽이 영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성소에 들어가 잠시 현실에서 눈을 떼었을 때입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떴습니다. 우리에게 예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물질을 만지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하루만 방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에 비늘이 덮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에 귀지가 낍니다. 예배는 아삽처럼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발걸음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주일 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매일같이 하나님과 독대하는 영적 생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속회로 모여 영적 사귐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보다 계시지 않다는 증거가 더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도, 무심하다는 증거도, 혹은 무력하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복을 주시고 악행에 대해 벌을 내리시기를, ‘즉각즉각’ 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요? 우리 마음에 자유 의지가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마치 가다피 아래에서 백성들이 살얼음판을 걷듯 혹은 지뢰밭을 걷듯 살았던 것처럼, 언제든지 실수하여 불 심판을 받을 가능성 때문에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살 것입니다. 죄악을 범하는 회수는 줄어들겠지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자유 의지를 제거한다면, 우리는 로봇이나 절대 복종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자유 의지를 제거하여 로봇이나 노예로 만들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즉시즉시 벌을 내려 공포에 질리게 하기를 원치도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선과 악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스스로 선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을 제공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자원을 잘 활용하여 선을 선택하면서도 기쁘고 즐겁게 사는 존재로 자라가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와 성장을 기다리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자원을 거부하고 제 욕심대로 악을 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부드러운 음성과 손길로 그가 죄악으로부터 돌아서도록 부르시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사람의 악행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예언자 요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 (2:13)
이 대목에서 이렇게 묻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들이 돌아서기까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악행과 파괴와 살해는 어떻게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 선한 사람들이 받는 피해는 또 어찌합니까? 영영 돌아서지 않는 악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적어도 두 가지의 대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과 함께 당신의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들입니다. 교회로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깊어져만 가는 죄악의 현실을 보고 “왜?”라고 묻기를 멈추고 “어떻게?”를 물어야 합니다. 이 땅에 선을 북돋우고 악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를 묻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을 그분의 신비로운 손길로 바로잡으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바울 사도가 한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니다. 인간의 악행으로 인해 깨어진 유리조각을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만들어 내십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옷감을 사용하여 멋진 퀼트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사필귀정’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인과응보’도 진리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결국 갚아 주십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스스로 깨닫고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만들어진 폐허도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십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소를 찾기에 더욱 열심을 내십시다. 전심으로 예배에 참여하여 영혼의 눈이 말갛게 씻기고 영혼의 귀가 예민해지도록 만드십시다. 매일 주님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일을 충실히 하십시다. 믿음의 식구들끼리 함께 모여 영적인 사귐을 나누는 일에 마음을 다하십시다. 그렇게 꾸준히 성소를 찾으면, 현실이 우리를 속이려 할지라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 할 때, 성소에서 보고 들은 것이 우리를 잡아 줄 것입니다. 포도 지게미에 오래 눌러앉아 쏟아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 영혼의 눈을 뜨고 영혼의 귀가 열릴 때, 비로소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감사가 우리 안에서 우러나옵니다. 현실에 현혹되어 무신론자가 되거나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면, 잘 될 때는 교만해지고 잘 되지 않을 때는 불평불만으로 살게 됩니다. 잘 될 때는 교만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잘 못 될 때는 불평불만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불평불만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감기 바이러스보다 더 큰 해를 끼칩니다.
진실로 감사할 수 있을 때는 성소에 들어가 영혼의 눈이 뜨일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남들 다 누리는 호사를 하나도 누리지 못한대 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그분 안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복을 내리기도 하시며 벌을 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로 갚으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비록 현실에 감사의 조건이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 아삽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28절)
감사절을 한 주 앞 둔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같은 고백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에 있는 이들은 이 고백으로써 그 곤핍함을 초월할 영적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물리적인 환경을 초월하고 나면, 실제로 물리적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반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이 고백으로써 물질에 탐닉하지 않고 그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용할 영적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축복이 이 아름다운 계절에 ‘실제적 무신론’이 아니라 ‘실제적 유신론’을 믿고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에 코를 박고 사는 바람에
주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며
주님 없는 듯
주님 죽은 듯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포도 지게미에 내버려둔 포도주처럼
못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소에 들어가기를 더욱 힘쓰게 하시어
저희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붙드소서.
주님을 뵙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할
참된 믿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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