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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기다린다(I Am Always Waiting)

이사야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01 추천 수 0 2013.04.29 23:16:37
.........
성경본문 : 사64:1-9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11월 27일 주일설교 강림절 첫 번째 주일
나는 늘 기다린다”(I Am Always Waiting)
이사야 64:1-9


1.

오늘은 교회력으로 강림절(Advent) 첫 번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성탄일 직전 주일부터 거꾸로 네 주일 동안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성령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이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느라 분주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주님을 맞이하기에 부족함 없는 마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Lectionary)는 오늘 이사야 64장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탄식 가운데서 드린 기도문입니다. 기도자는 먼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예측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에,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3절)

성경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기록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조상들이 경험했던 그 엄청난 일들을 기억하면서 기도자는 마음이 갑갑해집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와 별로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일을 행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여 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후반부에 보면, 기도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습니다.
우리의 조상이 주님을 찬송하던 성전,
우리의 거룩하고 영광스럽던 성전이 불에 탔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곳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10-11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들의 마음은 심히 설레었을 것입니다. 거대 제국 바벨론이 신흥제국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한 것도,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모든 포로 민족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감격도 잠깐, 그들은 비정한 현실을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폐허가 된 조국을 회복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보수했지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자는 과거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고 산을 흔들며 나타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집트의 대군을 한 순간에 수장시키고, 매일같이 일어났던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을 기억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60만 대군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렇게 강한 손을 펼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강청기도도 해 보고, 철야기도도 해 보고, 금식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았습니다. 몸을 불살라 하나님의 침묵을 깰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당장 침묵을 깨고 활동을 시작하실 만도 한데,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행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63:19)


2.

요즈음, 이 기도자처럼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낙심하며 씨름하는 분들이 우리 중에 적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미국의 상황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침묵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지난주에도 드린 말씀입니다만,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하면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가 더 이상 아닙니다. 경찰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찾아다니는 나라가 더 이상 아닙니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청렴하고 성실한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법과 양심이 살아있는 나라로 칭찬받던 그 나라가 더 이상 아닙니다. 수렁에 빠진 경제는 3년이 지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포기할 것 다 포기하고 몸둥이 하나만 남았는데, 그 몸둥이 하나도 건사하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정금처럼 만들어 내시려는 고난이라고 여기고 견뎠지만,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정금처럼 되기는커녕, 산산이 부서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 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그 침묵이 너무도 길고 무거워서 이제는 기도할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설교자들은 “믿음 안에서 견디면 결국 밝은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목청 높여 외치지만, “아멘!”이라는 응답은커녕, “당신이 내 고난의 깊이를 알고나 하는 말이요.”라고 대들고 싶습니다. 

보편적으로 당하는 고난 외에도, 개인적으로 당하는 특별한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어떤 분은 도대체 치료되지 않는 질병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백방으로 노력해 보아도 의사가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절망적입니다. 어떤 분은 마음의 병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얼마 전, 우울증을 겪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울증의 늪이 얼마나 깊고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끝을 알 수 없는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아무리 호소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어떤 이는 관계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깨어진 관계로 인해 지옥 같은 나날을 살면서 시커멓게 멍든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침묵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언제라도 살해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종교를 믿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호소할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못 들으시는 것처럼 묵묵부답입니다. 혹은, 북한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난 60년 동안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해 왔습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며 고통을 받을 때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만난 기도자 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역사를 기억합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것들은 과장되었고, 어떤 것들은 근거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문제가 해결된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침묵하기만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 누구도 부인 못 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누구에게는 기적적으로 개입하시고, 나에게는 침묵하시는가?’라는 의문입니다. 혹시나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더 열심히 기도해 보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의문은 녹이 쇠를 갉아먹는 것처럼 서서히 믿음을 갉아먹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마음을 파고듭니다. 더 심해지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고 결론짓습니다. 이 같이 막다른 골목에서 무신론을 선택하면, 두 갈래의 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의 길은 절망과 체념과 포기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길에 들어섭니다.


3.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완주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준비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언제나 분명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머지않아 큰 위기를 당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은 나의 선행에 대해 항상 보상해 주시고 나의 악행에 대해 틀림없이 징벌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곧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경험하게 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은 경험은 결코 놀라운 것도 아니며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말씀하시는 경험보다는 침묵하시는 것 같은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테레사 수녀처럼 깊은 믿음의 경지에 있던 분들도 겪었던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 테레사 수녀의 편지가 <Come Be My Light>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어 많은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책에서 드러난 대로 본다면, 테레사 수녀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C. S. 루이스도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병으로 잃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잔인한 침묵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 생활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일입니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spirit, 靈)이시고 우리는 ‘물’(material, 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언어(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영’은 ‘공기’, ‘바람’, ‘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은 “하나님은 손으로 만지거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있어서 공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듯,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 같은 영적 무감각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영적으로 맑아지고 깊어지며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항상 활짝 깨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예민해지고 둔감해지기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이 둔감해 질 때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침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 중에 활동하실 때 영적인 방식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방식’이라는 말은 ‘비 물리적인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조종하는 것, 강요하는 것, 위협하는 것, 굴복시키는 것이 물리적인 방식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주로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호통치고 강요하고 때로는 때렸습니다. 반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대개 영적인 방법 즉 비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사랑하고 기회를 주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보듬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물리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어머니처럼 영적인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철없는 자식에게 어머니는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자식은 물리적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눈치만 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자식에게 철이 들면 무력해 보였던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비 물리적인 방식으로 자식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의 잘못을 보고도 자주 침묵하시지만, 그것은 그가 깨닫고 돌아설 기회를 주려는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없는 우리에게 자주 침묵하시는 것 같고 무심한 것 같으며 또한 무력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침묵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벽을 만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부모에게 걱정 끼칠만한 일을 하고 나면, 아이는 부모를 대하는 데 불편을 느낍니다. 배우자 모르게 부정을 행하면, 배우자를 대하는 마음에 금이 갑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연극을 해 보지만, 관계에 금이 가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집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하나님은 점점 더 분노한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요 심판이라고 느껴집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기도자가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5-6절)
......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9절)


4.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이어지는 이사야 65장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기도자가 하나님을 잘 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자는 유다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그로 인해 그분은 그들의 호소와 간구에 침묵하고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1-2절)

아,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얼굴을 감추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오만 정 다 떨어져 고개를 돌리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모른 체 하고 내버려 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죄에 물들어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언제라도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 발이 저린 나머지 하나님에게서 떠나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은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은 무심하시다고 한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때로, 아니 자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믿는 신이 언제나 존재한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온 우주의 우주를 합한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는 때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구가 너무 커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커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주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내가 믿는 신이 언제나 나에게 말하신다면,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거나 환청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때로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마치 우리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바람을 때로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인격적이십니다. 신사적이십니다. 적당히 위협하고 협박하여 몰아세울 수도 있는데, 잘 그러시지 않습니다.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내림굿으로 인해 무당이 된 사람들은 그 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만 허사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너무도 신사적입니다. 성령은 절대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법이 없고, 성령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면 그대로 놓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도 느려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유다 백성은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무도 느려 보였습니다. 북한의 지하 교인들에게 지난 60년은 너무도 긴 세월입니다. 지금의 미국 경제 상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긴 터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이 차이를 알았기에 모세는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 90:4)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지,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기도자처럼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얼굴을 돌리신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영영 버린 것처럼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의 죄 때문에 삐치신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기다리시며, 돌아오는 죄인을 맨발로 나와 끌어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용서는 ‘삼세번’을 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또 다시 용서하시고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도 아니요, 그분이 우리 삶에 무관심하다는 뜻도 아니며, 우리 삶에 개입하기에 무력하다는 뜻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참된 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때로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때로 죄책감에 짓눌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침묵을 느낀다고 해도 이상해 하거나 놀라서는 안 됩니다. 대신, 차분히 앉아서 그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감정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지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 보일 때에도 그분의 임재를 믿고 의지하며, 그분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에도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말씀하고 계심을 믿고, 그분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일 때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모든 것이 제 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또한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숙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침묵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5.

지난 주 월요일, 화초에 물을 주던 아내가 “어머! 어쩜 이럴 수가!”라고 감탄을 합니다. 그 음성에서 대단한 기쁨과 경이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웬일인가 보았더니, 크리스마스 캑터스에 꽃망울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라는 것 같지도 않고 별로 변화도 없어 보이는 그 식물에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물을 주었는데, 때가 되니 하얀 꽃망울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럽니다. “아,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살아있다고, 이렇게 꽃을 피우네.” 저에게는 그렇게 신기할 것이 없는데, 정성으로 가꾸어 온 아내는 마치 손자를 받아 안은 할머니처럼 기뻐합니다.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크리스마스 캑터스는 때가 되어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아무 소리가 없는 것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는 것이 없을 때조차 그분을 믿고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예상하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늘 설렘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희망을 가집니다. 기다림이 사라지면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강림절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강림절은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다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롭게, 넉넉하게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전심으로 감당하면서 기다립니다. 언제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놀래키실 것을 믿으며,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이 있기에 희망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소망을 갖고, 기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강림절에 우리 마음속에 되찾아야 할 믿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일을 기다리며 우리의 이웃들과 나누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목숨이 끊어져도 여전히 기다릴 것이 있다는 소식, 세상이 무너져도 여전히 기다릴 것이 있다는 소식, 그리고 그 기다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소식, 이 소식이 저와 여러분 마음 깊이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이 소식이 희망 없는 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로 주님의 침묵에 익숙해지게 하시어
침묵하는 것 같을 때에도
주님을 믿고 찾고 의지하게 하소서.
주님을 참되게 믿기에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그 기다림으로
저희의 마음이 늘 설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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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0 베드로전 신앙의 본을 보인 사람들 벧전2:21  한태완 목사  2013-05-02 2708
8999 에스겔 상대방은 나의 거울 겔18:1-20  최장환 목사  2013-05-01 3505
8998 다니엘 꿈과 희망을 갖자 단9:1-19  최장환 목사  2013-05-01 3444
8997 요한복음 하나님 나라 소망 요3:3-5  한태완 목사  2013-04-30 2367
8996 로마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 롬12:2  한태완 목사  2013-04-30 5299
8995 출애굽기 방향 감각을 상실한 교회들 출1:1-7  김경형 목사  2013-04-30 2201
8994 히브리서 땅에서 하늘처럼 산다 (Live On Earth As In Heaven) 히11:8-12  김영봉 목사  2013-04-29 2495
8993 누가복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눅17:20-21  김영봉 목사  2013-04-29 3102
8992 시편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It Is Not I But God) 시8: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425
8991 누가복음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다 (No Strangers In God) 눅15:25-32  김영봉 목사  2013-04-29 2625
8990 누가복음 나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I See My Father In Me) 눅15:1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499
8989 전도서 나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My God Is Too Small) 전5:1-2  김영봉 목사  2013-04-29 3166
8988 누가복음 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눅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413
8987 고린도전 네가 누군데! (I Know Who You Are) 고전8: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192
8986 고린도전 내가 누군데!(I Know Who I Am) 고전6:12-20  김영봉 목사  2013-04-29 2278
8985 사도행전 다 잡힐 때까지 (Until I Am Completely Grasped) 행19:1-7  김영봉 목사  2013-04-29 2255
8984 디도서 너에게서 예수가 보인다면... (If I See Jesus in You...) 딛2: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697
8983 누가복음 자비에 기대어 살다(Leaning On His Mercy) 눅1:46-56  김영봉 목사  2013-04-29 2516
8982 이사야 너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Here Is Your God) 사40:1-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614
» 이사야 나는 늘 기다린다(I Am Always Waiting) 사64: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201
8980 신명기 감사절에 생각하는 영적 전염병(Thinking of Spiritual Epidemic at Thanksgiving) 신8:11-20  김영봉 목사  2013-04-29 3089
8979 스바냐 포도 지게미에 앉아(Sitting on the Lees) 습1:12-18  김영봉 목사  2013-04-29 1988
8978 고린도전 은사로 되는 교회(Church Run by Gifts) 고전12:4-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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