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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Here Is Your God)

이사야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14 추천 수 0 2013.04.29 23:16:37
.........
성경본문 : 사40:1-11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12월 4일 강림절 두 번째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너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Here Is Your God)
이사야 (Isaiah) 40:1-11

1.

인간 생활에 있어서 말 즉 언어는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언어 장애를 가진 분들도 '대용 언어'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또한, 잘 사용된 말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나왔습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때로, 마음 담아 건넨 한 마디가 듣는 사람에게 생명수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또 때로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삼사일언'(三思一言) 즉 세 번 생각하고 한 마디를 하라는 교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유용한 도구였던 말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머리 속에 담겨 있는 모든 단어들이 하나도 쓸 모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를 위로할 때가 그렇습니다. 큰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해야 할 입장에 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위 '호상'(good death)이라고 할 만한 장례식장에서도 마땅한 말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예기치 않은 사고로 너무도 이른 나이에 생명을 잃은 경우, 그 가족들 앞에 설 때면 정말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그래도 뭔가 말해야 하겠기에 한 마디 던지는데,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마음을 압도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분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슬픔을 당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이 위로한다고 던진 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고의 원인과 결과를 환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확신을 가지고 진단하고 평가합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설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설교자들처럼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진단하고 평가하고 조언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더 큰 아픔과 분노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작년 5월, 목회 칼럼에 '위로의 기술'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마틴 아우즈(Martin Auz)와 머린 앤드류스(Maureen Andrews)가 지은 <Handbook for Those Who Grieve>라는 책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의 목록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다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압니다.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야.
아이들을 생각하여 강해져야 해.
자, 자, 이제 눈물은 그만!
모든 것은 위장된 축복이야.
너는 젊어. 다시 결혼하면 되잖아.
그래도 나보다는 나아. 내 어머니는 더 젊었을 때 돌아가셨어.
차라리 이 편이 나아.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빨리 데려가셨나봐.

이 목록을 보고 나서 어느 교우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록을 보니 위로하기 위해서 할 말이 하나도 없네요!" 사실, 상처되는 말이나 껍데기 말을 할 바에는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긴 한데, 아무 말 안하는 것도 때로 상처가 됩니다. 남편을 잃은 어느 교우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위로하기 위해서 던진 말도 상처가 되지만,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침묵하는 것도 상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입니다. 위로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2.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위로'를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우리 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위로'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위로하여라, 너희는.
위로하여라, 너희는, 나의 백성을!

이사야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유다 백성은 70여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의 압제 하에 36년을 지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이 독립을 위해 싸웠고 또 많은 사람들이 조국 해방을 기다리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넘도록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자, 대부분의 국민들이 해방의 꿈을 포기하고 체념과 절망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두 배나 더 긴 70여년의 세월 동안 원치 않는 포로 생활을 해야 했던 유다 백성의 상태는 어떠했겠습니까? 체념, 절망, 낙심, 좌절, 탈진 같은 단어들을 모두 합해야 그들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위로하여라, 너희는, 내 백성을!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찾는 유다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던 70년 동안,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 안에서 소망을 찾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낙심하고 체념하고 탈진된 백성들을 찾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서로 위로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 '위로의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자신의 잘못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충분한 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큰 위로입니다. 벌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그 벌로 인해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쁜 일입니다. 70여년의 포로 생활이 참으로 힘겨운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있던 모든 채무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심판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상을 주시는 분으로 오시며, 목자와 같은 심정으로 오십니다(10-11절).

예언자 이사야는 구원자로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광야에 길을 닦고 모든 계곡을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서 평지로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3-4절). 이것은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구원하시는 데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치우라는 뜻입니다. 죄로부터 돌이키라는 뜻이고,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일어서라는 뜻이며, 의심과 회의와 불신을 떨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4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위로는 '말'이 아니라 '진실'로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교우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까요?" 우리는 위로하기 위해서 적당한 '말'을 찾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달리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서로를 위로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위로에 적당한 단어나 표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진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진실에 근거하여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위로의 말들이 왜 껍데기처럼 들리고 때로 상처가 되는지, 여기서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 말이 진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압니다."라는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그 슬픔의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야."라는 말이 힘이 되지 않는 이유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너질 때는 무너져야 합니다. "자, 자, 이제 눈물은 그만!"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위장된 축복이야."라는 말은 상당히 진실에 가까운 말입니다. 하지만 당사자 자신이 그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상처가 될 뿐입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나아. 내 어머니는 더 젊었을 때 돌아가셨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것이 비교하여 누구의 것이 더 하다 혹은 덜 하다 할 수 없다는 진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빨리 데려 가셨나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단순화시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는 좋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받아들일 때 참된 위로가 가능합니다. 때로, 한 마디 말로 엄청난 위로를 경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당사자가 그 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를 얻기 위해서는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위로를 전해 주고 싶다면, 마땅한 말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진실을 안다고 하여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실을 잘 담아내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 진실에 눈 뜰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위로의 첫 걸음은 두 말 할 것 없이 진실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진실을 보려면,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만 작은 사건의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미로 찾기'를 해 보셨는지요? 멀리서 미로를 지켜보는 사람은 어디가 출구인지 환히 보입니다. 하지만 미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있는 문제에만 집중해서는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싸고 있는 큰 그림, 전체 그림을 보아야만 그 문제의 진실이 보입니다.

전체를 본다 혹은 큰 그림을 본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지 못하면, 전체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영적 차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판단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하고, 무지하다고 하며, 속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야말로 속고 있는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4.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도록 권하고 계십니다. 누군가가 예언자 이사야에게 "너는 외쳐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그 음성이 이렇게 답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6-8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때로 인간이 위대하게 보이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화가 풀의 꽃과 같다는 말이 얼마나 진실인지요! 인생을 '아침 안개'와 같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아침 이슬'과 같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바뀌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강성대국 바벨론의 운명이 기우는 것을 보고 유다 백성들은 부와 권력과 명성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보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고 페르시야 제국이 일어서는 역사적 소용돌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계속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하고 말하여라. (9절)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일어나는 그 역사적 소용돌이 배후에 그리고 그 소용돌이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다 백성들이 보았어야 할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진실을 외치라고 하십니다. 약소국의 백성으로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웅크리고 있지 말고, 믿음의 눈을 떠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말고, 높은 산에 올라가 진실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도 외치고, 이웃들에게도 외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고 말입니다.  그 진실을 믿어야만, 그 진실을 보아야만 진정한 위로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지금 강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로고스 즉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은 '위로자'(comforter)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성령의 감화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위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웃에게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에게 전할 복음이요, 진정한 위로의 소식입니다.

제럴드 싯처(Gerald Sitts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와싱톤주에 있는 윗트워스 칼리지(Whitworth College)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래 전, 그는 가족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취한 운전사가 중앙선을 넘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네 살 난 딸을 한꺼번에 잃어버립니다. 한 순간에 할머니, 어머니, 딸,  3대를 비극적인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싯처 박사는 부상당한 세 아이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한 편, 세 사람을 잃어버린 충격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울증의 늪에 빠져 오래도록 허우적대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듣고 알았던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나 친지들이 던지는 위로의 말은 그의 상처에 소금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내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하나님은 그 비극의 현장에서 어디 계셨을까?' 이 질문은 그를 무신론의 경계선까지 밀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신론의 경계선에서 돌아서 그가 믿던 하나님께로 돌아 왔고,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다시 붙들기로 했지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환상을 본 것인지, 꿈을 꾼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는 사고가 났던 곳 근처 벌판에 살아남은 세 아이와 서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모퉁이에서 커브를 도는 미니밴을 보았고, 이윽고 맞은편에서 거대한 트럭이 나타나 중앙선을 넘어 밴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는 몇 년 전 그 날처럼 엄청난 혼돈과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렇게 참혹한 사고 현장을 지켜보는 순간, 싯처 박사는 신비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책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갑자기 아름다운 빛이 사고 현장을 감쌌다. 그 빛은 주위를 밝게 비추었다. 그 빛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게 부서진 사고 현장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때 사고가 일어난 그 곳에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거기에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를 위로하시려 거기에 계셨다. 그분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길로 보내려고 그곳에 계셨다.

이성적으로 혹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알아졌고 믿어졌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습니다. 싯처 박사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백일몽을 경험하고 나서도 나는 '왜 사고가 일어났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또 그 사고가 나에게 유익했다는 확신도 얻지 못했다. 사고로 인한 나의 슬픔을 씻고 행복을 대신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평화를 얻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하나님의 주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절벽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며 높이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곳을 바라보며 안전감을 느끼고 한편으로 경외감에 가득차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울다> A Grace Disguised, 204쪽)

싯처 박사가 그 날 경험한 것은 성령께서 베푸신 은혜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성령의 감화 안에서 그는 '큰 그림'을 보았고 '보지 못했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 비극의 밤에 일어난 일의 전부를 보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고 그분의 방식대로 선한 목자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진실을 보았을 때, 그는 위로를 얻었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알고 보니, 나의 하나님이 나의 아픔 가운데 계셨다."고 고백했고,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하나님도 나의 아픔 가운데 함께 계시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에 올라있는 수많은 독자 평은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형편에 사십니까? 혹시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습니까? 강림절에 특별하게 임하시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슬픔과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보고 "나의 하나님이 진실로 여기 계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이며, 그 힘으로 지금 당한 슬픔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슬픔에 빠진 이웃에게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 성공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필요합니다. 그 성공과 번영 안에도 여러분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 보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눈으로 볼 때, 지금 여러분이 만난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과 번영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그 성공과 번영은 패망의 올무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그 날이 그 날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마음의 눈이 뜨이면, 매일이 기적처럼 바뀔 것입니다. '평범'과 '보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고 하루하루 감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별 일 아닌 것 속에도 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필요 없을 때는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필요 없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감화와 감동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눈앞의 현실에 의해 일희일비 하지 않고, '큰 그림'과 '보이지 않는 현실'을 봄으로써 견고하고 든든한 발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삶을 사모하며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위로하여라, 너희는.
위로하여라, 너희는, 내 백성을!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진실에 눈 활짝 뜨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진정한 위로를 찾고 또한 위로를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각자가 '좋은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도하기 전에 헨델의 <메시야> 중에 나오는 테너 독창곡 "Comfort Ye"를 들으시겠습니다. 이 곡은 오늘 우리가 묵상한 이사야서 40장 서두의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입니다. 저는 한 번이라도 훌륭한 테너 가수가 되어 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보는데, 그 이유가 이 곡을 불러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들을 때마다 마음 깊이에 위로와 평강을 느끼게 만드는 이 아름다운 찬양을 감상하시겠습니다.

오, 주님,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저희가 진실을 보게 하소서.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진실에
눈 뜨게 하소서.
진정한 위로가 필요할 때
주님에게서 위로를 찾게 하시며,
진정한 위로를 찾는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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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3 누가복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눅17:20-21  김영봉 목사  2013-04-29 3102
8992 시편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It Is Not I But God) 시8: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425
8991 누가복음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다 (No Strangers In God) 눅15:25-32  김영봉 목사  2013-04-29 2625
8990 누가복음 나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I See My Father In Me) 눅15:1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499
8989 전도서 나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My God Is Too Small) 전5:1-2  김영봉 목사  2013-04-29 3166
8988 누가복음 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눅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413
8987 고린도전 네가 누군데! (I Know Who You Are) 고전8: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192
8986 고린도전 내가 누군데!(I Know Who I Am) 고전6:12-20  김영봉 목사  2013-04-29 2278
8985 사도행전 다 잡힐 때까지 (Until I Am Completely Grasped) 행19:1-7  김영봉 목사  2013-04-29 2255
8984 디도서 너에게서 예수가 보인다면... (If I See Jesus in You...) 딛2: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697
8983 누가복음 자비에 기대어 살다(Leaning On His Mercy) 눅1:46-56  김영봉 목사  2013-04-29 2516
» 이사야 너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Here Is Your God) 사40:1-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614
8981 이사야 나는 늘 기다린다(I Am Always Waiting) 사64: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201
8980 신명기 감사절에 생각하는 영적 전염병(Thinking of Spiritual Epidemic at Thanksgiving) 신8:11-20  김영봉 목사  2013-04-29 3089
8979 스바냐 포도 지게미에 앉아(Sitting on the Lees) 습1:12-18  김영봉 목사  2013-04-29 1988
8978 고린도전 은사로 되는 교회(Church Run by Gifts) 고전12:4-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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