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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잡힐 때까지 (Until I Am Completely Grasped)
사도행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55 추천 수 0 2013.04.29 23:16:37성경본문 : | 행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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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1월 8일 주일 설교
다 잡힐 때까지 (Until I Am Completely Grasped)
사도행전 19:1-7
1.
얼마 전, 집 근처에 있는 숲을 걷는데, 개 두 마리를 줄에 매어 걸어오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두 마리의 강아지가 얼마나 작은지, 마치 작은 고양이같기도 했고, 장난감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도 귀여워서 그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Are they dogs?" 그랬더니 그분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Yes, they are almost dogs." 그 대답에 저는 한 참을 웃었습니다. "Are they dogs?"라는 저의 질문 안에는 그 강아지들이 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는데, 그 주인도 맞장구를 친 것입니다. "Yes, they are almost dogs."라는 말은 "예, 이놈들은 거의 개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 대답은 저에게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명 설교 'Almost Christian'이라는 설교를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볼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된 사람들을 가리켜 'Almost 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Altogether Christian'입니다. 오래 전, 누군가 이 설교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서 '거지반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거지반'은 '거의 반'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Almost Christian'이라는 말이나 'Almost Dog'이라는 말은 절반 정도가 아니라 약간 부족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Almost Christian'이라는 말을 '거지반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한 것은 '거지반' 맞는 번역입니다. 듣기에 어색하기는 하지만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조금만 그리스도인'입니까? '반쯤 그리스도인'입니까? '거의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온통 그리스도인'입니까? '반쯤'과 '거의'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섭씨 99도나 10도나 물이 끓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끓이는 것이 목적이면 100도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기로 했으면, '온통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조금'도 안 되고, '반쯤'도 안 되지만, '거의'도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 되어야 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에 맞추어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9장 1절부터 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일어난 곳은 에베소입니다. 지금의 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바울이 전도하기 위해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 몇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참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2절)
이 질문은 그들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배워 생긴 것인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된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믿으려는 결심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3)
인간의 지성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진정으로 주님답게 모시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믿음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의 제자들을 보고는 그들의 믿음이 순수히 지성적인 혹은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알지 못했고, 그 성령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2절)라고 답합니다. 바울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3절)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답하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4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렇게 설교의 요점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습니다만, 실제로 바울은 긴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세례입니다. 회개는 그동안 살던 방식에서 돌아서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인데,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결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은 준비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믿음이 온전해집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Altogether Christian이 아니라, 잘 해 보았자 Almost Christian에 머물고 맙니다.
2.
오늘 본문 서두에 아볼로(Apollos)라는 이름이 거론됩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에서 처음 언급되는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철학과 사상과 학문의 중심지로 가장 높이 인정 받는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가 헬라어로 번역된 곳도 이곳이고, 유대 역사가로 이름 높은 필로(Philo)도 이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인 분위기에 깊이 젖어 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났고 성경에 능통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성경을 깊이 연구했고, 알렉산드리아 출신 답게 수사학에도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는, 추측컨대,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세계 각처에서 온 순례자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 다니면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성경을 토대로 하여 논증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기 전에 아볼로가 이미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은 아볼로에 의해 전도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도 역시 세례 요한의 세례만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의지적인 것이었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지적인 것이었습니다. Almost Christian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의 신앙에서도 그는 여러 사람들을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했으니,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볼로를 생각하다 보니, 몇 개월 전에 하나님 품으로 가신 교우님 한 분이 생각납니다. 이미 한 두
한번 그분 이야기를 설교에서 나누었습니다만, 미국에서 40년 넘게 신앙 생활을 하신 그분은 영적 세계를 믿지 못하셨습니다. 영적 세계를 인정할 수 없기에 성만찬의 의미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평생 성만찬에 참여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고도의 과학 지식으로 무장된 그분은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Almost Christian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그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한참 때 보스톤의 한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쩐 일인지, 교인들이 자신이 인도하는 성경 공부를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볼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분은 은퇴 후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게 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생각해서 믿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지하여 믿는 믿음으로 도약한 것입니다.
아볼로의 이야기 그리고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위로'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이것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Almost Christian이 성경 안에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조금만 그리스도인'도 있고, '반쯤 그리스도인'도 있으며, '거의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도 그랬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아볼로는 '온통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전도자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열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위로'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의 상태가 어떤지 자각하게 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도약하도록 우리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분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혹은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다 채워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한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만, 그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사로잡혀 살아가는 믿음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Almost Christian은 오븐에 넣지 않은 빵 반죽과 같습니다. 반죽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맛있는 빵을 먹으려면 오븐에 넣어 구워야 합니다. 밀가루 반죽을 두고 "와, 빵이다!"라고 말하면 그건 '뻥'입니다. 혹은 불을 붙이지 않은 장작 더미와 같습니다. 장작을 잘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장작이 잘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와, 불이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잘 쌓아놓은 장작은 Almost Fire입니다.
3.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지만, 오늘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답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령이라구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거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예수나 믿겠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동안 소위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질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도 50년 넘게 교회 생활을 해 오면서 성령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수 없이 만났기에 그 거부감을 잘 압니다. 자신이 성령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성령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성령이 싫어집니다. 성령 받기를 힘쓰다가는 그런 사람들처럼 될까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해 보아야 Almost Christian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성령을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한 것 같아서 답답해 하십니다. 지난 주, 사역자 경건회(Staff Devotion)에서 이 말씀을 읽고 나누는데, 참석했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제가 그동안 살아온 것을 돌아 보면, 성령께서 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제 믿음도 그렇고, 저의 삶도 그렇고, 제가 해 온 일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내가 성령을 받았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만나면, "정말 내가 성령을 받았나?"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강하게 사로잡혀야만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 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에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같은 생각,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진솔한 고백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에 대해 가져야 할 가장 바른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영입니다. 또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무엇을 손에 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소통하는 관계 안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항상 바람이 불고 있지만, 때로 바람이 없는 것처럼 느끼듯, 성령의 감화와 감동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때로 그렇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성령의 속성상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정말 위험한 사람은 성령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속성 상 인간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인간이 "확실하게 잡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한 존재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재입니다.
성서 시대 사람들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했고 '공기'에 비유했습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혹은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손에 쥘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성령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바람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바람에 나를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성령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성령에 나를 맡기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현상을 보고 바람이 불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혹은 내가 성령의 감화 속에 있는지를 알려면, 성령께서 만들어내는 현상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만들어내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에베소의 Almost Christian들에게 손을 얹어 세례를 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방언과 예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방언'이란 성령께 사로잡혀 자신이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로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성령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말하는데,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이 방언 기도의 핵심입니다. 저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와 같은 기도는 자주 드립니다. 깊은 기도에 빠져 있다 보면,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나를 사로잡아 기도하게 만드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기도는 방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언'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알아맞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성령께서 나를 사용하여 누구에겐가 주시려는 말씀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기도자를 사로잡아 성령의 뜻을 대언하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센터빌 캠퍼스에서 교우 한 분 한 분에게 기도해 드렸습니다. 저는 성도들의 거룩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생각을 멈추고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저의 기도가 예언이 되게 하옵소서." 그 날 저녁, 2백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기도해 드렸는데, 때로는 제가 기도했고, 때로는 성령께서 저를 잡아 기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 날, 기도 받으신 분들 중에 제게 와서 "어떻게 그렇게 제 사정에 맞는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까?"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무슨 말로 기도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성령께 맡기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 받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성령께 의지할 때, 그 기도는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가 설교자의 연구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연구와 노력의 장작 더미 위에 성령의 감화가 더해지면, 그 설교는 예언이 됩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언의 은사를 구합니다. 제가 생각해서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령께서 저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구하면서 설교 준비를 하다 보면, 성령께서 말씀의 문을 열어주시고 영감을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옛다. 너에게 이것이 필요하지?"라고 말씀하시는 듯, 성령께서 필요한 것을 신비한 방법으로 제공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손길을 분명히 느낄수록 주일을 기다리는 제 마음은 설레입니다.
4.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렇게 방언할 수도 있고, 예언할 수도 있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이 낫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환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실 때 일어나는 현상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다 각각이지만, 그 모든 현상들이 가지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일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힘이 나를 사로잡아 무엇인가를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받았으며 그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힘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 있는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방언이니 예언이니 하는 신비 현상에 관심 없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타나는 현상이 어떻든지 상관 없이, 진정한 믿음 안에는 나 아닌 다른 거룩한 존재에게 나를 맡기고, 그 존재가 나를 사로잡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차원이 있어야만 합니다.
Almost Christian과 Altogether Christian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는' 믿음(faith of doing)인가, 아니면 '되는' 믿음(faith of becoming)인가? 성령의 세례가 없으면, 하는 믿음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내가 내 생각으로, 내 의지로, 내 결단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십리도 못 갑니다. 물론, 제대로 믿기 위해 생각해야 하고 뜻을 세워야 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장작에 불이 내려야 합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의 계시가 더해져야 합니다. 내 의지에 성령의 감동이 더해져야 합니다. 내 결단에 성령의 역사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역자 경건회에서 성령에 대해 진솔한 고백을 하신 그분은 나중에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성령의 속성 상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지만, 그리고 내가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그 영향력 안에 있음을 믿지만, 그래도 더 깊이, 더 강하게, 더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히고 싶은 열망이 제게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만일 "그래,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감화 안에서 살고 있어. 이거면 충분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 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심오하고 신비하고 광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사귀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있다 해도 때로 "내가 성령의 세례를 받았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그분의 손에 붙들리기 위한 노력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여러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영향력을 경험하셨습니까? 내가 믿으려고 노력하여 믿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도대체 믿어지지 않던 것이 문득 믿어지는 차원의 신비를 경험하셨습니까? 내가 애써 기도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모르게 무엇엔가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잊고 머물러 있어 보았습니까? 내가 연구하고 분석하고 추리해서 아는 것에서 넘어서 내 의식 저편에서 무지의 커튼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늘 이같은 경지에 머물러 살도록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써 성령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뿐입니다. 그 노력조차 하지 않고 믿음의 도약을 바란다면, 그것은 마치 감나무 아래에 누워 벌린 입으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5.
그래서 새 해에는 더욱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 칼럼에 쓴 것처럼, 저는 새 해를 두고 기도하는 중에 '기도'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살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부터 기도의 줄을 더 단단히 매기로 했습니다. 매일 기도 시간을 최소한 2시간으로 정하고 그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한 달에 하루는 온 종일 기도하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제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저를 사로잡아 하는 일이 되게 하려면 이 길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음 주간에 2월 말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을 준비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며칠을 보낼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기도에 대해 공부하며 기도를 배우는 40일간의 여정으로 삼을 것입니다.
이미, 여러 교우들께서 저와 함께 영적인 보조를 맞추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온 교우가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게 시간을 정하여 매일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영적 습관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신앙이 내가 주체가 되어 행하는 Almost Christian의 신앙이었다면, 이제는 그분의 손에 사로잡혀 믿는 차원으로 도약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영향력 아래에서 사셨다면, 그것에 만족하지 마시고 다 잡힐 때까지 더 깊에 주님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다 잡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일같이 반복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매일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영으로 우리의 존재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온통 그리스도인' 즉 Altogether Christian이 되기를 소망하며, 하루 하루 주님의 성령에 의지하여 살아갈 때, 사막같은 우리의 삶에 꽃이 피고 샘물이 터질 것이며, 흑백 사진같은 우리의 마음에 알록달록 색깔이 입혀질 것이고, 생김새는 좋은데 아무 향기가 없는 조화같은 우리의 얼굴에 향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머지 않아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허비되던 우리의 인생이 성령의 손에 잡혀 영원한 것을 위해 사용되는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12년도에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같은 은혜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님,
주님의 영에 저희 자신을 열고
성령의 손에 저희를 맡깁니다.
매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의 성령께 저희를 맡기겠습니다.
성령의 손에 다 잡힐 때까지
주님을 찾고 의지하겠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조금만이 아니라,
반쯤만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아니라,
저희의 전부를 주님께 열게 하소서.
주님께 온전히 사로잡혀
온전히 사용되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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