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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8: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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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도 1월 29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네가 누군데! (I Know Who You Are)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8:1-13
1.
저는 지난 주말에 달라스 중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이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목회자 학교 두 번째 학기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저와 두 가지 행사를 두고 기도해 주신 중보기도팀과 교우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이 목회자 학교 두 번째 학기였는데, 이 과정을 통해 후배 목회자들이 큰 힘을 얻는 것을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그리고 이 같은 외출을 참아 주시는 교우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고린도교회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누려 합니다. 두 주일 전에 "내가 누군데!"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우리는 고린도교인들의 성적 방종에 대해 바울 사도가 준 대답을 묵상했습니다. 성적인 유혹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면 그 유혹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답이었습니다. 나의 몸 즉 나의 존재 전체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값진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구속되어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며, 또한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며, 나의 몸 즉 내 존재 전체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됩니다.
굳이 심리학의 이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대답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정체성'(self-identity)이라고 부릅니다.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자존감'(self-esteem)도 높습니다. 자존감이란 자기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자존감이 높으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은 자존감을 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BJR파라고 부릅니다. BJR은 '배째라'의 준말입니다. 자존감을 버린 사람은 이렇듯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존감의 상실은 자주 가장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당하는 왕따(bullying)가 문제가 되고 있는 가 봅니다. 그로 인해 자살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왕따 당하는 것이 뭐 길래 어린 아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까? 그로 인해 자존감이 깨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풍상을 견디게 해 주는 버팀목이 꺾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놀려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고 또한 자존감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체성이 세워지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우리가 얻어야 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정체성' 그리고 '자존감의 새로운 근거'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 동안 붙들고 있던 정체성을 부인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든 자아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동안 버팀목으로 삼았던 자존감의 근거를 모두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떠받쳐 줄 자존감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Fight Club>에서 주인공 타일러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은행에 저금해 둔 돈의 액수가 너는 아니야. 너의 직업도 네가 아니야. 너의 가족도 네가 아니지.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 네가 대답하는 그 너가 네가 아니야. 너의 이름도 네가 아니야. 너의 문제도 네가 아니야. 너의 나이도 네가 아니지. 너의 희망도 네가 아니야.(....you're not how much money you've got in the bank. You're not your job. You're not your family, and you're not who you tell yourself....You're not your name....You're not your problems.... You're not your age.... You are not your hopes.)
이 대사는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습니다. "너의 IQ가 네가 아니야. 너의 연봉이 네가 아니야. 너의 미모가 네가 아니야. 너의 가진 집이 네가 아니야. 네가 모는 차가 네가 아니야. 너의 인기가 네가 아니야. 사람들이 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네가 아니야. 네가 다니는 교회가 네가 아니야. 네가 입고 있는 옷이 네가 아니야. 네가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네가 아니야. 네가 가지고 다니는 명품 가방이 네가 아니야. 네 자식이 다니는 대학이 네가 아니야. 네 명함에 찍힌 그 많은 직함이 네가 아니야."
사실,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자존감을 세웁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라고 하십니다.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에는 이렇게 자신을 새롭게 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거듭난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귀한 창조물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주고 구속해 낸 존재입니다. 나는 주님의 거룩한 몸의 지체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내 존재가 귀한 이유는 내가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이요, 주님께서 구속하셨기 때문이며,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이고,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정체성과 자존감이 분명하면 웬만한 난관 앞에서 끄떡하지도 않고, 웬만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2.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이 당하고 있던 또 다른 문제를 다룹니다. 당시 고린도 시에는 밀교들(secret religions)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린도를 가리켜 '종교의 만신전'(Pantheon of Religion)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각종 밀교의 신전들에서는 매일같이 짐승을 바치는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 신전 창녀들은 종교를 빌미삼아 음행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벌어지는 음행도 고린도교인들에게 문제였지만, 그곳에서 행해지는 제사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밀교 신전에서 제사를 드려도 되는가? 또한, 예수 믿는 사람이 밀교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고린도교인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습니다. "참된 신은 한 분 밖에 없고 우상은 어차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우상에게 절한다고 해서 우상 숭배 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악령과 접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밀교 신전 제사에 참여해도 괜찮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다." 꽤 설득력 있는 논리입니다.
또 다른 한 편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귀신을 섬기는 것이며,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음으로 그 사람은 귀신을 접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밀교 신전 제사에 참여해서도 안 되고, 제사에 드려진 음식을 먹어도 안 된다. 그것은 영적 간음이다." 이 말에도 나름 논리가 있습니다.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없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릴 적 경험이 생각납니다. 이웃집에서 굿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고 나면, 거기에 썼던 떡을 옆집에 돌립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께서는 그 떡을 모두 내다 버리셨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저는 그것이 매우 아까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귀신에게 바쳐졌던 것이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믿으셨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달리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굿이나 제사를 드리고 난 음식에 귀신이 붙어 있을 리 없으니,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 이 문제는 아직 결론 나지 않았습니다. 다 각자 양심과 믿음에 따라 선택합니다. 이제는 이웃집에 음식을 돌리지도 않고, 또한 먹을 것이 남아돌아서 그런 음식을 먹을 이유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이것은 일상생활의 문제였습니다. 매일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람의 태도와 선택을 비판하고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교회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통해 바울 사도에게 이 문제에 대한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첫째,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1-3절)
'지식'은 당시 고린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대상입니다. 헬라어로 '그노시스'(gnosis)라는 부릅니다. 박식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을 제일로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영어 잘하는 사람이 제일 대접 받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에서는 지식 있는 사람이 제일 대접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식을 추구했고, 서로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거침없이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날에도 지식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이 믿는 진리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미숙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부러워합니다. "어쩌면 저토록 확신있게, 거침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막연한 동경심을 가집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는 면이 실제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행동은 자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고 짐이 됩니다.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둔 사람은 평생 속을 썩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제일 멋있는 사람은 사랑에 묶인 사람이지, 알량한 지식으로 제 마음대로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이 점에서 거듭 나야 했습니다. 지식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버리고, 사랑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통해 새로 배웠어야 했습니다.
3.
둘째, 바울은 서로를 향하여 '믿음이 없다' 혹은 '무식하다'고 비판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지금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11-12절입니다.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는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값으로 주고 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렇다면, 너도 그런 줄 알아야 합니다. 나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너도 귀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자유와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거나 짐이 된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은 "네 마음대로, 네 아는대로, 네 권리대로 행동하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귀한만큼 너도 귀하니 내 권리와 자유를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환난이나 유혹 앞에서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네가 누군데!"라는 생각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 사도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오늘 본문의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시장에서 팔리던 고기들의 태반이 밀교 신전에서 제사 드리고 남은 것이었습니다. 제사 드린 고기 중 일부는 번제로 바치고 일부는 신전에서 나누어 먹고 남는 것은 시장에 상품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즈음 한국 시장에서 어느 것이 한우 쇠고기이고 어느 것이 수입 쇠고기인지 소비자로서는 분간하기 어렵듯, 당시 고린도 시장에서는 어느 고기가 판매를 위해 도살한 것인지, 어느 것이 제사상에 올랐던 고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우상에 드려졌던 음식을 먹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 아예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기를 사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자신이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상처받을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평생 절대로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누군데!"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네가 누군데!"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네가 누군데?"라고 말하면서 말꼬리를 올리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이 됩니다. 반대로, "네가 누군데!"라고 말하면서 말꼬리를 내리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이 됩니다. 한국말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매일 대면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쳐 구속하셨으며,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의 지체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외모가 아무리 흉해도, 아무리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정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20달러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지폐를 꼬깃꼬깃 구겨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20달러의 가치가 줄어듭니까? 혹은 길을 가다가 구둣발에 짓밟혀 구겨지고 흙투성이가 된 100달러 지폐를 발견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냥 외면하고 지나가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폐가 아무리 구겨지고 오물이 묻었어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깨끗한 지폐를 가지는 것이 더 좋겠지만, 방금 찍혀 나온 지폐나 폐기 직전에 있는 지폐나 가치는 동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그 절대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보거나 다른 사람을 보거나 언제나 그 절대적인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외모를 보는 것에 익숙해 있어서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값을 매긴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따라서 누구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누구 앞에서는 고개를 뻣뻣이 세웁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과잉 서비스를 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즈음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절대 가치의 나와 절대 가치의 너가 만날 때, 누구의 가치가 더 우선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투표를 하여 결정하자고 합니다.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자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회주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맡기자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유주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대답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절대 가치를 위해 너의 절대 가치를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서로 각자의 절대 가치를 위해 싸우는 곳이 지옥이고, 서로 각자의 절대 가치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천국과 지옥이 함께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그 천국을 확장시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오늘 2부 예배에서 우리는 새로 집사가 되신 분들을 임명하고, 3부 예배에서는 새로 권사가 되신 분들과 장로가 되신 분의 취임 예식을 가집니다. 센터빌 캠퍼스에서는 집사 임명과 권사 취임 예식을 함께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한 단계씩 낮아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장로도, 목사도 아닙니다. 그 날 처음 교회의 문을 들어선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로 결심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게 큰 결심을 하고 교회에 나왔으면,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먼저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집사가 된다는 말은 그렇게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한 단계 낮아지라는 뜻입니다. 권사가 된다는 말은 적어도 15명의 교인들을 섬길 정도로 더 낮아지라는 뜻이고, 장로가 된다는 말은 30명 정도는 섬길 수 있도록 낮아지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절대 가치를 주님께 내어 드려 주님의 자녀들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직분을 받는 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감의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집사, 권사, 장로 혹은 목사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참된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못하고, 자존감의 근거를 돈에서, 외모에서, 큰 집에서, 비싼 차에서, 명품 가방에서 혹은 자녀의 성공에서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실로 거듭나지 못한 직분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더렵혀지고 있는지요? 부디, 오늘 직분을 받으시는 분들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귀어 앎으로써 자신의 변개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고 환난이나 유혹 앞에서 "내가 누군데!"라고 말하며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직분을 받으시는 분들은 내가 귀한 것만큼 다른 사람도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나의 절대 가치를 내려놓아 다른 사람의 절대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도 "네가 누군데?"라면서 외면하는 세속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배워 누구를 만나든 "네가 누군데!"라고 말하면서 그 앞에 무릎 꿇고 섬길 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을 하라고 직분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직분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직분을 받은 분들은 그 직분의 의미를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받는 직분은 이 세상에 나가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장로'라고 하면 사회에서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로라는 직함도, 목사라는 직함도 바깥 사회에서 아무런 무게를 가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직분을 대면 더 의심합니다. 교회에서 받는 직분을 계급이나 명예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그것은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이 혹시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혹은 목사로 불리고 있습니까? 그 직분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것, 진정한 정체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리고 나의 절대 가치를 내어 주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이것을 이루지 않으면 우리의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나는 직분자가 아니니, 오늘 말씀은 나와 상관없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못 생각하셨습니다. 직분자는 더욱 그렇게 하도록 힘써야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누구나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네가 누군데!"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귀가하지 않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이며, 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바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성전 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우리는 같은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면, 그 눈으로 이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귀함에도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눈으로 외형이 아니라 중심을 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네가 누군데!"라는 생각으로 존귀하게 대합니다. 그렇게 눈이 뜨인 사람은 사랑이 최고이며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이란 나의 절대 가치를 알지만 다른 사람의 절대 가치를 위해 나의 절대 가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이 같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이미 그 같은 변화를 받으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안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매일, 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금세 우리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이어서 다른 사람의 정체성까지 망각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허울을 쓰고도 자신에 대해 "내가 누구길래?"라는 자소적 태도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다닌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외형만을 보고 "네가 누군데?"라고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 되지 않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삶으로써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그런 전환의 경험이 없었다면, 영적 생활에 마음과 시간과 노력을 더욱 기우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는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빛을 잃고, 알지도 못했던 것들이 절대가 되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자존감으로 자신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며 온 생명을 대하는 진정한 사랑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가 주님께 돌아갑니다.
주님 안에서 저희 눈을 뜨게 하셔서
저희 자신의 절대 가치에 눈 뜨게 하시고
이웃의 절대 가치에 눈 뜨게 하시며
저희 자신을 드려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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