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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전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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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2월 12일(주일)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주기도문 강해 연속 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2
나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My God Is Too Small)
전도서(Ecclesiastes) 5:1-2
1.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존슨 대통령이 보좌관들과 함께 백악관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평가받는 빌 모이어즈(Bill Moyers)가 당시 백악관 대변인(Press Secretary)이었는데, 대통령이 모이어즈에게 식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일제히 눈을 감자 모이어즈가 기도를 시작하는데, 모두가 듣기에는 너무 작은 음성으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중간에 모이어즈에게 소리칩니다. "빌, 더 크게 기도 해! 잘 안 들려." 그러자 모이어즈가 대답합니다. "각하, 저는 각하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만 들으시면 된다고 생각하고 모기만한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잘 한 일은 아닙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잘 준비하고 또 모두가 잘 들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 바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중간에 소리친 존슨 대통령도 잘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명상이나 참선 혹은 불교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마음공부'에 그칩니다. 참된 기도에는 명상과 마음공부의 요소도 있지만 그 이상입니다. 기도가 그 이상인 이유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로써 마주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잘 못 된 것이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기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가 가끔 설교 중에 필립스(J. B. Philips)가 번역한 성경 본문을 소개하곤 합니다. 필립스가 쓴 책 중에서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Your God Is Too Small)는 기독교의 현대 고전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필립스는 현대인들이 보통 알고 있는 하나님이 실제 하나님에 비해 너무나 작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실상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진지하게 씨름해 보지 않고, 자라나면서 우연히 형성된 하나님 상을 실제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하늘의 경찰관'으로, 혹은 칭찬에는 인색하고 꾸짖기만 좋아하는 '하늘의 엄친'(嚴親, strict father)으로, 혹은 어떤 응석이든 받아주는 '이빨 빠진 할아버지'로, 혹은 혹독한 훈련으로 우리를 단련시키고 싶어 하는 '하늘의 교도관'으로, 혹은 어떤 변화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심하게 지켜만 보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전통을 통해 계시되고 확인되고 체험된 하나님과 일치하는지를 알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씨름해 본 일이 별로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채로 자신이 하나님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머리에 입력된 하나님 상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자라면서 그 하나님 상에 조금이라도 도전이 오면, 더 많은 기도와 말씀 연구를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바꾸어 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눈 질끈 감고 그 하나님 상을 붙들려고 노력합니다. 목숨이 다 할 때까지 노력해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믿으려고 힘쓰는 것이 때로 더 위험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무신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혹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신뢰받는 신학자인 톰 라잇(Tom Wright)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개론>(Introduction to Christianity)을 가르치는데, 어느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하더랍니다. "교수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 과목을 들어야 합니까?" 톰 라잇이 그 학생에게 대답합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러자 그 학생은 머뭇거리면서 그동안 주어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는 톰 라잇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지 않네. 그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네. 어디,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겠나?"
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내신 그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실제 하나님과 일치하는지, 진지하게 따져 보셨습니까? 믿음의 이력이 지속되면서 여러분의 하나님 상은 계속 변모했습니까? 아니면, 10년 전에 믿던 그대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아니면, 그런 질문이야 목사가 대신 하는 것이고, 나는 목사가 설교하는 대로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구가 너무 커서 인간으로서는 지구를 다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우주가 너무도 광대하여 인간의 좁은 이해력으로는 그 전모를 다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물리적인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안다는 것은 마치 물속에 사는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의 세계를 더듬어 아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인간이 더듬어 하나님을 알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시해 주실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가능성이 열립니다. 기독교는 이 점에서 다른 종교와 차이를 가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여 찾은 하나님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설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다 이해한다 해도,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아가려는 '탐구심'과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대한 '겸손함'을 함께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라면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깊이 알지 못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사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면서 더 온전히 믿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도착하는 즉시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마치 애인에게서 온 편지를 대하는 연인의 마음으로 열어 보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입니다. 영어 주기도문은 "Our Father..."로 시작하지만, 우리말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합니다. 헬라어(the Greek)에서는 주기도문의 첫 문장이 "파테르 헤몬"으로 시작합니다. 직역하면 "Father of Us"가 됩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람어(the Aramaic)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런 까닭에 주기도문에 대한 영어 해설서를 보면, "Our" 혹은 "Our Father"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다룹니다. 원문의 어순을 따라 가자면 "아버지"라는 말을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하겠지만, 저는 우리 말 번역에 따라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다루려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더 논리에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을 전제하고 말씀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하늘들에 계신......"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는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마치 독일어와 네델란드어처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언어입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에서는 큰 것을 가리킬 때 복수형을 씁니다. '물들'이라고 하면 '바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늘도 인간이 보기에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하늘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냥 "하늘에 계신......"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이 땅에는 계시지 않고,
저 우주 공간 어디엔가 계시다는 뜻일까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어에서 'heaven'과 'sky'가 다르듯, 혹은 우리말에서 '하늘'과 '창공'이 다르듯, 성경에서도 두 가지의 하늘을 뚜렷이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말할 때, 그 '하늘'은 구름이 떠다니는 창공도 아니고, 수많은 은하계가 운행하고 있는 우주 어느 한 구석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3.
오늘 읽은 전도서 5장의 첫 두 절은 하나님 앞에 설 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을 꺼낼 때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라.
마음을 조급하게 가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하여라.(전 5:2)
왜 하나님 앞에서 말을 꺼낼 때에 조심해야 합니까? 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하십니까? 마음을 조급하게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땅'은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피조성과 한계성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창공이나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영원성과 위대성을 가리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하늘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크고 넓은 것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감히 그 앞에 서기에도 두려울 만큼 위대하시고 완전하시며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입을 열 때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예배로 혹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아무 개념 없이, 무심히 혹은 습관적으로 대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이며 또 얼마나 큰 위험한 일인지, 알고 보면, 자다가도 깨어날 일입니다. 그 옛날,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려 보았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았느냐?
누가 온 땅의 티끌을 되로 되어 보고,
산들을 어깨 저울로 달아 보고,
언덕들을 손저울로 달아 보았느냐?
누가 주님의 영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주님의 조언자가 되어 그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40:12-13)
......
그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다.
섬들도 먼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15절)
......
그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에게는 사람이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17절)
......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26절)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말을 걸려는 상대가 누구인지 새삼 환기시켜야 합니다. 기도란 그런 분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자에게는 늘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떤 상황이나 사물 혹은 사람에게 짓눌려서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갑작스럽게 불치의 병이 발견되었다든지, 홀로 길을 가는데 주인 없는 도사견이 어슬렁거리고 다가온다든지, 혹은 한적한 길에서 수상한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감정을 한자로 '공포'라고 합니다. 이 감정은 마음과 영혼을 질식시키고 사지를 마비시킵니다. 다른 하나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 혹은 거룩함을 대면할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의 초라함을 자각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 감정을 '경외감'(sense of awe)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료시킵니다.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두 번째의 두려움 즉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4.
앞에서도 말했듯,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편한 정도로 작게 만들어서 믿고 싶어 합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하나님을 원합니다. 내가 조종할 수 있는 정도의 하나님을 원합니다. 나를 귀찮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고분고분 내 말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의 세계관과 논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만들려 합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 하여금 나에게 순종하게 만듭니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근대에도 그랬지만, 현대에 와서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한 없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더 이상 경외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지 않습니다. 나보다 작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감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나를 편하게 해 줄지 모르지만, 나를 변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내가 만든 우상 하나님은 나에게 의미 있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때로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우상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놀래키시며 부단히 우리를 흔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기도는 위험한 것이며, 제대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변화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윌버 리스(Wilbur Rees)가 쓴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꼭"(I Would Like To Buy Three Dollars Worth of God, Please)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주님의 작은 일부만을 사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깨뜨리지 않을 정도만. 수면에 방해 받지 않을 만큼만. 내 인생이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따뜻한 우유 한 잔 만큼이면 됩니다. 내 죄책감을 조금 누그러뜨릴 만큼이면.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호주머니에 넣을 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흑인을 사랑하도록 만들 정도로, 혹은 이민자들과 사탕무우를 주우러 다니게 할 정도라면 곤란합니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만. 시간이 날 때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만.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나는 변화가 아니라 황홀경을 원합니다. 거듭나지 않고, 그냥 모태에서 온기를 즐기며 지내고 싶습니다.
나는 영원의 2킬로만 사서 종이 봉지에 담아들고 싶습니다. 그 이상을 사야 한다면, 무르고 돈을 되돌려 받겠습니다.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꼭. 그 중 일부는 궂은 날을 위해 숨겨 두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내 안에 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만.
이렇게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살 수는 없을까요? 꼭이요.
어쩌면 내 마음을 저렇게도 잘 표현했을까, 싶습니까?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이 같은 은밀한 바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분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붙들려 원래의 꿈과 야망을 모두 버리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분에게 "재수 없이" 붙들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다 사려면 얼마나 돈이 드는지 모르지만, 3달러 정도만 사서, 내 삶에 장식품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인 것을!
5.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작아지고 겸손해져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 깊은 영예와 감사를 느껴야 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앞에 서는 자격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나 전능자 앞에 설 수 있으나, 그분 앞에서 감히 입을 뗄 수 있는 담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이 그 담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도 전능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기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4:14-16)
이 말씀에서 보듯, 우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를 전능하신 창조주 앞에서 기도할 자격과 담력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에게 말씀 드리기에 너무 사소한 일도 없고, 그분에게 기도하기에 너무 큰일도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도 할 수 없어!"라고 지레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의 말씀은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힘을 주시며,
기운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라도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27-31절)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당장의 해결책을 마련해 줌으로써 서서히 노예로 사로잡는 악한 잡신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온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아시는 분, 우리의 게놈(genome) 지도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미 다 헤아리고 계시는 분,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할 계획을 준비해 두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6.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 조카가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가 턱이 깨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학교에서 온 전화를 받고 형수는 형님에게 그리고 친정에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아들이 실려 간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아들을 수술실로 들여보내 놓고는 다시 남편과 친정에 전화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는데 벽에 걸려 있는 채플실 표지판이 눈에 보입니다. 형수는 채플실로 찾아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성공적인 수술을 위해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한 참을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이럴 때 기도로 찾을 하나님이 내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감사의 마음이 차오릅니다. 그 이후로는 아들에 대한 기도는 잊고 자신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만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안에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다 요약되어 있습니다. "땅에 사는" 우리는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그분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감히 그분 앞에 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담대하게 모든 짐을 그분께 내려놓고 기도로써 구합니다. 때로 우리는 다급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데에 급급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문득 전능자의 위엄과 그 영광, 그 완전하심과 아름다우심, 그 위대하심과 전능하심, 그 선하심과 그 거룩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입을 다뭅니다. 그 전까지 하나님 앞에 쏟아놓은 모든 말들이 헛소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 떱니다. 그 전능자 앞에서 우리는 다만 입을 다물고 "주님,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는 든든한 평화가 들어차고, 험한 세상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이라는 한 마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그 안에 얼마나 큰 의미가 담겨 있는지가 분명해졌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마주한 그분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또한 누구의 은혜로 그분 앞에 서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로써 가져가되, 무엇보다도 우리를 자녀 삼으신 그 전능자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문득,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오, 나에게 화로다!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입술을 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거룩한 전율을 느끼고 일어나면, 세상에서 어떤 일이라도 마주하고 이길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저희에게 주신 이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기도로 주님 앞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감사와 감격으로 서게 하소서.
저희의 기도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
가장 귀한 시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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