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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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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3월 18일 주일 설교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6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누가복음 17:20-21
1.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다르시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얼마나 다른 분인지를 안다는 뜻이며,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합당하게 그분을 대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말 어법을 무시하고 직역하자면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가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다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는 없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같은 오해는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없다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알고 보면 성립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에 문제가 있으면, 바른 대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물질에 대해 하는 질문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시아에 있기 때문에 유럽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물질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그 나라가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종류의 나라라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눅 17:20-21)
여기, "너희 가운데"라고 번역한 어구는 "너희 안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우리 마음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가 아님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마지막 재판 과정에서 빌라도에게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요 18:36)
하나님 나라가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종류의 나라가 아니라면, "하늘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공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기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우리 몸 속에도 있고, 몸 바깥에도 있고, 몸을 에워싸고 있기도 합니다. 집 안에도 있고 집 바깥에도 있으며 지구 끝에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면, "오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내 안에도 있고 우리 가운데에도 있다면, 왜 그 나라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2.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나라가 오게 해 달라고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중에도 있고 우리 바깥에도 있는 그 나라가 지금보다 더 환히 드러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자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믿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 그 친구에게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죄악에 물든 인간은 그 나라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힘씁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무시하자면 쉽게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하나님 나라가 마음의 눈에 보이더라도 외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들은 그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게 되고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 기도는 그 나라를 더 분명히 보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더 깊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고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또한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데이빗 팀즈(David Timms)는 "Thy Kingdom come!"("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이라는 기도를 뒤집으면 "My kingdom done!"("내 나라가 끝나게 하옵소서")이라는 기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기가막힌 통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한 번에 완전히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또한 이 세상에 대한 중보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너무도 차이가 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이들이 더 많아져서 이 세상이 좀 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가까와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이 땅에서 보는 그 어떤 제도에도, 그 어떤 이념에도, 그 어떤 국가에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이상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인 이상으로 이 땅의 모든 제도와 이념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상시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힘쓰는 동시에, 속히 그 날이 와서 모든 것이 회복되고 바로잡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먼저 하고 "나라이 임하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그 다음에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두 번째의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얼마나 다른 분인지, 그 존귀와 권세와 영광이 얼마나 큰 분인지, 진리와 정의와 선과 아름다움에 있어서 얼마나 완전한 분인지를 깨달아 알아야만, 그분을 향해 "오, 하늘 아버지여, 당신을 저의 왕으로 모시기를 원합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나라를 바꾼다는 말은 자신의 통치자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그토록 독립과 해방을 갈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천황을 왕으로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편의상 국적을 바꿉니다. 미국 시민권을 받는 것이 조국을 바꾸는 것이며 최종적인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선뜻 국적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 십 년 동안 영주권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민권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한국 대통령을 자신의 대통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왕을 바꾼다는 것은 부모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하늘 아버지를 왕으로 선택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나면, 서슴 없이 그렇게 하게 됩니다. 이 땅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다른 전능자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다는 것은 더 없이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것은 자랑스럽고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중 국적자입니다. 하나의 국적은 그 사람의 여권에 찍혀 있는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두 개의 국적 중에서 우선적인 충성의 대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의 시민권은 한시적인 것이지만, 하늘의 시민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땅의 나라에서 경험하는 정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땅의 가치관에 비할 것이 아님을 알기에 우리는 하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 땅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으면 때로 우리는 '거룩한 불복종'(holy disobedience)의 길을 갑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이루어지면, 결국 이 세상은 더 행복해질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방인' 혹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성경이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나그네'라는 단어를 만날 때마다 고 박목월 선생의 시 '나그네'를 생각합니다. 박목월 선생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래서 그분의 시에는 기독교적인 사상이 은밀하게 그러나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시는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아름다운 그림 언어로 표현한 명작입니다. 성경에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저는 이 시를 덧붙여 151편으로 만들었으면 싶습니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구름에 달 가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것처럼 신비로운 모습이 또 있을까요? 구름과 달이 어디선가 부딪힐 것 같과 얽힐 것 같은데, 아무 거침 없이, 구름이 가는지 달이 가는지 모르게, 흐르는 물에 배가 실려 가듯, 그렇게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야 합니다. 이 세상에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필요한 대로 물질을 받아 사용하지만, 필요할 때면 놓고 떠날 수 있는 영적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나그네가 가는 길은 외줄기 길입니다.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인적이 드문 남도 삼백리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이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외롭습니다. 저녁 노을이 질 때, 술 익는 마을에서 잠시 머물러 쉬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그렇게 머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떠날 때가 되면 다시금 구름에 달 가듯이 아무 것에도 거침이 없이 걸어갑니다. 그가 다녀간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지만, 이 세상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나그네의 자취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나라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이같은 여유와 자유를 만들어 주었습니까? 왜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욕심 많고 더 집착적이고 더 세속적인 것처럼 보일까요? 하나님 나라를 알고 믿고 사는 사람답게, 주어진 일에 신실하되 집착하지 않고, 욕심 없는 마음으로 살며, 떠날 때 떠날 줄 알고,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영적 자유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심각하게 잘 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4.
하나님을 향하여 "나라이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그네 길을 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더 없이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우는 학습장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에 대해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학교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로 취급 당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땅의 나라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TV, 음악, 영화, 게임 등 현대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는 매체들도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사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교회에서조차도 자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침묵하고 땅의 나라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은 세상 나라에서 승리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아주 매력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매력 없어 보이는 복음'을 계속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습하는 현장입니다. 때로 외롭고 힘든 나그네 길을 가는 사람이 길벗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고 힘인지 모릅니다. 교회는 나그네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길을 걷는 '나그네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는 높은 사람은 낮아지고 낮은 사람은 높아지는 거룩한 질서를 실험하는 현장입니다.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누구에게나 동등한 대접을 하는 새로운 질서를 실험하는 곳입니다. 믿음이 커갈수록 낮아지고 섬기는 것을 실험하고, 원수까지도 품고 사랑하는 법을 실험하는 곳입니다. 더 많이 가져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나눔으로써 행복해지는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아니고는 이같은 실험을 할 곳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같은 삶을 실험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셋째, 교회는 또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게 완전한 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과는 다른 무엇을 보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이라면 교회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때로는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지 않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배웠다면, 이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신비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럴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넷째, 교회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확산시키는 거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상 곳곳에, 사람들의 마음 안에, 그들의 삶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힘으로 확장시키겠다는 생각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같은 헛된 욕망으로 인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행해 왔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에 눈 뜨도록 전도와 선교를 통해 도우면 됩니다. 나그네 길을 가면서 자신이 가는 나그네 길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지난 주일 교인 총회를 통해 채택된 동의안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체 확장을 위해 정기적으로 건축 공사를 하는 길로 가는 대신, 정기적으로 교회의 일부를 나누어 분립 개척하는 길로 가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선택으로 인도하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길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가치에 더 부합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러한 선택을 하고 이러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내 몸집을 줄이는 연습을 해야만 세상에서도 그렇게 할 것 아닙니까? 나그네는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닐 수 없습니다. 필요한 만큼 쓰고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로부터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내가 예배 드릴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헌신한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꺼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믿고 과감히 광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은 것을 놓고 불편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다짐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이미 전설이 된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을 맡고 나서 승승장구할 때,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금까지의 성적에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살 때까지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할 때까지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그리고 이 땅 구석 구석에 하나님의 정의가 완전하게 실현되기까지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마 5:6)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 짐작이 됩니다. 그 배고픔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할 때마다 그 나라에 대한 배고픔은 더욱 깊어갑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기원이기보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데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즈음이면 예민한 분들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느낄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제대로 기도하고, 그 기도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기도한 그대로 살아간다면, 우리 각자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지, 짐작이 될 것입니다. 이제 겨우 두 가지의 기도만을 보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나머지 네 가지 기도를 다 보고 나면 얼마나 더하겠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한 이들에게는 "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만큼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자신의 나라'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두고 떠나 나그네 길에 올라 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만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내 손으로 세운 나의 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마 6:33)를 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위험한 기도가 가져다 주는 축복과 희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이 땅의 모든 교회들에게 그 나라가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 아버지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 세상 모든 영혼들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나라들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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