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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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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17절.
1절-7절: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 인이었더라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기도: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저희들을 중생시키시고, 성품 면에 질적인 면에 온전 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실질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려고 저희들을 불러서 모아주심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병들고 냄새나고 이질적인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거 낱낱이 고쳐 주옵시고, 우리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인 단일성으로 다 닮아져서 온전자로 나올 수 있도록 저희들을 고쳐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형제들 중에 정신적이나 육신적으로나 혹은 신앙적으로나 앓고 있는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로서 진리와 영감으로서 주님의 말씀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모두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남은 시간 남은 일생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수종들면서 건설적으로 아름다운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이 잘 입혀 나올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역사해 주옵소서.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믿음이 좋다’ 할 때 어떤 것이 믿음이 좋은 건가? 참 믿음은 어떤 것인가? ‘성경에 믿고 기도하면 뽕나무 뿌리도 뽑혀지고 산도 옮긴다고 그랬는데 그걸 믿습니까?’ ‘아멘.’ 이것이 믿음이지요? 믿음 아니요? ‘여자가 남자가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하면 그게 믿는 거지요? 믿음 큰 거 아니요?
믿음에는 사욕적 믿음이 있고, 신뢰적 믿음이 있고, 신의적 믿음이 있고, 신념적 믿음이 있고, 신앙적 믿음이 있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참 믿음인가? 나는 지금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무조건 그저 믿으면 다 참 믿음인가?
‘하나님께서 백억 천억을 줄 것을 믿습니다’ 하면 이건 무슨 믿음이지요? 사욕적, 신뢰적, 신의적, 신념적, 신앙적 믿음 중에서? 사욕적인 믿음.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슨 믿음? 예수이름으로 해도 사욕적 믿음이지. 좋은 며느리나 좋은 사윗감 달라는 그런 기도는? 그것도 사욕적 믿음.
만일 완전계요 무한계요 신령적인 천국이 없다면, 또 하나님의 속성인 완전성 무한성 다양성 인격성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궁극적 목적적 영원적인 구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바로 잡아야지요.
우리 기독자들의 구원이 무엇이냐? 보통 보면 ‘열심히 믿고 천당 간다. 이게 구원이다. 구원 받았다’ 그러지요. 물론 그것도 구원이긴 구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의 다양성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목적적인 구원이라든지, 성화구원이라든지, 연관구원이라든지, 자체구원이라든지, 얻은 구원이라든지, 얻을 구원이라든지 구원의 다양성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
얻은 구원은 우리의 기본구원이고, 얻을 구원은 궁극적 목적적 영원적 결과적 구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독자들이 이것을 모르면 믿음에 대한 정확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을 끌어다가 활동적인 믿음생활, 활동적으로 사역적으로 잘 하게 하려면 무엇을 불어 넣어주면 되지요? 뭘 불어 넣어주면 잘 할까요? 사욕을 불어 넣어주면 잘 하지요. 그러면 그런 사람을 튜브에 바람을 빼듯이 그렇게 못하게 하려면? 그 사욕을 뽑아버려야지요. 뽑아가지고 바꾸어진 상태에서,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열심히 하던 그 열심성이 천국성의 열심성으로 나가야 그게 옳다 그 말이지요.
여러분들, 생각해 봐요. ‘내가 가는 길, 내가 하는 일에 함께 해 주십시오. 예수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하고 기도한다면 그 사람 믿음 좋지요? 그런 기도 하나가 있고, ‘주의 소원대로 하소서’ 하는 기도가 있다면 어느 기도가 옳은 기도로 보이지요?
한 사람은 ‘내가 하는 일에, 내가 하는 사역에 함께 해 주십시오.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그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렇게 초저녁에 시작해서 아침까지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새벽기도에 나와 가지고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당신의 소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했어요. 그 한 마디 기도하려면 몇 초밖에 안 될 테지. 그렇게 했단 말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느 기도를 들으실까? 밤새도록 한 기도하고, ‘주님의 소원대로 하소서’ 하고 잠깐 나와서 한 마디 한 기도하고 어느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까? 우리는 보통 어느 걸 참 기도로 여기지요?
우리가 그런 게 있어요. 뭔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싶은 그런 게 있잖아. 그럴 때는 ‘주의 소원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말은 ‘주의 소원대로 이루어 주소서’ 라고 기도는 하는데 그 마음의 기준적 중심이 은근히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그런 게 있을 수 있지요. 사람의 마음이 참 요상 요상 괴상 괴상한 거야. 그러니 어떻게 그 속을 알겠어? 하나님하고 자기만 아는 거지. 어쨌든 고통스러운 거는 자기밖에 없어. 하나님은 안 속으니까.
우리 인간이 편안할 때에는 주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그런 게 별로 없단 말이요.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 되고 편안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항상 주님의 뜻을 찾아 살아야지요. 그러니까 남의 일이 어렵던 내 개인적인 삶이 풍부하던 어렵던 그 면에 신경 빠지지 말고 어찌하던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고자 하는 그게 있으면 돼요.
믿음에도 여러 가지 믿음이 있는데 보통 보면 이걸 따지지 않으려고 그래요. 믿음의 방향, 믿음의 목적을 잃고 헌금 많이 모으기, 사람 긁어모으기 등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목적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니 모르긴 해도 하나님이 그런 기도 다 듣고 있으려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요. 안 그렇겠어요? 그런 기도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요?
우리가 어떤 사건을 계획해 놓고 그것을 확실히 이뤄주실 것을 믿는 것은 신념적 믿음이에요. 병 낫기를 의심치 않고 믿는 것이라든지, 자기 일이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라든지, 5년 내로 1억을 벌게 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라든지 이런 건 신념적인 믿음.
그러니까 인간이 예수이름을 안 불러도, 전혀 불신자라도 자기가 어떤 사업의 목표점을 달성을 하려고 냅다 열심을 품고 하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식의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 정신력을 가지고 어떤 사건을 계획하고 ‘이 계획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고 전심전력으로 그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신념적 믿음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이다. 주의 일이다’ 하고서 그렇게 하는 게 많이 있을 수 있어요.
자기가 사욕적인 믿음에서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신념적인 믿음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많이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그게 또 믿음인줄 알지. 교회에서 어떤 사건에 계획을 짜놓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문화부다. 봉사부다. 무슨 부다’ 이렇게 각 부서를 세워놓고 각 부서의 장을 세워서 그 일을 하는 거. 우리가 교회에서 그리로 빠지기 쉽지요.
또 신뢰적 믿음이 있다. ‘하나님은 악이 없고 하나님 당신 자체가 선하신 분이니까 나에게 모든 세상만사를 다 잘 되게 해 주시겠지’ 하는 게 신뢰적 믿음.
그 다음에 신의적 믿음. 옳은 진리의 바탕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인정을 하고, 하나님의 열두 속성을 인정을 하고, 하나님의 단일속성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의 신실성이라든지 인격성이라든지 하나님을 아는 면에, 하나님께 소원 목적을 두고 그 기준에서 비뚤어진 자기 인격성을 하나님께 맞추려고 집중시켜 나가면서 순종해 나가는 것. 이것이 신의적인 믿음입니다.
이 신의적 믿음은 하나님의 객관을 자기의 주관으로, 자기의 능동적인 것은 빼버리고, 자기의 기존성을 버리고, 아무리 자기 것이 좋아보여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객관을 자기의 주관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기준으로 삼고 믿고 나가는 거.
여기에는 자기의 지식이 바꾸어지고 의사가 바꾸어지고 취미가 바꾸어지고 가치가 바꾸어지고 자기의 기존의 사상 취미 성격 욕망 전부는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또한 순종이 나오는 것이고.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그것이 자기의 신앙사상화 된 거지요. 단순히 지식으로 머무르는 게 아니고 그게 아예 사상으로 돼버렸어요.
하나님의 것이 자기의 인격화 사상화로 안 되면 자기는 그렇게 살지를 않으면서 남에게만 냅다 비판하고 평가하는 거지요. 자기가 못하고 있는 것을 남이 하고 있는데 그걸 자기가 비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거는 신의적 믿음이 아니지요.
무형적인 면이 순종이 안 되면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이라 그럴 때에 우리 인간들은 속기가 쉬운데, 자기 속의 의사성은 하나님의 뜻과는 팽팽하게 대립이 돼 있는 상태인데 몸으로 움직여주면 순종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참 순종은 그게 아니고 무형적인 면에서 먼저 순종이 되면 활동적인 순종은 기뻐서 자발적으로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무형적 순종에서 유형적인 순종으로 나오는 게 바른 믿음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진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순종을 하려면 뭘 알아야 순종이 되겠느냐?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깨닫고 내가 바꾸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로 서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가지고 즉시로 블레셋 길로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에서 뱅뱅뱅 돌면서 40년을 보냈단 말이요. 그렇지 않아요?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랬나? 열두 정탐꾼 보낸 곳. 거기에서 안 믿으니까 도로 거기서 빠꾸가 돼버렸어. 빠꾸가 되면 방향은 어느 쪽이지요? 애굽 쪽이에요. 방향은 애굽 쪽. 그래, 그 전에는 방향이 가나안을 향해서 갔단 말이요. 그런데 정탐꾼의 보고에서 불신이 됐어. 그래서 이제 방향이 도로 애굽으로 됐어.
그럴 때에 누가 묻기를 ‘모세 당신 지금 어디 갑니까?’ 그러면 모세의 대답이 뭐라고 그래요? 가나안 간다고 그래요, 애굽 간다고 그래요? 그래, 가나안 간다고 그러겠지. 가나안을 등지고 가면서 가나안을 간대요.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볼 때는 가나안과 자꾸 멀어지는 건데도 가나안으로 간대요. 우리 신앙이 그런 상태가 많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패역을 부림으로 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광야에서 자꾸 뱅뱅뱅뱅 그 자리에서 돌면서도 가나안으로 간대요.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 가지요? 곧 죽어도 천국에 간대요.
우리가 이걸 보면 가나안에 가는 목적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믿는 목적과 방향을 바로 가져야 한다. 신앙적 믿음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신앙적 믿음이란 완전히 바꾸어 놓은 거다.
우리는 각자 자기 지식이 있는데 자기 지식과 진리지식이 일치되는 그런 때가 있고, 자기 지식과 진리지식이 반대가 될 때가 있고, 자기 지식과 진리지식이 대립이 될 때가 있어요. 이 세 가지를 종류 별로 볼 때에 우리가 어느 걸 따라야 되지요?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지식으로 나가야지요? 그런데 보통 보면 첫째 번 것에 빠지기 쉽겠지요. 그런 상태를 알아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
또 하나 물어봅시다. 일치성이 하나 있고, 각치성이 하나 있고, 대립성이 하나 있어. 일치성은 뭐요? 내 뜻이 하나님 뜻으로 바꿔져서 일치성?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없이 갑과 을이 가지고 있는 게 서로가 하나가 될 수가 있지요. 그게 일치성.
일치성 각치성 대립성, 여기서 우리가 살려둘 게 어느 거지? 없어요? 우리가 가질 것은 하나님의 단일성. 이 단일성은 살리고 그 외의 것은 다 말살시켜야지요. 그런데 이게 참 말이 쉽지 아닌 말로 교회 안에서 어떤 사건을 두고 발언이 나왔다 이랬을 때에 그게 참 어려울 거라.
단일성이 뭐지요? 내 뜻은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는 거. 하나님의 의사에 맞추는 거. 하나님의 의사는 어디에 있지요? 궁극적 구원에 있고, 자타의 구원에 있고. 어떤 행동이건 어떤 명령이건 그렇지요? 거기에 다 있어요.
우리 성도가 물론 일반 도덕적인 범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가 자타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라면 옳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걸 목적을 하고 염두에 두고 했음에도 그 일이 성취가 되지를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거는 옳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 하는 이건 하나님의 계시에서 나오는 거지요. 하나님의 은밀계시, 하나님의 의지계시에서 나오는 거다. 자타의 구원을 이루는 거는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오는 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단일성도 ‘내가 그걸 가져야겠다’ 해도 그게 땅에서 나오는 거는 아니지요. 만 인류 인간으로부터 나온 거는 아니지요.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간단히 말하면 진리지식에서 나온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감염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에 감염도 될 수 있고, 하나님이 감염될 수도 있어요. 왜 그런 감염성자로 지었는가? 하나님의 성품, 신의 성품을 입게 하기 위해서 감염성자로 지었다.
그런데 아담의 경우는 하나님 신의 성품이 먼저 감염되는 것보다 죄악성이 먼저 감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악에 감염이 되면 어느 쪽을 좋다고 그래요? 세상이 더 좋다고 그래요, 천국이 더 좋다고 그래요? 세상. 그렇지요. 그게 무엇에 감염이 된 사람이다? 죄에. 그건 선악과 따먹은 거지요. 그 선악과가 더 맛있다는 거지.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좋아하고 따라가면 천국이 감염이 되는 겁니다.
또 한 번 이해 타산적으로 평가를 해 봅시다. 세계 최고의 교회가 되는 이게 하나 나왔고, 자기가 하나님에게 감염이 되는 것 그게 하나 나왔고. 이 때 어느 것을 선택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거 자기가 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예수 믿게 하는 그게 하나 있고, 그래서 지상천국이 되는 그게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내가 하나님에게 감염되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어느 것을 선택을 하겠어?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만 감염이 되고 세상은 감염이 안 되면 좋겠는데 이 감염성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도 우리의 시감성으로 통해서 촉감성으로 통해서 미감성으로 통해서 청감성으로 후감성으로 통해서 들어온단 말이요. 그러니 문제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신의를, 하나님의 옳은 것을 바탕을 하고 나의 시감성 촉감성 미감성 후감성 청감성 모두 다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나가는 것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야 할 이유, 바꾸어야 할 이유는 신령계가 있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곳으로 갈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성격이나 성분이나 성품이나 성질이나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나가는 것. 질을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바꿔라 그 말이요.
영적 이스라엘 종교말년에 무슨 죄가 남발하지요? 마지막 시대에는 어떻게 된다는 거요? 어느 죄에 빠진다는 거요? 요한계시록에 뭐라고 말하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뭐라고 그래요? 말세가 되면? 도덕성의 타락. 그거는 음란방탕이지. 그렇지요? 말세가 되면 그렇다. 그런데 교회에서 외식 죄는 말하지 않고 있다. 외식 죄는 몰라요. 자기가 신앙해 나가는 게 외식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다 그 말이요. 모르니까 말을 못하지.
우리가 신의 성품으로 입혀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운동은 하나님의 것으로 맞추는 단일운동입니다. 교회운동은 단일운동, 생명운동은 하나님의 것으로 단일운동입니다. 애정적 단일, 성격적 단일, 능력적 단일, 소원적 단일, 지식적 단일, 기능적 단일, 지능적 단일. 복음운동은 단일운동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 달라붙어 가지고 두들겨 패는 것도 뭘 만들기 위해서요? 나를 하나님의 단일로 만들기 위해 하시는 거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그 의사에, 그 소원 욕망에, 취미와 모든 추구성에 하나님의 단일성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모든 환경이 돌아가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당신처럼 본질적 단일성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오늘날까지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항상 우리의 오각과 오감성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을 바로 찾아 이 짧디 짧은 나그네 생활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잘 성장시키고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후회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빠진 당신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하나님 앞에 바로 깨닫고 순종해서 거룩한 삶을 살면서 수종들면서 큰 은혜 받을 수 있는 그런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무능하고 믿음이 약하고 너무나 둔탁하고, 어떤 사건이 부딪히면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아버지여, 그 때마다 저희들의 옳게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을 굽어보시고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마시고 저희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 의욕이 불일 듯 일어나도록 아버지 하나님, 역사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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