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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궁극이............... 조회 수 1597 추천 수 0 2013.05.10 16: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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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1:1-7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1-7.

 

1-7: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 인이었더라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여러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라든지 루터주의 또 가톨릭 등 많이 있지요. 크게 나누면 칼빈주의, 또 알미니안주의, 또 자유주의 그런 게 있고, 좀 더 세밀하게 나누어 본다면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기독교 민족주의, 기독교 염세주의, 기독교 세속주의, 기독교 신비주의, 기독교 기복주의, 기독교 복음적 내세주의 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이거 다 분별하겠어요? 우리가 무슨 주의, 무슨 주의하는 이걸 분간을 못하면, 구별을 못하면 자기가 그런 주의로 살게 되는 거지요.

 

물론 성경에는 그런 성분들이 부분적으로 들어있어요. 그러나 주의는 아니에요. 신비적인 것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비주의로는 나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 존재 자체가 신비지요. 신비로운 존재지요. 그리고 성도들도 신비로운 경험들을 하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신비주의로는 나갈 수가 없어요. 신비주의로 나가면 그건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탈이 돼버린 거요. 우리가 나가는 것은 기독교 복음적 내세주의.

 

우리가 기독교 사회주의를 예를 들어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혼란하고 혼탁한 사회를 제거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해 가지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오신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이 기독교 사회주의란 말이요.

 

또 어디서 평등사회를 부르짖지요? 그 맥이 통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그거 알아야 돼요. 사회적 평등을 부르짖고 나가는 여기에는 혈투가 들어 있고, 몽둥이가 들어 있고 내란적인 어떤 그런 게 들어 있고 그래요. 맥이 통해요.

 

천주교회 책을 보면 그래요. 우리 집에 그 책이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사회적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을 기독교가 돌봐야 된다. 돌보지 않고 기독교에서 종교인들이 자기 배만 불린다. 봉사할 줄 모른다그렇게 들어가지요.

 

또 기독교 민족주의가 있는데, ‘우리나라를 누가 지키겠느냐?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은 오직 복음으로 된, 성경으로 된, 신앙으로 된 정신력으로 국가를 지배하고 나가야 된다.’ 이렇게 나가게 되면 이거는 이간을 붙이는 격이 돼버리지요. 그 어떤 유형적 가변적인 면에다 목적을 두고 민족주의, 국가주의하고 부르짖고 나가면 이간이 돼버려요. 이것은 사람을 아주 못 쓰게 만들게 되는데, 교회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면 보통 보면 교인들이 아멘 아멘하고 돌아가거든요.

 

우리는 우리나라혹은 우리하는 그게 자기 귀에 듣기 좋다고 무조건 아멘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훑어봐야 한다. 그리고 구원도리에 적이 되는 것은 주님과 대립이요,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의 모든 게 물질인데 이 모든 물질을 악이라 하고, 또 가정도 죄악시 하고, 또 시집장가 가는 것도 죄악시 하고, 그래가지고 가정도 돌보지 않고, 형제들도 돌보지 않고 자기 혼자 굴속에 들어가서 주여 주여하며 기도하는 그게 무슨 주의요? 염세주의. 기독교 염세주의. 그건 자아도취요.

 

이방인들의 종교는 그럴 수가 있지요. 어디 의지할 데도 없고 하니 아무 신이나 붙잡고 거기 의지해 보자하는 그런 식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러나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살이가 힘들고 복잡하고 그래서 믿는 기독교입니까? 그리고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 당신이 인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려고 해서 우리가 믿어주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향한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100% 받아서 누리고 느끼게 하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세상살이가 빈부의 격차가 많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서 누리고 느끼게 하기 원하는 거기에 우리의 안고라든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환난이라든지 우리의 부요 혹은 빈곤 이런 거와 연관을 지어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뭐라고 그랬지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받아서 누리고 느끼게 하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도 주목적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현재 우리의 세상살이가 가난에 쪼들리고 하는 그것까지 걱정을 해 주느냐 그 말이요. 어떻습니까?

 

인간 편에서 생각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신경을 써 주셨으면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하고 생각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고나 부요관이나 여기에 대해서 염두에 두지를 않아요. 오직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당신의 것을 받아서 누리고 느끼게 하는 그 면을 주목적으로 나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생활까지 신경을 쓰실 것 같으면 현재 불신자들이 믿는 우리보다 더 잘 살고 있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불신자 그들의 육신생활을 염려를 해줘서 그들이 그렇게 잘 사는 겁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꼭 그렇게 느껴지기 쉽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면 불신자가 우리보다 더 잘 살고, 돈 더 많이 벌고, 더 편안하고 하는 그런 걸 보더라도 현재 우리의 안고나 빈곤이나 이런 거는 하나님께서 걱정을 안 하신다. 상관이 없다 그 말이요.

 

그리고 불신세계는 자기 노력 것 자기 힘으로 세상을 정복을 해가지고 누리면서 살지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하자니 내 힘이 부족하니까 하나님께 힘을 달라는 식으로, 복을 달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단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면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를 않아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불신자들은 세상경쟁을 놓고 살고 있거든요. 그들은 노력을 하느니 만큼 빼앗고 살지요. 물론 우리가 특수계시를 깨닫는 면을 염두에 두면서 볼 때에 그건 자연계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천국경쟁을 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천국경쟁을 해야 된다. 부지런히 정복을 하란 말이요. 정복, 전투.

 

불신자들은 세상을 더 가지기 위해서 저렇게 눈을 부라리지만 우리는 천국경쟁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힘쓰고 애쓰고 달음질을 해야 된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그런 정신, 신앙 사상적 깡아리가 박혀 있어야 된다.

 

여러분들, 혹 아는 사람에게 전도할 때에 들으면 듣고, 말면 말고그런 식입니까, 끈덕지게 달라붙습니까? 어떻습니까? 고무줄 모양으로 죽 잡아당겼다 놨다 그럽니까?

 

불신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사는 그 성질이 방향과 목적만 달랐다 뿐이지 그 끈질기고 끈덕지고 굽힐 줄 모르는 그런 성질들이 우리는 복음에서 자기가 만들어진 그 속에서 그런 게 나와 가지고 써먹어야 된단 말이요. 이게 정복이에요. 정복을 하지 않으면 자기 거는 없어요. 그런 면에 강한 정신력이 있어야 세상에서도 일상생활 면에서도 생활이 유지가 되는 거요.

 

나는 천국을 누릴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요.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잘 입고 가자하는 소원성이 안 나오는 이것은, 또 그런 사상이 아닌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자기가 예수를 믿더라도 그건 구원(성화)이 아니란 말이요.

 

우리가 기독교를 다룰 때에 하나의 제도를 가지고, 유형적인 어떤 의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따지지 말아요.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그 사상 정신 그게 복음이요, 그게 구원이요, 그게 자기 생활이 돼야 합니다.

 

마태복음 720절로 보면 자기가 아무리 땅에서 큰일을 이뤄놓았다 하더라도 주님이 뭐라고 그랬지요? 누구의 뜻대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가 들어간다. 그렇지요? 말세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서 뭐라고 그랬지요? 뭘 행한 자들아? ‘불법을 행한 자들아.’

 

아니, 예수이름을 가지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큰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했는데 뭐 잘못된 거 있어요? 오늘날 교회의 현상을 보면서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에 끌어와서 대보면 뭐 잘못된 거 있어요? 문자적으로 잘못됐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순서 제도적으로 잘못된 거 있습니까? 잘못된 거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너를 조금 안다그랬습니까? 도무지 알지 못한다. 왜 그러지요? 알지 못한다그게 나왔을까요? 종교활동적으로 제도적으로 의식적으로 하나도 잘못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그러지요? 왜 알지 못한다고 그랬을까요? 그건 자기 혼자 한 거란 말이요. 자기 혼자. 이 무슨 뜻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내가 언제 너희들보고 그 일 시키더냐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 참 희한한 소리지요? 어째 그럴까?

 

예수님이 지식적으로 그들을 모른다는 말씀이 아니고 그들이 능동적으로 했단 말이요. 옛사람이 주격이 돼가지고 능동적으로 했단 말이요. 주님에게 피동 되어서 한 것은 합법이지요.

 

참 여러분들, ‘피동 되었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했다할 때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자기는 믿음으로 했다고 하는 거거든. 그런데 주님은 난 너희들을 모르겠다그랬단 말이요.

 

이걸 볼 때에 주님이 성도들에게 일을 시킬 때는, 무슨 명령을 하실 때는, 그리고 사건을 일으킬 때는 무슨 목적이지요? 전부 다 구원목적 아니요? 구원목적입니다. 그런데 구원목적으로 하는 거나, 사건목적으로 하는 거나 남이 볼 때는 행동은 똑같아요.

 

저 병자를 고쳐야지. 교회 안에 몇 십 명을 채워야지. 목사님이 배가운동 하라고 했다. 교회 안에 오백 명 채우기 운동, 오백 명 채웠으면 또 한 사람씩 끌어오면 천 명. 그렇게 해서 천 명 채우기 운동.’ 이게 사건을 목적을 두고 사건적으로 그렇게 나간 겁니까, 아니면 구원목적으로 나간 겁니까? 그게 구원목적으로 느껴져요?

 

그리고 배가운동, 끌어들일 목적으로, 덩어리 키울 목적으로 나가는 그 자들이 나가서 전도하고 끌어들일 때에 뭐라고 말을 합니까? ‘우리교회 교인숫자가 적으니 와서 당신도 하나의 수가 되어 주십시오. 교회 힘이 되어 주십시오그렇게 말합니까? 그게 아니라 예수 믿으십시오.’ 그러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전도해서 저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럼 내가 전도해서 교회에 온 그 사람 역시도 사명을 받아가지고 또 나가야지. 나가서 또 하나 끌어와야지. 온통 그렇게 물고 들어가지요?

 

또 교역자는 교회에서 교회의 어떤 목표를 세워가지고 그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지요. 천일기도의 목표, 어떤 사업의 목표. 그렇게 나가는 것이 사건목적으로 보여 집니까, 구원목적으로 보여 집니까?

 

그러면 그렇게 믿어도 예수 믿는 거고, 또한 그들도 성화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도바울과 같은 신앙사상으로 믿어도 성화구원이 이루어지고 그런 겁니까? 둘 다 똑같이 보여 집니까, 뭔가 달라 보입니까? 다르다면 뭐가 다르다는 것으로 느껴집니까?

 

여러분들, 거기에 대해서 아이, 생각하기 싫다. 그냥 편하게 살다 가자그냥 그렇게 느껴집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 내어 쫓고 다 했습니다하니까 난 너희들을 모른다하신 이걸 알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기독교 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신비주의 염세주의 이게 다 예수이름으로 안 합니까? 예수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큰 권능을 행하고 안 그럽니까?

 

사역적으로 보면 그들은 일을 잘 한 거지요.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에 일은 잘 했어요. 그러나 주님에게 피동성이 아니니, 피동성이 아니니 만큼 자기는 신의 성품이 전혀 입혀지지를 않은 겁니다. 신의 성품이 입혀지지를 않아. 지금 신앙사상을 가지고 말하는 거요.

 

우리가 딴 교회생활도 많이 했으니까 한 교회 안에서도 그런 거 볼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 많고 신체 건강하고 시간도 많고, 그래서 늘 교회에서 살면서 주의 일 한답시고 목사님과 같이 심방도 따라가고, 전도도 늘 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늘 집안에서 살림 사느라고 바쁘게 돌아가고 교회 오는 것도 굉장히 시간도 짬이 없는 것 같고, 그러나 주일은 잘 지킵니다. 그런데 뒤에 말한 사람을 보면 늘상 교회에서 사는 사람보다 가정에 충실하고 , 정말 믿음 있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그렇게 느껴지는데, 앞에서 말한 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심방도 가고 전도도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하는 짓을 가만 보면 믿음이 없고 전혀 예수냄새가 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종종 경험해 봤지요?

 

우리가 교회에서 종교활동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설교만 들어보더라도 , 이건 사역주의구나. 이건 염세주의구나. 이건 사회주의구나. 이건 국가주의구나. 이건 민족주의구나하는 걸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겠지요? 그게 다 사역이란 말이요. 이들은 기도가 늘 주님의 성품 인격, 주님으로 사상화 자체화 이런 것으로서 들어가지를 않고 뭐 어떻게 좀 해 달라. 뭘 어떻게 좀 해 달라이렇게 자기 몸 밖의 상황을 어떻게 해 달라. 어떻게 해 달라. 그런 기도 들어 달라그렇게 되어 있어요.

 

주님의 사역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입히는 이것이 주목적입니다. 어느 성경구절을 보아도, 어떤 사건을 봐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는 그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아마 생각을 해 봤을 것 같은데, 제가 어느 성경구절을 읽어놓고도, 그러니까 출애굽기던 신약이던 어디를 보더라도 늘상 하는 말은 성화구원이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늘 같은 말만 반복한다그런다고 합디다. 어떻습니까? 어때요? 같은 말이지요. 같은 말이에요. 어디를 보던지 방편적으로 성화구원을 입히는 방편만 달랐다 뿐이지 목적은 성화구원을 입히는 거. 여러분들이 듣기에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그렇단 말이요. 제 욕심이 그렇단 말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제 설교를 듣고는 어느 성경구절을 읽어도 늘 같은 말만 한다그렇게 말하는 의미가 무슨 의미지요? 제가 여기서 나는 늘 같은 말이다하는 그 말과, 그 어떤 사람이 내 설교를 듣고 목사님은 늘 반복적으로 같은 말만 한다하는 말이 그 의미가 같아요, 달라요? 같이 들려요, 아니면 다르게 들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들려요? 사상적으로 이걸 헤아려 보란 말이요. 같아요? 다르지요.

 

여러분들, 이런 욕심이 있을 수 있어요. 성경 어디를 봐도 우리의 구원을 빠뜨릴 수가 없어요. 성경의 기록목적이 그거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이게 안 나오면 성경은 아니야.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욕심이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스승목사님 살아계실 때에 그 밑에서 배우는 교역자들이 스승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자꾸 같은 말로 들리거든. 그러니까 진절머리가 난다 그 말이요. 앞으로 빨리 빨리 가가지고 구절 속에 번쩍하는 새로운 맛을 보고 싶은데 그게 안 나오고 맨 날 같은 말만 하는 것 같거든.

 

목사님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 스승목사님 귀에 들어갔어. 그래서 스승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이미 받은 거나 잡고 살아라.’ 그 말씀을 탁 들을 때에 내가 깨달은 말씀을 붙잡고 얼마나 만들어졌느냐하고 생각을 해 보니 하나도 안 만들어졌어. 내가 나를 볼 때 그렇더란 말이요. 딴 분들은 늘상 같은 소리로 들리니까, 늘 와서 들으면 같은 말 같고 같은 말 같고 그러니까 안 오는 교역자들도 있더라고.

 

그런 분들이 가고 나면(안 나오면) 스승목사님은 같은 성화구원이지만 다른 장면을 또 쓱 보여주고 그러더라고요. 스승목사님이 척 봐가지고 그런 분들이 있으면 좋은 거 내려고 했다가도 좋은 거 내주지를 않더라고요.

 

그 때 나도 사실 그런 걸 잘 몰랐어요. 뭔가가 앞으로 막 달려 나가서 성경 66권을 해석하는 거라든지 그게 욕심이 났거든. 그런데 스승목사님이 그렇게 안 하신 게 지금 가만 생각하면 이해가 가요.

 

성경을 해석하는 면에서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스승목사님은 그걸 어떻게 해석을 하시나하며 그 면을 욕심을 내고 나오는 분들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승목사님께서 차곡차곡 다져 나가시니까 조금 늦더라도 목사님의 뜻대로 배워나가자하고 계속 나가니까 내 속에 있는 것이 고쳐지면서 구체적으로 다져지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집을 지을 때도 돌을 하나하나씩 쌓잖아요? 한꺼번에 열 장 스무 장 올려놓고 냅다 쌓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하면 무너진단 말이요.

 

우리 인간은 자기 만들어지는 것은 눈에 잘 안 보입니다. 더더군다나 자기 속에 신의 성품이 입혀지는 이것은 더 안 보인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 이 삼위일체가 다 달라붙어가지고 나를 만들어도 내가 안 만들어져. 왜 그렇지요? 내 속에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보면 참 돌보다도 더 깡깡하고 교만하고 목이 곧고 하는 걸 느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한숨소리가 나오는데 아이고, 내가 언제 만들어질꼬이게 나온단 말이요. ‘언제 만들어질꼬.’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인 이 유대인들을 붙잡고 해 놓으신 일이 뭐지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붙잡고 해 놓으신 일?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는 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성품을 입혀나갈 때에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뭔가 하니 유물을 없애버려요. 알겠어요? 하나님께서 유물을 없애버려요. 이방종교인은 유물을 어떻게? 유물을 자꾸 남기고 그걸 감싸지 않아요? 그것가지고 돈 벌어먹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은 유물을 없애버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솔로몬 성전이 없어요. 또 법궤도 없습니다. 모세가 만든 그 법궤. 하나님 섬기도록 만든 법궤. 또 천막이라든지 무슨 제사장의 옷에 달게 된 그 방울도 없단 말이요. 그리고 또 보면 스룹바벨의 성전을 헤롯을 통해 없애버렸습니다.

 

만일에 그런 게 지금 남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굉장할 거란 말이요. 그렇지 않아도 땅속에서 발굴해가지고 이거는 예수님의 무덤이다. 기도하던 바위다하고 돈 벌어먹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유물을 없애지요? 왜 유물을 없앨까요? 하나님께서는 유형적인 것은 싹 없애버리고 오직 뭐요? 오직 말씀이요.

 

희랍의 여신들, 이방의 여러 신들, 이거 보면 전부가 유물을 보존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유물보존이 아니란 말이요. 오직 진리말씀을 그대로 대대로 보존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혼이란 말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겠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해 놓은 일이 뭐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눈에 보이는 건 없고 오직 하나님 성품 입히는 것뿐.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희들을 거룩한 자로,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실속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늘도 여러 존재와 사건과 환경들을 우리에게 주고, 또 지나가게 하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하루가 지나가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그 속에서 얼마나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나왔는지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생전에 어찌하던 바로 살다가 가는, 딴 것을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꼭 입고 가는 그러한 정신이 우리 속에 신앙 사상적으로 있게 해 주옵소서.

 

오늘날 많은 기독자들이 있지만, 또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기독자라도 세상 사는 것이 무목적적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저희들이 오늘 하루 지나는 가운데에 그저 무의미하게 무목적적으로 이 하루를 살고 나오지나 않았는지를 생각해서 하나님 앞에 옳게 바르게 성품을 입고 가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고스란히 받고 가는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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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32 잠언 어린이주일-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잠29:17  이정수 목사  2013-05-13 2518
9031 고린도전 정녕,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하여야 합니다(3) 고전13:1-13  이준엽 목사  2013-05-13 2095
9030 마태복음 정녕,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하여야 합니다(2) 마18:10  이준엽 목사  2013-05-13 1888
9029 창세기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하여야 합니다(1) 창1:26-28  이준엽 목사  2013-05-13 1967
9028 다니엘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단5:13-24  이정원 목사  2013-05-13 1946
9027 다니엘 살아계시는 하나님 단5:1-12  이정원 목사  2013-05-13 2559
9026 다니엘 회심을 위한 징계(2) 단4:18-37  이정원 목사  2013-05-13 1724
9025 다니엘 회심을 위한 징계 단4:1-17  이정원 목사  2013-05-13 1827
9024 다니엘 불 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단3:19-30  이정원 목사  2013-05-13 2335
9023 다니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3:1-18  이정원 목사  2013-05-13 2979
9022 출애굽기 믿음도 믿음 나름입니다 출1:1-7  김경형 목사  2013-05-13 1830
9021 누가복음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해야 할 이유 눅18:1-8  한태완 목사  2013-05-12 3719
9020 누가복음 구원얻을 자의 고백-(1)한쪽 강도의 고백 눅23:39-43  강종수 목사  2013-05-12 1798
9019 갈라디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 갈5:16-25  한태완 목사  2013-05-11 5043
» 출애굽기 신앙은 노선보다 계열이 더 중요합니다. 출1:1-7  김경형 목사  2013-05-10 1597
9017 로마서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 롬5:19  한태완 목사  2013-05-10 5576
9016 갈라디아 자아와 이기심을 버려라 갈2:20  한태완 목사  2013-05-09 2451
9015 요한계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자 계6:1-17  최장환 목사  2013-05-08 3291
9014 고린도후 영적 사자로 살아가자 고후4:1-18  최장환 목사  2013-05-08 3259
9013 요한계시 새 하늘과 새 땅 계21:1-6  정용섭 목사  2013-05-07 2256
9012 요한복음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10:22-30  정용섭 목사  2013-05-07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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