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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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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청년의 마음으로 일어나십시오 (눅 7:11-17)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이 너무 나쁩니다. 남북은 첨예하게 대치중입니다. 게다가 교회는 제 구실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문제가 많다는 싸인을 하나님이 계속 보내는데 사람들은 주의하지 않습니다. 예전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늑대가 나타났다!”는 하도 위협을 해서 사람들의 귀가 경고의 말씀에 무뎌진 것입니다.
일전에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한 한 목사님이 돌아가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3주간 한국에 있어보니까 한국에 학사 에스라의 역사가 시급함을 느꼈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서 학사 에스라가 성경을 펴자 모든 백성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일어섰고 하나님을 찬양하자 백성들이 손들고 “아멘! 아멘!” 하고 화답했습니다. 또한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주자 백성들이 다 울었습니다. 그처럼 말씀을 감격하며 듣는 역사가 일어나야 영혼도 소생하고 비전도 소생하고 결국은 환경도 소생할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감격적으로 잘 들립니까? 죽은 사람에게 잘 들립니다. 죽은 사람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곧 응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응답을 원하면 자기를 잘 죽이십시오. 결국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어려워지고 인간관계에 상처가 큽니까? 죽지도 않고 말씀도 간절하게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간절하게 들으라고 간혹 죽음 같은 고통의 과정을 허락합니다.
어느 날, 미국 뉴저지에서 목회하는 한 목회자에게 그가 제일 사랑하고 정성껏 양육했던 성도가 종이에 ‘목사님의 단점’이란 제목으로 12가지를 죽 적고 찾아와서 하나씩 지적하며 말했습니다. 그 열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인간적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을 12가지나 듣고 그 목사님은 그 후 얼마간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성도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깊이 감사했습니다.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 좋아서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갈등 얘기가 나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위안이 됩니까? 초대교회가 완전했다는 그릇된 생각을 지워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 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만 초대교회 때도 어려운 문제와 갈등은 있었습니다.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지 말고 사람을 너무 믿지도 마십시오. 신실한 사람이 가끔 실수하는 것이 사람을 너무 믿어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것입니다. 코로 숨 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믿어줄 대상’일 뿐입니다. 왜 성도들 간에 돈을 빌려주지도 말고 빌리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돈 거래는 반드시 본의 아닌 시험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어주되 의존하는 믿음은 버리십시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은 될지언정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지금처럼 불신 사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죽어야 유난히 잘 들립니다. 교만한 삶은 패망의 선봉이지만 겸손한 죽음은 승리의 지름길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교회에 절대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보여준 감동적인 영상이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인 바울의 회심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십자가를 지고 죽는 길이 사는 길이고 결국 영광을 얻는 길입니다.
< 죽은 비전을 살리는 길 >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인 성 과부의 죽은 독자를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의 죽은 독자를 ‘죽은 비전’으로 대입시켜서 그 죽은 비전을 살리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비전을 살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는 삶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의 주 활동무대인 가버나움의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나인 성에 갔습니다(11절). 성문에 가까이 이를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났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한 과부의 죽은 독자를 메고 나왔습니다(12절). 당시 비참한 과부의 처지에서 마지막 소망이던 독자의 죽음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심을 주었겠습니까? 누가는 ‘독자’와 ‘과부’란 단어를 통해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잘 묘사합니다.
그때 많은 성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동참해서 그나마 작은 위안은 있었겠지만 그것으로 과부의 큰 슬픔을 달랠 수는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과부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동행이 무엇입니까? 너무 늦게 가지도 않고 너무 빨리 가지도 않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적당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적당히 하는 것을 ‘적당주의’란 딱지를 붙여 나쁘게 여기고 심지어는 죄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눈치 보며 자기 할 일을 외면하는 ‘게으르고 얍삽한 적당’은 나쁜 것이지만 한문의 뜻 그대로 ‘적절(適切)하고 합당(合當)한 적당(適當)’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가 침체되니까 부흥을 목표로 40일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 후유증으로 죽은 목회자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런 목회자에게 꼭 필요한 거의 진리와 같은 표어가 바로 “적당히 하라!”는 표어입니다. 금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기 비우기’인데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금식의 기본 목적까지 망각해 금식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는 ‘자기 채우기’가 되면 믿음도 잃고 건강도 잃고 심하면 죽습니다.
산을 오를 때 자기 수준에 비해 너무 가파른 산을 올라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약간 가파른 산을 올라가야 안전하고 경치도 즐기고 건강도 얻습니다. 큰 비전을 마음에 품고 있어도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예수님이나 베드로처럼 3년 만에 스타가 되겠다고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런 스타는 많이 나오지도 않고 자주 나오지도 않기에 너무 서두르면 동시에 낙심도 쉽게 찾아옵니다. 기다릴 줄 모르고 쓸 줄 모르고 쉴 줄 모르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친구도 생기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축복도 얻지 못하고 사랑과 행복도 얻지 못합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13년의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요셉도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작품인생을 만들고 인물이 되려면 적어도 13년은 기다리고 인내하고 준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13년을 기다리고 성공하는 ‘13년짜리 인생’도 있지만 때로는 모세처럼 40년을 기다리고 성공하는 ‘40년짜리 인생’도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치열함과 냉철함을 겸비하고 일과 쉼을 겸비하십시오. 또한 소낙비 은혜만 추구하지 마십시오. 비전을 살리고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오히려 이슬비 은혜입니다.
2. 율법을 넘어선 초월적 영성
예수님은 장례 행렬의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13절). 과부의 슬픔에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항상 그 밑바탕에는 동정과 연민이 있었습니다. 긍휼한 마음은 기적의 중요한 동인입니다. 어떤 자칭 능력자는 체육관 집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민 머리를 실로폰 채로 도레미파솔라시도 치듯이 손으로 장난처럼 툭툭 치면서 안수합니다. 거기서 참된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대개 믿음을 보고 기적을 베풀어주셨지만 때로는 본문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애틋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그냥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결국 본문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울지 말라.”는 말씀은 의례적이고 값싼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값싼 위로는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합니다. 값싼 위로를 줄 바에는 차라리 그냥 울게 놔두는 게 낫습니다. 깊은 슬픔을 당한 자에게 충고처럼 들리는 위로의 말을 너무 쉽게 하지 말고 먼저 깊은 공감의 감정을 가지고 말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십시오. 그런 조용한 사랑의 터치가 많은 말의 위로보다 더 중요합니다.
본문 14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그때 예수님은 죽은 청년의 관에 사랑의 터치를 하셨습니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레 22:4; 민 19:11).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율법을 초월해서 주저 없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 사랑의 터치로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여기며 긍휼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때 관을 메고 가던 이들이 예수님의 뜻밖의 행위에 놀라 걸음을 멈추자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 죽은 청년에게 마치 산 사람에게 하듯이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사례는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본문 외에 누가복음 8장에서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과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린 것입니다. 그 모든 사례에서 예수님은 본문처럼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여기고 말씀했습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세상과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초월적인 힘입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이 그런 초월적인 영성입니다. 결국 초월적인 영성이란 죽은 자에게 마치 산 것처럼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을 죽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잔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죽은 것을 보고 잔다고 하는 것도 바로 초월적인 영성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고 잔다고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처럼 ‘사실’과 ‘진리’ 사이의 갭으로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조롱하고 믿음을 조롱합니다. 상식과 사실대로 살면 핍박도 없고 유혹도 없지만 진리를 따라 살면 핍박도 많고 유혹도 많습니다. 그래도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초월적인 영성입니다. 왜 현대인에게 불안이 많습니까? 상식과 사실만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지식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와 진실을 따라 살 때 죽은 비전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3.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그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죽은 청년이 일어나 말하자 예수님은 그 청년을 과부에게 넘겨주셨습니다(15절). 그리고 그 청년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고 과부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당부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그 과부의 마음은 아들을 다시 찾고 자비하신 예수님을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중에 큰 선지자가 일어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면서 희열과 희망을 가졌습니다(16절). 그처럼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소식이 온 유대와 사방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했습니다(17절). 결국 본문을 통해 누가가 진짜 전하고 싶었던 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공동체는 영성을 강조하면서 각종 은사 중심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런 영성 추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는 대개 시간이 지나면 깨닫습니다. 무속인도 그런 영성(소문자 spirituality)이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침체를 막고 힘든 목회를 일으켜보겠다고 믿음보다 은사를 추구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영적인 자멸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활용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은사를 추구하면 오히려 자기의 본래 은사를 잃고 인생의 방향까지 잃습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은혜와 비전을 꾸준히 지속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고 영성의 핵심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추구하고 자기 사명을 따라 살면 자기 고유의 은사가 저절로 발현됩니다. 그런 자기 은사를 따라 사역하고 대 평안을 노래하며 사는 삶이 바로 참된 기독교 영성(대문자 Spirituality)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잘 믿고 마음은 평안해도 고난은 계속될 때가 많습니다. 야이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는데 가는 도중에 딸이 죽었다는 허탈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과 동행해도 어려움이 닥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계속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이번 총회에서 여러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도 대개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잘 믿어도 고난은 잘만 찾아옵니다. 치유된 것 같지만 얼마 후에 보면 치유된 것이 아니고 용서한 것 같지만 얼마 후에 보면 용서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산 것 같지만 얼마 후에 보면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점차 은사와 감정 중심적인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단순한 믿음뿐입니다. 이제 그저 믿기만 하십시오(Just believe).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합력하며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지난 20년 간 미국에서 참 어렵게 목회했습니다. 깊은 상처로 건강을 다 잃고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 보니까 얼굴이 밝았고 건강도 거의 회복했었습니다. 총회 폐회 전날 저녁에는 몇몇 목사님들을 불러 인근 레스토랑에 가서 한 턱 쐈습니다. 알고 보니까 딸이 하버드 의대에 간 것입니다. 그분뿐만 아니라 대부분 고생한 목사님들의 자녀들이 명문대를 나와 변호사와 의사 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성도의 헌신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힘써 선교하고 나누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나눔과 선교를 강조해서 자기 교회는 건축하지 못하고 외적인 부흥을 희생하며 고생했지만 하나님은 자녀의 축복을 통해 그 고생을 갚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그저 믿기만 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다시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말씀을 듣고 이 시간에 청년의 마음으로 일어나십시오.
< 청년의 마음으로 일어나십시오 >
요새 많은 현대인들의 처지를 보면 본문의 죽은 청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물질주의에 매몰되어 영혼과 정신이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나눔과 대접은 줄어들고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추구합니다. 남의 억울한 사정과 사회적인 공평에 대한 관심도 거의 뒷전입니다. 이때 더욱 나눌 줄 아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인물이 되십시오. 그래서 선교와 나눔을 향한 거룩한 큰손의 비전을 이루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십시오.
힘들면 부자에게 기대려는 마음이 생기지만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물질주의의 승자가 만든 게임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지 말고 자기 사명의 길을 당당하게 걸으십시오. 너무 세미나를 찾아다니지 말고 성공했다는 사람에 의해 자기 생체 리듬과 달란트에 맞지 않는 삶이 무언중에 강요되면 당당히 거부하십시오. 그래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습니다. 또한 그 길이 예수님의 비전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처럼 남의 은사와 남의 성공방법을 따르지 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자기 달란트와 사명에 맞는 삶을 개척해 나가십시오.
직장을 떠나게 되면 충격을 받지 말고 새로운 기회가 온 줄로 여기고 더 기도하고 더 나눔을 다짐하며 새롭게 청년의 마음으로 일어서십시오. 어려워도 “청년아! 일어나라!”란 예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나이가 많고 여건이 안 되어도 거룩한 나눔의 비전은 잃지 마십시오. 그처럼 다수의 죽음의 행렬에서 떠나 소수의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동참하면 조만간 반드시 새 날이 펼쳐질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 인생에 회의를 품고 스님이 되려고 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절 생활을 깊이 하자 불교계가 너무 썩은 것을 보고 더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불교대학을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땅을 매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실한 불자라던 사기꾼에게 속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간수에게 목탁과 불경을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간수가 불경 대신 성경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좋다! 기독교의 약점을 알려면 성경도 한번 읽어보자!”고 해서 성경을 죽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죽은 독자를 살리는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보자 옛날 불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불경에도 한 과부의 죽은 아들 얘기가 나옵니다. 그 죽은 아들을 안고 과부가 부처님께 살려달라고 하자 부처님은 아랫마을로 가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집의 물 한 사발을 아들에게 먹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랫마을로 갔는데 죽음을 맛보지 않은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실망해서 돌아오자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다! 사람은 다 죽는다.”
그 부처님의 말씀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예수님의 말씀이 오버랩 되면서 신기하게도 인생의 회의가 사라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는 곳마다 예수님만이 길임을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길이 많습니다. 때가 되면 막힌 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자체가 길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꼭 붙잡고 일어나 죽은 비전을 살려내고 내일의 찬란한 축복의 때를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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