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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2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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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변화의 기적이 나타날 때 (누가복음 9장 28-36절)
요새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만간 사람이 120살까지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인 삶의 질은 오히려 더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1970년대에는 성인과 청소년의 범죄 비율이 9:1이었는데 요즘은 청소년 범죄가 성인 범죄를 앞질렀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을 누가 변화시킵니까?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희가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덮어주는 인물들이 되게 하소서!”
성도는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도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적도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변화됩니까? 사람의 변화만큼은 이적과 기사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의 변화만큼은 헌금을 많이 하거나 봉사를 많이 해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어떤 성도는 최고로 봉사를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장로를 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5번 연속해서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봉사는 많이 하지만 변화된 삶이 없다고 성도들이 느낀 것입니다. 사실 주도권을 잡으려고 제일 많이 일하는 사람이 제일 안 변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면 상처와 혼란만 커집니다. 결국 성도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변화’입니다.
< 변화의 기적이 나타날 때 >
변화는 일종의 기적입니다. 그런 변화의 기적이 언제 나타납니까? 본문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을 통해 언제 변화의 기적이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에 집중할 때
어느 날,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28절). 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갔을까요?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왜 12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예수님과 가장 적극적으로 뜻과 삶을 같이 했던 제자들로서 그들만 데리고 기도하러 간 것도 역시 영적인 흐름을 일치시켜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졌습니다(29절). 이 장면은 기도에 집중할 때 변화가 이뤄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왜 기도합니까? 무엇인가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 자신이 변화되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되면 신기하게 환경도 변화된 것처럼 보이다가 때가 되면 진짜로 환경이 변화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2. 십자가에서 죽을 때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영광의 광채가 발산되고 갑자기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얘기했습니다(30절). 그런 영광스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31절). 이 구절에서 별세는 헬라어로 ‘엑소도스’로서 ‘탈출’을 뜻합니다. 즉 억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는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별세라는 암시가 있는 말씀입니다.
별세는 변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군말 없이 깨끗하게 죽어야 합니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말이 많으면 자기의 죽음을 알아달라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죽으려고 해보지만 안 됩니다.” 그 말 자체가 벌써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으려면 깨끗하게 죽어야지 ‘죽으려고 해본다는 것’ 자체가 죽으려고 폼만 잡은 셈이 됩니다.
또한 죽었다고 하면서 얼마 되지도 않아 “왜 변화가 없지?”라고 하는 것도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한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뜨거울 때보다 오히려 죽을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 전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자기 죽음을 고백할 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한인 목사님이 40대 때 한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개척 장로가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그 장로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많아서 목사님이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간혹 그 상황을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그러면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성도들도 상처를 받을 것이 염려되어 목사님은 자신을 죽이고 10년 동안 장로님을 최대한 섬겨드렸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까지 잘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목사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후 그 장로님은 목사님 말이라면 전폭적으로 따르는 목사님의 최대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얼마나 대견하게 보시겠습니까? 자기 죽음을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가면 그런 극적인 변화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3. 세상에서 빛을 발할 때
본문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제자들이 언제 보았습니까? 깊이 졸다가 언뜻 깨어서 보게 되었습니다(32절). 당시 예수님이 깊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깊이 졸았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모습입니까? 본문의 얘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다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만 세 제자들이 깊이 졸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누가는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로 그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모습입니까?
옛날 부흥사들은 예배시간이 졸면 ‘졸음마귀’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물론 상습적으로 졸면 안 되지만 가끔 예배 시간에 조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됩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예배 시간에 졸겠습니까?
분당에서 교회개척을 할 때 초창기에는 거의 매 주일 예배 때마다 말씀과 기도가 끝나면 여기저기서 성도들이 눈물을 흘려서 눈이 벌겋게 되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최선을 다해 말씀을 준비하면 기쁨과 감동과 눈물이 넘치는 예배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결국 말씀 시간에 성도가 조는 것에는 목회자의 책임도 큽니다. 또한 그렇게 졸지언정 예배 자리를 지키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고마운 마음까지 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고행하고 명상하고 금식하면서 그들의 경건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않고 깊이 졸다가 주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그처럼 외적으로 경건하게 보여야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기적은 자신이 잘 준비되어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이 변화의 기적을 체험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졸다가 찬란한 빛을 느끼고 깨보니까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모세와 엘리야’가 보였습니다. 그 환상적인 장면을 보고 베드로가 감격에 젖어 말했습니다(33절).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쓰시지요.” 자기도 자기 말의 뜻을 알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의식하고 하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고 정신없이 한 말이 참 말일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때 왜 베드로가 행복해했을까요? 무엇을 얻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격적인 체험을 하고 그가 한 말이 겨우 “초막 몇 개를 지어 산에서 살자!”는 말이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예수님이 산에서 초막 짓고 평화롭게 자연을 느끼며 살려고 세상에 오셨습니까?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천국이 싫증나서 다시 이 땅의 초막에서 살려고 나타났습니까?
물론 베드로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처음의 순수한 꿈과 열정은 사라지고 영혼은 상처투성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누구나 현실세계를 떠나 외딴 곳으로 정신적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자신의 변화도 멀어지고 세상의 변화도 멀어집니다. 성도는 어둔 세상으로 가서 문제와 부대끼며 살아야 자신도 변화시킬 수 있고 또한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제안을 할 때 왜 갑자기 구름이 와서 제자들을 덮었습니까? 마치 구름이 베드로가 더 이상 그런 말을 못하도록 막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비한 체험을 했으면 그 체험한 자리에 머물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서 빛을 발할 때 변화의 역사는 나타날 것입니다.
4. “오직 예수!”로 살 때
갑자기 나타난 구름에 의해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이끌릴 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절).” 무슨 의미일까요? 변화의 기적을 원하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기도도 아뢰는 기도는 많지만 듣는 기도는 적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말을 독점하면 사람도 침묵하고 환경도 침묵하고 하나님도 침묵합니다. 또한 말이 많아지면 자기 말에 사로잡혀서 말씀이 잘 안 들리게 되기에 자기를 내려놓고 말수를 조금 더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란 한 마디로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그처럼 말씀을 잘 듣고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자기도 변화되고 세상도 변화됩니다.
그 하늘의 소리가 그친 후에 보니까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36절). 그 말은 결국 신비한 체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란 뜻입니다. “오직 예수!”란 선언은 인생승리의 최대 비결이고 변화를 선도하는 최대의 열쇠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사건과 인물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려고 한 것은 “오직 예수!”이고, 자연과 역사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찾아야 할 최대 선언도 바로 “오직 예수!”입니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까? 조금 무식해도 그가 “오직 예수!”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제안도 자세히 보면 “오직 예수!”로 살려는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초막을 지으려면 최소한 네 개는 지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기거할 초막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막 셋만 짓자고 한 것은 “나는 어디서 살지?”란 생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자기 삶의 기초 터전조차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오직 예수!”의 삶입니다.
신앙의 핵심 내용은 “오직 예수!”여야 합니다. 성도가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는 것도 나눔의 사명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지 기본적으로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자신은 못 살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오직 예수!”로 행하기보다는 수많은 프로그램 속에서 오히려 예수님이 계실 틈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 교회성장 세미나 강사는 말합니다. “여러분! 교인들에게 숨 쉴 틈을 주지 말고 마구 뺑뺑이를 돌려야 문제도 없고 교회도 성장합니다!” 사명을 내세워 그렇게 마구 뺑뺑이를 돌리면 언제 예수님을 만납니까? 사명을 내세워 교인을 희생으로 도구로 삼아 자기 왕국을 키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스스로 일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고 스스로 하려는 일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그 길을 여십니다. 그처럼 먼저 내려놓는 훈련을 하면 일이 조금 늦어지는 것 같아도 최종 열매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인품과 신앙과 사회적인 위치를 볼 때 장로감인데 장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한 친한 목사님이 그분을 자기 교회 장로로 모시려다가 곧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장로라는 직분을 걸고 교회를 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장이 정체되니까 조급해하며 인위적인 여러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면 부작용이 커지고 더 힘들어집니다. 그저 “오직 예수!”의 신앙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야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의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정하신 때
본문 36절 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자신이 겪은 신비한 체험을 제자들이 얼마나 말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마음 문을 더 닫을 수도 있기에 제자들은 그 체험을 그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꾹 참았습니다. 그처럼 때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훈련을 늘 하십시오.
성도가 “오직 예수!”로 살아도 환경이 금방 변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상당히 많은 문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는 자신 때문에 생겨납니다. 기본적으로 성공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고통의 과정 중에도 하나님을 꼭 붙잡고 축복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이 세상에 고통의 과정 없이 선한 변화와 찬란한 축복이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부터 22년 전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귀국할 때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의 건강한 복음주의와 선교마인드를 전파하며 한국에서 많은 선교 중심적인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선교사들을 돕겠다는 찬란한 꿈을 가졌습니다. 그 꿈에 비해 지금 교회의 외형은 초라합니다. 주변의 큰 교회들을 보면 스스로 “이 목사야! 너는 그 동안 뭐했냐?”란 자책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믿음으로 스스로를 열심히 격려했습니다. “이 목사야! 이제 조만간 축복의 때가 올 것이다.”
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언뜻 좌절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있었습니다. 비전에 동참한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큰 위로가 되었고 온라인 말씀 사역을 통해 알게 된 비전 동역자를 통해서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한 온라인 새벽기도 평신도 회원 4천여 명과 목회자 회원 2천여 명이 사역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었고 현재까지 완성된 300페이지짜리 책 60권 분량의 <38세트의 설교파일>과 앞으로 선교와 나눔의 통로가 될 <네트영어>도 희망을 보게 하는 재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조만간 때가 되면 어디선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 찬란한 비전이 멋지게 성취될 것입니다.
<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
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고난이 있고 좌절감이 들고 자존심이 상하는 아픔을 당해도 결코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성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다 아픈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깊은 샘에서 맑은 물이 나오고 깊은 광산에서 귀한 보석이 나오듯이 고난이 깊으면 영성도 깊어지고 인생도 작품 인생이 됩니다.
벽을 장애물로 여기지 마십시오. 믿고 버티고 기다리다 보면 조만간 그 벽은 큰 문이 될 것입니다. 터널을 길어도 불평 마십시오. 그 터널이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많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몇 배의 기막힌 상처를 받으면서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이 너무 크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몇 배의 고통 속에서도 삶 자체가 감사해서 황홀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때는 고통의 극한 상황을 만납니다. 그때는 마치 하나님이 떠난 것 같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큰 고통과 상처는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정말 참기 힘듭니다. 열심히 살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상황은 더 나빠지면 얼마나 속상합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속상한 일은 내 길은 다 막히는데 나보다 못난 것 같은 사람이나 악한 사람의 길은 잘 열리는 것을 볼 때입니다. 남은 잘되는데 나만 안 되고 남은 건강한데 나만 아프고 남은 풀리는데 나만 묶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더욱 속상합니까?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상담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고난의 무게를 덜어줄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으로 절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처럼 극심한 고난과 상처 중에 살았던 사람도 10년쯤 후에 보면 멀쩡하게 살아 있고 그 중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할 수 있고 사람은 무능해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침묵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도 그냥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힘들면 그냥 힘들어하며 기다리십시오. 약의 성분을 잘 모르고 삼켜도 때가 되면 효험이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도 믿음으로 고난을 그냥 삼키면 가장 적절한 하나님의 때에 그 믿음의 효능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제 살면서 너무 불평하거나 미워하거나 항변하지 마십시오. 너무 지나친 기대도 하지 말고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도 마십시오. 너무 견디기 힘들면 말씀의 요를 깔고 보혈의 이불을 덮고 은혜의 베개를 베고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한숨 푹 주무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셨고 베드로가 감옥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급파해 베드로를 구원했습니다.
그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되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고 푹 쉬고 푹 주무십시오. 어차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다면 푹 쉬고 자면서 기다리십시오. 다만 믿음만은 잃지 마십시오. 기도할 기력조차 없으면 억지로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품안에서 잔다고 생각하고 푹 자십시오. 그러면 기도하는 언어로 공기의 파동은 못 일으켰어도 고통 중에 누워 내쉬는 성도의 숨소리까지 하나님은 무언의 기도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영성이란 잘 몰라도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나 고난의 끝을 잘 몰라도 병아리가 어미 닭을 쫓아가듯이 쓰든 달든 주어진 환경을 꿀꺽 삼키며 매일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찬란하게 변화된 세계에 도달하고 마침내 천국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이 큰 수건을 가지고 기쁨과 감격으로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그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세세토록 천국의 삶을 만끽하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비전이 이뤄질 때까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십시오. 분명한 것은 비전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고난이 결국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서 우리를 더욱 성숙한 성도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만 알아도 고난 중에 충분히 행복해하며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제 힘들어도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예배의 자리를 빠지지 말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고난의 겨울인가 했더니만 어느새 축복의 봄을 맞이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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