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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수도관상피정 박노열 목사............... 조회 수 4955 추천 수 0 2013.05.19 23:20:13
.........
출처 : 고려수도원 박노열 목사 <누구나 할 수 있는관상기도> 중에서 

제 1장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제1절 관상기도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contemplation은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는 테오리아로 데오레인에서 유래되었다. 데오레인은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라고 했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어 성서는 히브리어의 da'ath를 번역하면서 gnosis를 사용하였다.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전 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 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하였다. 사도요한은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하고, 요한서신에서 26번사용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미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것의 원뜻은 지식의 지적 시각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등으로 간주하였다. 이 기술적인 용어에다 교부들은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다. 이 theoria를 확대 이해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다.


1)구송기도

2)묵상기도

3)관상기도 또는 관상이 있다.

  이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이다.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 입술과 정신은 쉰다.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


  묵상기도가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관상기도는 이성적 사고 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관상기도를 묵상기도와 비교한다면,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묵상기도 대신에,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준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관상적 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 적관상이라고 한다.


1) 습득적 관상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2. 관상의 정의


1).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이란?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저서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은 천계의 일몰을 감상하는 유쾌한 신선놀이가 아니요. 끝임 없이 지저귀는 천상의 새소리도 아니다. 관상은 결코 강렬한 정서가 아니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우리네 감정을 통해 전달된 경우에 두려움에 젖고 겸손해지는가 하면 무아경에 빠져 들뜨기도 하고 위압당해서 어리벙벙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고 환희 밝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때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유는 실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발적인 영혼을 단단히 거머쥐어서 삶 전체를 형용할 수 없고 필요불가결한 자질로 가득 채우며, 그리하여 영혼은 자신의 참된 목적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느끼게 이른다.


  깨달음이란 언제나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향하듯이 향하는 이 ‘타자’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것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상에서 오는 황홀한 기쁨은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본성상 말로 묘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설령 이 기쁨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한다 하더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대체로 이 환희를 암시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2) 관상의 여러 가지 견해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고 밝혔다. 성 빅토르 리차드는 관상을 정의하기를 “지혜의 나타남에 대해 놀라움으로 정지된, 마음의 자유롭고 보다 통찰적인 응시”라고 한다. “관상은 지각된 사물 안으로 확장된 통찰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응시인 반면에, 명상은 사물에 대해서 열심히 추구하는 마음의 주목이며,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영혼의 주의 깊은 응시라고 했다.


  십자가의 요한이 정의하는 관상을 “하나님의 은밀하고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영감” 이라서 일단 정착을 하기만 한다면 영혼을 불살라 버린다. 관상에서 “하나님은 영혼을 정화시켜 죽 비추어 주면서 영혼의 능력과 필요성에 따라 사랑과 지혜를 부어 주신다.” 또한 관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혼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통교를 시작하는 높은 곳에 (영혼이) 놓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관상의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조차 은밀하고 감춰진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이란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 주시고 완성 시키시고자 우리 영혼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을 하시는 일” 이라고 한다. 토마스 키딩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를 구분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관상생활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이말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여러 기도 경험들을 한다고 해도, 그 열매는 관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관상기도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기도의 열매는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관상기도는 내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관계이며, 우리가 동의만 한다면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리차드 포스트는 관상기도를 “무언의 기도”라 했고,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또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 이라고 한다.


  유해룡은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을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서 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냉함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요, 정감적인 경험이요, 분석적인 경험이 아니라 직관적인 경험이다.


  권명수는 관상기도란 “우리가 하는 보통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지요. 그런데 관상기도는 정반대의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영혼 가운데 들어와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침묵중에 묵상기도하면서 깊은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가운데서 들어와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 즉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영원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을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는 말씀의 차원이지요. 주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시는 것, 그것이 곧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의 마음의 대화이며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명의 기도이고 믿음으로 받는 은총의 선물이다.


  관상기도란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없이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는 것인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지는 것이다. 평범한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극치이며, 다른 영성생활과 묵상과도 구별된다.


  묵상이 없으면, 관상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활동이 되지 못하며, 신앙의 체계와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초월명상과 더 가까우며, 영적 실재에 대한 의식의 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지적 감정적인 삶과 관계를 갖지 못한다.


  토머스 키딩은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다.” 라고 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이 말씀을 듣는다.” 라고 했다.


  은둔자 테오판은 “관상의 상태란, 정신과 시각이 지극히 압도적인 영적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사로잡혀, 표면적인 일을 완전히 망각하며,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상태이다. 정신과 의식이 관상하는 대상 안에 완전히 몰입되므로, 의식이나 정신이 전혀 없는 것처럼 된다”고 말한다. 테오판은 이 관상의 상태를 ‘몰아의 기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견해들을 정리해보면, 관상은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 중심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기도자가 성령에 완전히 몰입되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 어린 정신집중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등이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사랑의 집중기도 또는 단순한 관심의 기도‘라 할 것이다.


3. 관상 기도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과 그분이 중단 없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 데에 바탕을 둔다.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그렇지만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는 용어는, 우리 자신의 성찰에 따른 중재나 우리 의지의 행위 없이,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뜻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전통적이 용어가 관상이다.


 우리는 관상기도를 관상생활과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생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른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기도란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기도 속에서 생각들이 끼어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라기보다는 사고로부터 이탈이다. 그것은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정서와 같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적 몸과 정서를,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너머로 가는 것이다.


 볼티모어 교리서에 보면 “기도는 마음과 가슴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것” 이다.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들어 올리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도에서는 우리는 그저 들어 올리는 움직임에 우리를 맡겨 드리고 모슨 성찰을 떨쳐 버린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내적 행위를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수련은 성령께서 인도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함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자기 부정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 자격이 없다.”(막 8:34)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부정은 우리가 자신의 지력과 의지의 기능에 의존하는 습관으로부터의 결별도 뜻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중에 일어나는 평범한 생각은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께로 가는 데에 필수라고 여겼던 깊은 성찰과 영감조차도 떨쳐버릴 것을 요구한다.


2). 관상기도는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관상기도는 전략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관상기도의 첫 번째 효과는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의 방출이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다른 심리 상태를 유발하는데 그 하나는 영적 위안, 성령 은사, 심령 능력에서 오는 개인의 발전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서(자아 지식)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부터 오는 인간적 약함의 경험이다.


  만일 영적 위안이나 발전을 체험하게 되면 자만심으로 들뜨게 되며, 만일 영적으로 피폐한 자신을 깨달아 처참함을 느끼게 되면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절망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습관적 생각과 욕망의 속박에서부터 독립할수록 우리는 더욱 고요한 마음으로 관상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


3) 이탈은 자기 부정의 목표이다.


4) 예수의 신성이 관상의 원천이다.

  그분은 신성한 체험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공허의 체험으로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각도 단지 그분의 현존의 섬광을 지각할 분이며 결코 그분 자신을 지각할 수는 없다.


5) 성령은 성서와 일상생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 양심에 말씀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참 자아인 깊은 원천에서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관상기도들 속에는 다 같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게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열어 주는 개방성이 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이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의 실체이다. 관상적 기도가 성령과 그분의 행동과 그 분의 은총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한 우리 영의 정화와 치유로 우리를 남김없이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영적’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관상기도를 성령기도라 부르고, 성령기도를 관상기도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요 14:16),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를 정말로 앞으로, 위로 이끌어 주는 것은 성령의 숨결이다.


4. 마음의 기도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에게로 모아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시며 사랑해 주시도록 할 수가 있다.


1). 마음의 기도는 “아바” 기도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부르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서의 놀라운 변화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친밀감을 체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체험하셨다.


2). 우리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하시는 기도

  마음의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가 그것이다. 마음의 기도를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계속하게 하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3). 마음기도의 다양한 표현

  특별계시의 느낌과 말씀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종종 ‘레마’라고 부른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된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이 이끌리게 된다.


 ⑴ “방언”은 마음의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⑵ “입신”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는 체험으로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는 것이다. 영혼의 기도는 그 시간 계속해서 진행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이 영과 통하는 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⑶ “거룩한 웃음” 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환희의 웃음이 퍼져 나올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저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슬픔과 애통함이 은혜를 받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마음의 기도가 오직 무아경의 상태에서만 일어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

 ⑷ 사랑의 반응 “주님, 마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기도하는 어떤 고상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세요. 인간이 꾸며 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을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기도하다가 잠이 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면 하나님께 삼사하라‘고 말했다.


 초청하여 당신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드러내어 달라고 요청하라.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 앞으로 다시 인도할 것이다. “주님, 주님의 능력으로 저를 깨뜨리고, 때리고, 태워서 새롭게 하여 주소서.” 분명히 이것은 강력한 기도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도이다.


제2절 관상이 아닌 것


1. 관상은 긴장 해소 훈련이 아니라는 것이다.

2. 관상기도가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3. 관상기도는 초감각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 심리현상이 아니다.

4. 관상은 신비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3절 무지의 구름과 관상


  14세기 말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에서는 집중기도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하며, 그 기도의 기초를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안에 둔다.


1. 간단한 단어 사용과 이탈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기도하는 동안에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생각, 모든 개념, 모든 심상을 “망각의 구름” 밑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기도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쳤었고, 그 방법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기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된 방법론을 알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은 관습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을 대한다. 저자는 독자들의사고방식이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워크샵이나 개인적인 발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2). 자아의 상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의식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대답하려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만일 의도가 호기심, 또는 하나님안에 쉬는 것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최종결과는 진정한 관상이 아니라 모조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도가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생겨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요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참된 관상이다. 우리는 어떤 메시지나 사랑이나 개념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3). 그리스도의 위치

  세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위치이다. 여행하는 도중에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지의 구름』에서 유익한 예를 들어보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이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움직이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으로 예수를 의지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과 소음을 무시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에 개의치 않았다. 마리아는 마르다를 제어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있는동안에 마르다의 비방에 전혀개의치 않았다.


4). 사랑의 우월성

  관상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치유를 행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관상기도는 죄의 근원을 제거하며, 보다 깊은 치유의 과정을 시작한다. 우리는 병의 근원을 그대로 둔채 증상들만 다루면서 표면적인 일에 평생을 보낼 수 있다. 그것은 잔디밭에서 잡초를 뿌리채 제거하는 것과 잔디를 깎아 주는 것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비유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뿌리채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하신 정원사가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5). 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것

 ⑴ 관상은 긴장 해소 운동이 아니다.

 ⑵ 관상은 카리스마적 은사가 아니다.

 ⑶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니다.

 ⑷ 관상은 초심리학의 현상이 아니다.

 ⑸ 관상은 “영적 황홀경”이 아니다.

 ⑹ 관상은 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실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⑺ 관상은 덕이나 탁월함에 대해 주어지는 진기한 상이 아니다.

 ⑻ 관상은 우리가 관상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나 승인의 표식이

 아니다.

 ⑼ 관상은 영성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호화로운 대안이 아니다.

 ⑽ 관상은 어떤 공허함 속에 합병되는 것이 아니다.

 ⑾ 관상은 물 한 방울이 하나님의 존재의 바다에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이 와해되는 것이 아니다.

 ⑿ 관상은 변화된 의식 상태를 소유하기 위해서 영을 몸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 아니다

 ⒀ 관상은 고차원의 의식이 아니다

 ⒁ 관상은 고통이나 욕구의 부재가 아니다.

 ⒂ 관상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

 ⒃ 관상은 하나님을 닳은 선한 상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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