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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한 산새 울음소리에 정신이 반짝 들었어.
"삐비빙뾰롱뾰롱뾰로롱."
귀를 씻는 참 맑은 소리였어.
나는 갈 곳이 없어졌어. 버려질 운명이었지. 눈에 띠는 빨간 옷을 입었지만 사실 난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너의 마음에서….
혹시 '어린왕자'를 읽어봤니?
'가령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지는 거야. 네 시가 되면 벌써 나는 마음이 두근거리고 안달이 날거야. 행복의 값어치를 배우게 되는 거야.'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사막여우가 한 말이잖아. 너도 누군가에게 쓴 편지를 나에게 넣고 손꼽아 날짜를 헤아리며 답장을 기다려본 적이 있니?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을 이해할 거야.
맞아, 나는 우체통이야. 하지만 내 이마에 써진 글씨를 좀 볼래?
'우편함'
우체통이나 우편함이나 그게 그거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너,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구나? 하긴, 밤새워 그리움을 키워본 적이 없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은 숲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란다. 내 뒤로 보이는 이 집, 참 아담하지? 이 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폐기물처리장으로 실려 가던 차에서 떨어져 길바닥에 뒹굴고 있던 나를 말이야.
할아버지는 꽉 잠긴 내 배를 연장으로 열고 내 속을 들여다보았어. 몹시 부끄러웠지. 내 속엔 편지 대신 아이스크림 막대, 담배꽁초, 구겨진 깡통 따위만 잔뜩 들어있었거든. 할아버지는 쓰레기들을 꺼내고 내 뱃속을 깨끗이 씻겨주었어. 난생 처음 해보는 목욕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지. 난 그렇게 자목련 나무 옆 울타리에 걸리게 된 거란다.
내가 반듯하게 걸린 걸 확인한 할아버지는 굵은 펜을 들고 나왔어. 그리고 내 이마에 글씨를 써버린 거야. '우편함'이라고. 설마, 이렇게 한적한 산책길 옆에 있는 나에게 누가 편지를 넣겠니? 내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담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걸?
난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우체통이야. 그런 내가 할아버지의 개인 우편함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쉬웠겠니? 그래도 할아버지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웠지. 우체통이나 우편함이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어. 또 어쩌면 할아버지가 애타게 기다리는 편지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산책을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오솔길 따라 자주 숲에 올라갔어. 난 집을 지키느라 낮잠을 잘 새도 없었지. 마당에 늘어져있는 저 덩치 큰 개는 뭐했냐고? 말도 마, 장군이 저 녀석은 걸핏하면 졸고만 있거든.
내가 우편함이 된 뒤로 할아버지에게 온 우편물들이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대부분 전단지나 돈을 내라는 청구서들이었지. 난 크게 숨을 들이켜 보았어. 오랜 기다림에 굶주렸잖아. 하지만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더라. 추운 겨울날, 어떤 개구쟁이가 내 안에 눈 뭉치를 집어넣은 것처럼 속이 시릴 뿐이었어.
사람들이 밤새워 썼던 사랑, 희망, 외로움, 그리움… 벅차고 애잔했던 이런 감정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자목련 꽃잎도 다 떨어진 봄의 끄트머리였어. 눈길 가는 곳마다 아지랑이만 어룽대는 따분한 날이었지. 장군이의 졸음에 전염된 것처럼 나도 모르게 깜박 졸고 있었단다.
"찌징찡찡찡."
청아한 산새 울음소리에 정신이 반짝 들었어.
"삐비빙뾰롱뾰롱뾰로롱."
귀를 씻는 참 맑은 소리였어.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지. 바로 건너편 왕벚나무 가지 위였어. 작은 딱새 두 마리가 꽁지를 까딱이며 나를 보고 있지 뭐겠니?
포르릉, 암컷이 편지투입구를 통해 먼저 내 뱃속으로 날아 들어왔어. 경계하듯 바라보고 있던 수컷도 내려앉았지. 딱새 부부는 종종종 뛰며 나를 살폈어. 세상에, 짐작이나 했겠니? 그들이 곧 내 안에 둥지를 틀 거라는 걸?
딱새 부부는 부지런히 풀잎을 물어오기 시작했어. 오솔길까지 날아가 뭉쳐 뒹굴고 있는 장군이의 털도 물어다 날랐고. 마침 장군이가 털갈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거든.
딱새 부부가 어찌나 부지런한지 둥지는 금세 모양새를 잡았어. 오목한 접시 같은 둥지가 완성 될 즈음 난 퍼뜩 깨달았어. 귀여운 딱새 부부에게 홀려 내가 우편함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그제야 우체부 아저씨가 청구서, 홍보물 따위를 내 안에 던져 넣고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딱새 부부는 내가 버려진 우체통인지 우편함인지 알 리가 없잖아?
아, 이걸 어쩌나! 내가 조바심을 내는 줄도 모르고 딱새 부부는 둥지를 완성한 기쁨의 노래를 불러댔어. 술래잡기라도 하듯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다니며 한참을 지저귀고 있었지.
그 소리가 마당에 있던 장군이의 귀에도 들렸나봐. 꼼짝 않던 장군이가 느릿느릿 밖으로 나오더라. 사랑을 나누며 가지를 옮겨 다니던 딱새 부부는 장군이 눈에 띠고 말았어.
얄미운 녀석. 꼼짝도 않고 졸기만 하더니 하필 그때 나와 시끄럽게 짖어댈 게 뭐겠니? 졸지 말고 집 지키랬지 누가 손님 쫓으라고 했냐고. 딱새 부부가 둥지를 버리고 날아가 버릴까봐 나는 정말 애가 탔어. 그런데도 장군이는 내 속도 모르고 계속 짖어대더라니까.
때마침 숲에 갔던 할아버지가 돌아왔어. 그제서야 장군이는 꼬리를 흔들며 조용해졌지.
"삐삐삐뾰롱뾰롱뾰로롱."
그때 왕벚나무 가지에 앉은 딱새 부부가 이중창을 시작했어.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얼른 소리 나는 곳을 찾아냈지.
"오, 딱새로구나?"
날마다 숲에 오르더니 새들의 말을 깨우치기라도 했을까? 딱새의 노래를 알아들은 것처럼 할아버지는 내 배를 열었어. 둥지를 발견하자마자 역시나,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지. 어린 손녀딸이라도 보는 듯 할아버지는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단다.
"허허, 네가 딱새 엄마가 되겠구나!"
우편함이라 할 땐 언제고 이젠 딱새 엄마라니?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그 말에 왜 내 가슴이 뛰기 시작한 걸까?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어. 나를 대신할 노란 천주머니였지. 할아버지는 우편물 주머니를 자목련 가지에 걸었어. 그리고 내겐 '딱새 엄마'라는 새 이름표를 달아주었단다.
"이렇게 하면 딱새 가족이 우편물 벼락을 맞지 않을 게다."
할아버지 덕분에 비로소 난 한시름을 놓았어.
딱새 엄마. 딱새엄마가 된 우체통… 근사하지 않니?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아기 새들을 키워낼 꿈에 젖어들었단다.
며칠 뒤, 내 이름표와 노란 주머니를 확인한 우체부 아저씨는 쿡 웃음을 터트렸어. 하지만 아저씨도 나에게 일어난 일이 궁금했겠지. 살며시 내 배에 귀를 갖다 대더라니까? 엄마 뱃속의 아기 심장소리를 듣고 싶은 아빠처럼 말이야.
너, 바쁜 일이 있는 거구나? 아까부터 네가 자꾸 시간을 확인하는 걸 봤거든. 사람들은 늘 시간과 싸우고 시간에 쫓겨 살지. 괜찮아, 어서 가렴. 나도 얘길 오래 했더니 목이 아프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모금 마시며 쉬어야겠어.
알은 잘 깨어났냐고? 당연하지. 저 먼저 먹이를 먹겠다고 아우성치던 귀여운 아기 새들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그래. 아기 새들은 둥지를 떠났고 난 또 이렇게 혼자가 되었어. 내 이마에 써진 할아버지의 '우편함'으로 돌아온 거야.
문득 오래 전 누군가가 내 안에 넣은 편지 글귀가 생각나는구나.
'세상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멋진 말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잖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그래도 난 누가 뭐래도 우체통, 가슴 뛰는 우체통이야. 언제라도 좋아. 천천히 걷고 싶은 날, 네 안의 너와 얘기하고 싶은 날, 나를 만나러 와 주겠니? 널 기다리는 동안 난 어린왕자의 사막여우처럼 행복해질 거야. 두근두근,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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