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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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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14절.
1절-7절: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 인이었더라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심에 있어서 자기를 특수 목적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지음을 받은 자기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날 때부터 인간 자기는 기본권이 특수하고 기본성이 특수하고, 전부 특수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특수적인 궁극적 목적 하에 있는 나는 다른 여러 피조물들 중에 특수하기 때문에 특수하다 라는 의미보다는 애시 당초 인간 자기는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면 이걸 전제해 놓고 볼 때에 너나 나나 다 지옥 갈 우리들인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가게 된 겁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나는 지옥 갈 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 하는 것과, 그 다음에 ‘애시 당초 나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에 궁극적으로 제 1 목적물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지음을 받은 나다’ 하는 것과 어떻게 들립니까?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느껴집니까? 어느 쪽이 진하고, 어느 쪽이 약한 듯이 느껴집니까? 그리고 어느 쪽이 근본적으로 느껴지느냐 그 말이요. 여러분들, 그걸 잘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혹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그게 다 설교고 전도고 강론이거든요. 그럴 때에 이제 말씀드린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듣는 사람이 그 심령에 박히는 그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쪽이 더 강하게 느껴지느냐 그 말이요. ‘지옥 갈 나를 천국으로 올렸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지옥 갈 나를 천국으로 올려주었다’ 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성 애정성보다는 사역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에 나는 제 1 목적물로 지음을 받았다’ 했을 때 이거는 아주 근본적으로 바탕적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더 강하지요. 하나님과의 애정젹 인격적 관계성이 더 진하게 우러나오지요. ‘지옥에서 천당’ 하는 여기에는 사역성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고맙고 감사하고, ‘그 은혜를 갚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사역 쪽의 마음이 움직이기 쉽지요. 거기에서 자기 신앙의 인격성이 형성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연구를 하고 설교를 해도 근원적인 면으로서 들어가애 돼요. 사역적으로 논하면서 자꾸 펼쳐나가면 구속사역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애정성의 결핍이 나와요.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타락을 시키지 않았고, 신앙적으로 타락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신앙정신이 그렇단 말이요. 요셉의 마음속에는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 중에 애굽에서 살더라도 하나님의 선민을 타락시키지 않겠다’ 하는 히브리인의 혼이 살아 있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정신이요, 이것이 요셉이 애굽에서 가르치는 신학교입니다. 요셉의 교훈이 신학교고, 그 혼이 담겼단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들이 대부분 보면 공명심 허영심 허욕심, 자기 출세 길, 줄 탈 곳을 찾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영’ 하면 영은 영이지요. 이건 ‘육이냐, 영이냐’ 하고 갈라붙일 때의 얘기고, ‘혼이다’ 할 때는 정신적인 면에 강조를 두는 겁니다. 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께서 교역자에게 교인을 맡기실 때에 교역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리고 나를 교회로 보내실 때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하라고 나를 교회에 보냈는가? 그런 것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지요. 교회에서는 선민의식, 하나님의 택한 선민의 사상 이런 걸 불어넣어주고, 우리는 그 정신으로 커가야 된다 그 말이요. 딴 것은 못하더라도 그 정신만큼은 박혀지고 그 정신은 자라가야 된다.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백성들의 풍속 습관에 감염이 되지 아니하도록 가르쳤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걸어갔고. 오늘날 교회에 애굽성이 상당히 많지요? 종교적인 애굽, 또 정치적인 애굽. 기독교를 등에 업고 국회에 출마하는 정치적인 애굽, 부자를 목적해서 살고자 하는 경제적인 애굽, 자기 이름을 크게 나타내려고 하는 명예적인 애굽, 세상박사를 욕심을 내는 학문적인 애굽, 목사보다도 박사를 더 욕심내는 종교적인 애굽. 이게 다 애굽성이란 말이요. 우리는 그런 애굽을 부러워하지 말고 영적 실력을 배양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 아브라함의 집에서 종 엘리에셀이 실력배양을 시켜나가니까 주인 아브라함이 그 엘리에셀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지요. 심지어 자기의 며느리를 고르는 것까지 엘리에셀 종에게 다 맡겼습니다. 참 충성된 종이지요? 어떤 면에 충성입니까? 단순히 일 잘 하는 그 면에 충성입니까, 겉으로 보면 일은 잘 하는 건데 그 일을 잘 한다고 하는 그 성분이 주인 아브라함을 닮는 면에 충성이라 그 말입니까? 소 이스라엘이 대 애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430년을 지났을 때에 요셉과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지만 그 400여 년 동안 그들 속에는 요셉의 신앙정신이 살아 있고, 요셉의 사상이 그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요셉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라는 긍지가 이스라엘 속에 살아서 숨 쉬고 있다. 멋있지 않아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나는 죽어도 내가 가졌던 참 옳은 신앙의 정신이 후대 후대 후대로 살아서 역사하고 숨 쉬고 있어야 하겠는데 오늘날 기독자들 속에 그런 면이 참 보기 힘들지요? 그냥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다 그냥 죽는 거. ‘우리 부모가 예수 믿었단다. 죽을 때 날 보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더라. 나도 예수 믿고 부모님을 천국에서 만나야지’ 하고 그저 습관화 되어 교회에 왔다가 가고 한다면 그 어디 쓰겠어요? 우리는 그런 종교인을 원하지를 않지요. 430년이 지난 후에도 하늘의 신령한 것, 하나님의 것으로 단일성으로 통일시키는 거, 땅의 것과 하늘의 것으로 통일시키는 거. 그 정신이 살아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멋있어요. 이스라엘이 커지고 굵어지고. 어떻게 커져 나가느냐? 천국사상으로 커져 나가고, 천국실력으로 커져나가고. 이스라엘의 커짐이 어떤 성질의 것으로 커지느냐? 앞으로 가면 갈수록 꺾어질 것으로 커지느냐, 아니면 영원적인 것으로 커지느냐? 이게 중요하단 말이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자들이 그런 눈을 가지고 봅니까? 부피적 숫자적 덩어리가 커지면 ‘와’ 그러지. 무엇으로 커지느냐? 그 성분이 문제란 말이요. 사람이 커졌다 할 때 무엇으로 커졌느냐? 그게 문제란 말이지요. 그리고 오늘날 자기는 무엇으로 커지기를 원하고 있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는 이 애굽에서 순수한 이스라엘로 키워가야 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그런 면에 느껴집니까? 저는 상당히 강하게 느낍니다. 교인 하나 들어오면 그 속의 애굽성을 자꾸 잘라줘야 돼요. 세상의 가지를 자꾸 잘라줘야지요. 그게 있는 채 커져놓으면 교회는 어지러워요. 나중에는 수습이 안 되고 잡지를 못해요. 뿔이 나는 거 잘라야 되고, 속에 이리가 있으면 잡아내야 되고, 염소가 있으면 잡아내야 되고. 순수하게 자라면서 이 순수한 자가 나가서 전도를 해서 데리고 오고, 오는 그 자도 순수성으로 자라나가야 되고. 안 그러면 신앙운동이 안 돼. 생명운동이 안 돼요.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지요? 다른 사람보고 ‘이거 안 하나, 저거 안 하나?’ 절대로 그러지 말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같이 짐을 질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게 은혜스럽고 덕스럽고 자기 신앙이 자라가고, 사랑 받고 그렇습니다. 8절-14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이 세상이란 세상은 우리의 영존처도 아니요, 우리의 보금자리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도덕상으로나 윤리상으로 지은 그 죄만 죄인 줄을 알지만 우리 기독자는 목적이 이탈된 거, 혹은 자기를 무시하는 그것도 죄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목적을 잃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불행이요 손해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종류의 많은 죄를 지었던 간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으로 면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인자를 거역한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스린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까 죄 사함을 받고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란 말이요. 이 무슨 뜻이지요? 우리가 그 면에서 성분적으로 깨달아 나가야 합니다. 성령을 거스린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 것은 예수를 믿고도 천국을 갈 수가 없다. 즉, 지옥에 간다는 말보다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런 때가 있지요? 우리가 물론 기본적 법적으로는 생명책에 올려져 있고 하나님의 자녀인데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말하기를 ‘아이고, 내가 이렇게 죄를 지어놓고 어떻게 천국 가기를 바랄까?’ 그런 거 없습니까? 있지요? 이건 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 것처럼 성령을 거역한 죄는 사함받지 못한다는 말은 존재적으로 예수를 믿어도 천국을 못 간단 말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을 거역한 그 부분 그 성분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아도취요 악령의 감화에 의해서 어떤 기이한 일을 하고 자기가 성령을 받아서 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주의자들은 자기가 성령의 은혜를 받은 거처럼 생각을 하고, 또 남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악령 이놈은 또 그 사람 속에서 자기가 성령인 것처럼 뻣대고 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은 자기가 성령 훼방 죄를 짓고도 모르고 있다 그 말이요. 여러분들, 이런 걸 각자가 경험할 겁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다 깨달을 수는 없는 거요. 깨달은 자는 깨닫고 못 깨달은 자는 못 깨닫는 건데, 특히 우리의 경우 진리지식에 관한 말을 하면 이에 대해 지식적인 분별력은 갖고 있고 또 말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적으로 체험을 못한 자는 어떻게 말로 하겠어요? 체험한 자기는 느낌적으로 인격적 결합적으로 느끼지요. 그러나 모르면 모른다. 아는 자밖에는 모른다. 성경에 그런 말씀도 있고. 한 예를 든다면 여자가 아기를 낳은 그 고통을 남자들에게 아무리 얘기를 해 줘 봐야 남자로서는 ‘아프다’ 하는 그걸 자기가 병이 났을 때의 그 아픔을 연상을 하면서 여자들이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을 상상을 하거든. 그러나 아이를 낳는 고통이 남자가 연상한 그 아픔이냐 하면 아닐 거란 말이요. 여자의 입장에서는 그 아픔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거지만 속에서 체험적으로 된 고통은 전달이 안 돼요.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도 그거와 같습니다. 인격적 결합적으로 되는 그 체험, 이건 주님과의 만남이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연애라고 그럴까? 그 사랑의 체험, 그 처음사랑의 체험이 있어야 돼요. 이게 있어야 주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과거의 주님과의 그 경험을 또 하려는 그게 있기 때문에 돌아오는 게 빨라요. 이것도 하나의 예입니다마는 신비주의자들이 자기가 기도하고 음성 듣고 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정도로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의 그 황홀한 그 광경, 그런 것을 자꾸 맛보려고 그러거든요. 뭔가 목이 컬컬하면 자꾸 그런 때를 연상을 하면서 그 맛을 보려고 그러지요. 이들은 그런 것을 처음사랑인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 맛을 또 보려고 그런단 말이요. 이 신비주의자들이 옳다는 것보다도 자기만 아는 그 맛이 있는 거지요. 엄격히 따져보면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은 전부가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성령 거역 죄를 알아보기가 참 힘들지요? 알아보기 힘들잖아요? 그러면 성령 거역 죄는 뭐냐 하면 첫째는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를 내가 거역하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언제 성령이 나한테 왔느냐 그 말이지. 그렇지 않아요? 성령이 언제 자기에게 왔어요? 성령님이 자기한테 뭐라고 말을 했기에 자기가 그걸 거역을 했느냐 그 말이지. 사건 환경 사람 등을 통해서 성령님의 권고가 오고 역사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려고 하시는데 나는 그걸 거역을 했단 말이요. 안 깨달으려고 하고 대립성을 일으키고 그랬단 말이요. 그게 성령 거역 죄란 말이요. 이렇게 되면 그 사건으로 통해서 오는 그 쾌감성은 맛보지를 못해요. 그 승리감의 희열의 맛을 못 본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게 성령 거역 죄라. 우리가 이런 면을 자세히 생각지를 못하고 해석을 못하게 되면 그냥 쉽게 성령 훼방 죄에 걸려들어 버려요. 이렇게 되면 자기는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노상 성령을 거역하고 있단 말이지.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헌 옷 입고 새 옷 입자. 핫바지 벗고 양복 입어라. 의의 옷을 입자’ 하시는데 나는 안 입으려고 그런단 말이요. 그런 사건 환경이 왔을 때 발가벗은 자기를 의식할 수 있습니까? 발가벗은 자처럼 나타난 자기를 의식할 수 있지요? 하나님 앞에 곰곰이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참 원통하단 말이요. 그렇지? 이게 우리의 일이지요. 그러니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 기도의 응답은 다 있습니다. 우리 인간 속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성품이 들어있어요. 많이 들어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지 간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대형으로 다 사함을 받았고, 또 당신의 피로써 우리의 죄의 대가를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공심판은 안 받지요? 그러나 인간치고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성령을 거역 안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영이 중생하기 전에는 말로 인자를 거역한 죄가 있고요. 저는 고향에 있을 때에 장로교는 아닌 것 같아. 2층을 얻어서 하는 교회인데 내가 국민학고 4, 5 학년 때인데 ‘예수 사랑하심은’ 그게 나오더라고. 그걸 듣고 내가 한다는 말이 ‘예수 사랑하려고 예배당에 갔더니 신발 훔쳐 가더라’ 그러며 쓱 지나갔어. 그게 무슨 죄를 짓는 건지 몰랐단 말이요. 그리고 누가 나에게 권고를 해도 현재 내가 딴 사람을 권고를 하면 팽팽 튕기듯이 그 때 내가 그랬어. 성령 거역 죄는 영이 중생 후에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내가 성령 거역 죄를 지어도 1차 구속은 무효화 되지는 않습니다. 완전 대행이라 그 말이요. 성령 거역 죄는 어떤 시간에 ‘네 구원을 이루자. 신의 성품을 감염시키자. 실력배양을 하자’ 하고 개개인에게 사건적으로 와서 성령이 감화를 한단 말이요. 그럴 때에 내가 그걸 무시하고 나 좋은 대로 나갈 때 그게 성령 거역 죄란 말이요. 나 만들어지라고 주는 사건 환경에서 그 일을 하지 않거나 그 일에 게으름을 피고 있으면 이게 성령 거역 죄인데 이건 공심판이 아닌 사심판에 해당이 되는 죄입니다. 이 사심판은 시간적으로 한 번 지나가면 그 후에 그것을 보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1차 구속에서 중생된 내 영과 함께 항상 내주해 계시거든요. 이것은 곧 내주적 영감인데,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내 영과 함께 결합으로 계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랬지요?(고전9:16. 롬8:11) 내주적 내재적 영감은 나를 중생시켜 놓고, 또 내가 타락을 해도 나의 속에 계속 머물고 계시는 겁니다. 중생한 자는 술에 취해있어도 성령은 내 속에서 계속 역사를 하는 겁니다. 신앙양심을 두드린단 말이요. 그렇지요?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는 수락적인 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각성적인 영감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겁니다. 여러분들, 그런 경험 더러 있을 거요. 비 오는 날에 캄캄해 있을 때는 뭐가 뭔지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번갯불이 ‘번쩍’ 하니까 그 소낙비 속에서 세상이 반짝 드러나지요? 그런 것처럼 각성적인 영감은 말씀을 받을 때에 순간적으로 깨달아지는 거. 수락적인 영감은 각성적인 영감에 의해서 깨달아진 그 말씀이 은혜가 되어 받아지는 것. 그 다음에 조명적인 영감의 감화가 있는데 이 감화에서는 자기가 깨달은 것을 잡고 적절하게 버티고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사역적인 영감이 있는데 이 영감에 의해서 이제 사역이 나오는 것. 이게 다 같은 한 분의 성령이신데 각 성도들마다 깨닫고 받아지는 그 단계가 있기 때문에 그 감화성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보면 이와 같은 단계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심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이 세상에서 홀로 버려두지 마옵시고 중생된 내 영과 함께 성령님이 계시고, 또 나아가서 모든 생활 환경 역경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서 잘 적용시키고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하고 옳은 성품을 잘 입고 갈 수 있는 복스러운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미련하고 둔탁한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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