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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8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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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2007년 12월 1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시편 84:1-12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름을 지을 때 항렬에 따라 지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고 아이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특별히 이름 가운데 '하, 예, 은, 혜' 등이 들어가는 경우는 대개 부모가 신앙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자녀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같은 이름이 있어요. 어떤 이름인지 아시겠습니까? '시온'이라는 이름입니다. 두 아이가 이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집 둘째 아들도 시온이인데, 이 이름으로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전 교회에서 어느 가정을 심방했을 때 택한 본문이 시편 84편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데, 5절에 있는 '시온'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 오는 겁니다.
그리곤 드는 생각이 정말 기가 막힌 구절이고, 정말 기가 막힌 이름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거다'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주저함없이 둘째 이름을 시온이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아이의 마음과 영혼과 인생에 시온의 대로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들으니까 멋있는 말 같은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시온의 대로가 무슨 뜻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의 배경과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84편의 주제는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사모하는 자가 받는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시편 84편에서 적어도 성전의 역할을 두 가지로 뚜렷이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첫째는,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1-4절까지를 보면 성전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1절에서는 ‘주의 장막’, 2절에서는 ‘여호와의 궁정’, 3절에서는 ‘주의 제단’, 4절에서는 ‘주의 집’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표현들을 종합해 한마디로 표현해 보면, 성전이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시는 곳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온누리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 특별히 한 장소를 선택해서 거기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거기에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거기에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그런 곳, 그런 특별한 장소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곳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도 그런 예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성전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전 밖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장소를 택하셔서 당신의 영광과 임재를 나타내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곳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둘째로, 성전은 삶의 안식을 얻는 곳입니다.
3절을 봅시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편 기자는 참새나 제비가 성전 처마 밑이나 성전 안에서 보금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고 이 부분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농촌의 모습을 그려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참새의 경우는 텃새입니다. 참새는 추운 겨울이 되면 기와집 처마를 드나들면서 집을 짓습니다. 제비는 철새지만,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추운 겨울에 외로운 참새들이 그 기와집 처마를 들락날락하던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참새와 제비들이 다른 곳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쉼을 얻지 못하는데, 성전에 가면 쉼을 얻는다는 겁니다. 성전 처마에 둥지를 틀어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지저분하다고 치우거나 헐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을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참새와 같고 제비와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고되고 외롭습니다. 참새와 제비가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고되고 피곤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실존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삶을 살다보면 불현듯 그 어느 날 갑자기 느끼는 고독이 있습니다. 이 실존적인 고독은 그 무엇으로도 해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느끼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러한 실존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아요. 쉴 곳이 없어요.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됩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그 때 주의 성전에 들어갔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에게 쉼을 주십니다. 마치 참새와 제비가 지치고 외로울 때 성전 처마에 둥지를 틀고 쉼을 얻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성전에 와서 그러한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참새같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모일 때마다, 주의 백성들이 교제 가운데 모일 때마다, 여기서 우리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이 주의 전을 찾는 모든 분들께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성전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둘째로 삶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전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시편 84편은 이러한 성전을 사모하는 자가 누리는 은혜와 축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첫째로, 새 힘을 얻는 축복을 받습니다.
5절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온의 대로를 영어성경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번역본은 pilgrim's way로 나오고 어떤 성경에는 highway로 나옵니다. 이 둘 다 맞는 번역입니다.
마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찾아갈 때, 그들은 성전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길, pilgrim's way를 가고 있지만, 성전에 가기 전에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 성전을 향해서 죽 뻗어있는 영혼의 highway가 열려 있습니다.
성전으로 가고 있으나 이미 그 마음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highway가 열려지게 됩니다. 성전에서 만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지는 내 마음에 highway가 열리는 겁니다.
마음에 highway가 열린 사람은 성전을 생각만 해도 힘을 얻습니다. 그 시온의 대로를 달려가며 마침내 성전에 도착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하며, 하나님 앞에 찬양과 경배를 드릴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벅차고 새로운 힘이 솟습니다.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그의 영혼의 highway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쏟아집니다. highway가 뭡니까? 큰 길입니다. 고속도로입니다. 크고 막힘이 없는 길입니다.
그 마음에 영혼의 highway가 있는 사람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새 힘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 새 힘을 얻는 축복이야말로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자주 무력감에 시달립니까? 얼마나 자주 삶의 탈진현상으로 인해 시달리고 있습니까?
삶의 의욕이 없어지고, 내 몸이 막 자지러지고, 내 육체도, 내 영혼도 쇠약해 갑니다. 침체되고 탈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와 찬양과 성도 안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순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의 짐을 열고 기도하는 순간,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주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벌떡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제가 20대 후반에 목동에 있는 150명 정도되는 교회를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친구들이 저를 넘버3라고 불렀었습니다. No.1 담임목사님, No.2 전도사님, No.3 류공석. 그렇게 저를 불렀습니다. 거의 날마다 교회를 갔었거든요.
능력도 없는 사람이 네다섯 가지의 일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4년을 그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주일인데, 그 때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할 때였는데, 몸살이 걸려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얼른 씻고 옷입고 교회로 갔어야 했는데, 그 날은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은 겁니다. 교회 가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번 아웃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탈진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그냥 기차타고 춘천으로 갔습니다. 호수변에 갔다가, 이곳 저곳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에 춘천에 있는 한 교회에 갔습니다. 그래도 예배는 드려야겠기에 말입니다. 왠지 남의 집 같기도 하고 그냥 자리만 지키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섬기는 교회엘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쏟아집니다. 찬양을 하면서 울고, 말씀을 들으면서 울고, 처음부터 끝까지 울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는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탈진되어 지치고 상처 난 제 마음을 위로해 주셨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교회를 가도 익숙하지 않게 갑니다. 교회 가는 것이 기대가 되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예배한다는 것이 기다려지고, 찬양한다는 것이 감격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highway가 열린 겁니다.
그 때부터 저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봉사를 했고, 나 자신이 지치고 탈진될 조짐이 보이면 일을 중단하고 늘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모든 일 뒤로 하고 교회 예배당이나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분의 존전 앞에 엎드려 긍휼과 자비를 구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저는 5절의 은혜가 무엇인지 압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는 고백은 너무나 귀한 고백이며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지치고 고되고 외로울 때 어디에 가십니까? 술집입니까? 친구입니까?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전으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술집에는 해답이 없어요. 친구들도 해답이 되질 못해요.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위로받고 새 힘을 얻는 해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고 깨진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을 어루면져 주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주시고 일어나 걸을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영혼의 highway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받는 highway가 되길 바랍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 축복은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축복입니다.
6절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참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눈물 골짜기는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의 인생이 때때로 눈물의 골짜기라고 느껴집니까?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시때때로 우리의 인생은 눈물 골짜기가 될 때가 있습니다. 잠시의 기쁨과 잠시의 성공과 잠시의 환희가 있는가 했더니 어느새 삶은 다시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6절을 보니까 눈물의 골짜기로 통행하는데, 갑자기 눈물의 골짜기에 많은 샘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샘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기쁨의 상징입니다. 비록 지금은 눈물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기쁨의 샘으로, 축복의 샘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자에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걷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씻기시고, 대신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 성처가 없는 사람 없습니다. 고독이 없는 사람이 없고, 저마다 인생의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은데 저마다 지고 있는 짐과 고통과 상처와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이것이 기쁨의 샘으로 변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직전까지는 내 마음이 그렇게 아팠어요. 내 마음은 그렇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주체할 길이 없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내 입술에서는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나오고, 내 눈물도 감사와 기쁨의 눈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슬픔과 아픔이 있지만, 그 슬픔과 아픔을 이길 수 있도록 나를 위로하시고 어루만시지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터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6절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이 쓴 책 가운데 ‘성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메시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랬더니 선지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기 성문 곁에 가면 당신은 그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성문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제가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지요?” 그 때 선지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거기에는 가난하고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에 메시야도 상처를 입고 같이 계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메시야는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어요. 메시야 역시 가난한 모습이고, 상처받은 모습이지만 자기가 입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기에 바쁜 사람이 있으면 그가 틀림없는 메시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엔은 메시야에 대해서 ‘성처입은 치유자’라는 유명한 별명을 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처럼 많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분도 배신의 상처를 받았고, 버림의 상처, 가난의 상처,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의 상처를 받았고, 정신적인 고통의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사랑하고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그 때에도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지금도 치유하십니다. 자신이 상처를 받으셨기에, 그래서 상처를 아시기에 그는 우리의 상처를 이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상처를 이해하시고, 나의 눈물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더욱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치료하시는 손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눈물의 골짜기를 가다가도 기쁨의 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받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예수님처럼 하면 됩니다. 상처입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위로하고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내게 집중할수록 더욱 아픕니다. 그러나 다른 상처입은 이들을 돌아볼 때 그들도 치유될뿐만 아니라 내도 치유됩니다. 그리할 때 눈물의 골짜기가 기쁨과 감사의 샘으로 바뀔 것입니다.
마지막 축복은 보호의 확신을 누리는 축복입니다.
9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요?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방패를 잃어버렸습니다. 옛날 전쟁터에서 군인이 방패를 잃어버렸다, 그건 매우 위험합니다. 죽기 쉽상입니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화살이 날아오고 칼과 창이 와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너무나 위태하고 무기력한 군인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크고 강한 방패를 가진 군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전쟁을 수행할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수많은 위협이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려려는 수많은 공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찬양과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방패가 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극적이고 도피적이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으면, 자신감있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 인생의 방패가 되셔서 나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전에 올 때마다,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 사실이 확인되어지고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성전을 사모하는 자가 받아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 속에서, 우리의 예배 속에서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교제가 시편 84편에 나오는 축복이 그대로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면 할수록, 예배를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우리의 교회와 예배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찰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에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highway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전에 와서 이런 축복을 받고, 예배에서 이런 축복을 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승리를 원하십니까? 주의 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도의 교제를 즐겨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highway를 소유하십시오. 그래서 예배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 되시고, 예배의 축복으로 오늘도 내일도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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