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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1: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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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내게 은혜 주신 이유
2008년 1월 26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디모데전서 1:12-19
예루살렘에 살 때였습니다. 대력 2년전으로 기억하는데, 아침에 큰 아이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학교에 가려고 나갔는데, 집 앞에 있는 조그만 정원에 누군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큰 아이였습니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 정원에서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급히 학교에 보내고 나서 오전 내내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힘들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성격이 좋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기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힘들었던 것입니다. 학교에 다녀온 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학교 공부가 힘든 것이 아니라 수업 시작 전에 아이들과 함께 노는 시간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대일로 만날 때는 그런 것을 못 느끼는데, 같이 놀 때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힘들어서 노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면 돌파'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피하려하면 문제는 더 커져서 더 어렵게 느끼지고 두려움만 커진다고, 하지만 정면 돌파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힘을 얻었는지 그 후로는 그런 일 없이 잘 다니고 있습니다.
부모는 누구나 그 자녀들에게 삶의 태도나 인생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비록 자녀들에게는 그것이 잔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자녀들이 바른 삶의 태도를 갖고, 바른 길, 옳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특히 인생을 올곧게 살아온 부모일수록 더더욱 그 자녀들에게 교훈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주는 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영적으로 아버지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된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디모데전후서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사역에 관한 교훈입니다. 디모데에게 어떠한 자세로 사역을 감당할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 12-17절은 어떤 면에서는 사도 바울의 간증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간증을 통해 사역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전에는...”,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구원받기 전, 거듭나기 전에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도행전 8: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שאול)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 당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며 그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너, 예수 믿는 놈! 너는 죽어도 마땅해!”하며 스데반의 죽음을 통쾌하게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9:1을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 다메섹으로 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대해서, 그리고 주의 제자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것입니다. 이 죄인됨의 고백은 15절 하반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괴수란 우두머리를 뜻하면서 또한 첫째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죄인들 중에 가장 큰 죄인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 사도 바울, 어느 누구라도 위대한 주의 종이요 조금이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성자 같은 사도라고 인정받는 이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언 듯 부끄러운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고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신앙 간증이며 참된 승리의 고백입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죄책감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하지만 죄의식은 은혜를 더해 줍니다. 자유를 주고, 해방감을 줍니다.
여러분, 죄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었던가를 깨닫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이었다는 것,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죄의식입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철저하게 부패되고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죄악으로 일관되었던 무지와 불신을 깊게 인식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바로 죄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식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깨닫는 것은 나는 무익하다는 것이요,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더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벌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참된 죄의식은 결국 겸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것,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의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참된 죄의식은 감사와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나같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자, 무익한 자, 죄만을 일삼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훼방함을 자랑으로 삼았던 나 같은 자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명을 주시고 직분을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은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이 무엇으로 가능했습니까? 죄용서입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씻어주시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그와 같은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고백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죄의식이 있었기에 그의 헌신이 가능했고, 끝까지 겸손히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칼빈 등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깊은 죄의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위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죄의식의 결핍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러한 죄의식이 있습니까? 혹시 입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죄의식 없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함에 있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성전 안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기도하던 바리새인보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감히 고개를 못들던 세리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13절에서 긍휼이란 단어와 14절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 저주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을 불쌍히 여겨 저주를 멈추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저주를 거두시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간증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인됨과 죄인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역의 동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충성되이 여겨”, 이 말을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주님이 나를 믿어 주셔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께서 바울을 본래 믿을 만한 자임을 꿰뚫어 보시고 그를 충성되이 여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본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는데, 그러한 자신을 주님이 믿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비방하고 복음을 방해했던 바울을 주님이 믿어 주셔서 사도라는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굉장한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믿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래서 직분을 맡고 사명을 맡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실은 믿지 못할 사람들이요, 충성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감히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믿어주시고, 충성되지 않은 우리를 충성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결코 “내가 한 일을 보아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무엇을 맡기셨는지, 무엇을 할 수 있게 하셨는지 보아라”라고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8-10)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나를 충성되이 여기신 것”, “주님께서 나를 믿어주신 것”은 주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믿어주시고,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시면서 내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맡겨진 사명, 맡겨진 직분 충성되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어 사명을 주고 직분을 준 것처럼, 네가 그 사명, 그 직분을 믿음직하게 충성되이 감당할 것으로 믿으시며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은혜가 곧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택함 받은 은혜, 나의 죄를 씻기시고 용서하신 은혜, 구원하신 은혜, 나를 믿어주시고 내게 직분을 주신 은혜,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축복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주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몸된 교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영적 은혜입니까? 기도의 은혜입니까? 말씀의 은혜입니까? 재능입니까? 직분입니까? 건강입니까? 물질입니까? 그것으로 주님을 섬기시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십시오.
오늘 본문은 직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명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주시고, 나를 믿어주신 것은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짧게 소개를 한 것 같은데, 캐시 버넬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리틀턴에서 총기 난사로 인해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총기난사를 벌인 두 남학생은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 군데로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면 이들은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고백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캐시 버낼이라는 여학생이었습니다.
캐시 버낼은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그리고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결국 두 남학생은 분노 가운데서,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고 외치며 총을 난사했습니다. 순교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캐시 버넬이 처음부터 이런 믿음의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총기난사를 벌인 학생들처럼 불량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마약과 술과 사탄을 숭배하는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고, 부모가 자신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다고 생각하며 부모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겠다고 부모에게 협박까지 했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캐시 버넬이 이러한 순교자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도 있었지만, 그의 신앙적인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1997년 봄, 부모가 억지로 다니게 한 교회의 수련회의 저녁집회 때 캐시 버넬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나온 삶이 얼마나 죄악된 생활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그러한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찌할 줄을 몰라 눈물을 흘리며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캐시는 변화되었습니다. 그 찌들리고 미움과 분노가 가득찬 얼굴이 해맑은 소녀의 미소로 바뀌었고, 그의 삶도 완전히 변화되어 마약과 술, 사탄적인 신비주의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캐시가 순교하기 몇 달 전에 학교의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순교하기 일년 전인 1998년에 캐시의 노트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나의 믿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다.”
그리고 캐시가 죽기 일주일 전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엄마,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왜냐면 나는 하늘 나라로 갈 거니까”
그리고는 1999년 4월 20일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하는 질문에 담대하게 “Yes!”라고 말하고는 순교하였습니다.
무엇이 캐시 버넬을 비행청소년에서 거룩한 순교자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는 사도로, 순교자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용서해주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 그 은혜, 그 사랑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캐시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아니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를 사명으로 알았던 것이지요. 비록 캐시 버넬은 순교당했지만, 그 결과, 캐시의 죽음으로 미국의 십대 사이에는 커다란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잠자고 있던 믿음들이 깨어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은혜 받고 축복 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는 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은 나누어 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종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필요한 자세 중에 하나가 순종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순종을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8-19절을 보겠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게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왜 순종이 선한 싸움입니까?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인데,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힘든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싸워야 할 싸움은 다른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의 싸움일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따라 싸우는 싸움입니다.
왜 전도합니까? 주께서 “가서 모든 족속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하셨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니까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내게 성처주고 해를 끼치는 사람 용서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질 않습니다. 말씀 보다 나의 판단, 나의 의지, 나의 감정, 나의 자존심, 나의 경험, 나의 능력이 앞설 때가 많고, 환경이 앞서고, 유혹과 우리의 연약함이 앞서고, 순종 자체보다는 어떤 결과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도구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싸움은 결국 이 순종의 싸움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게 은혜 주시고 나를 믿어주시어 내게 직분을 맡기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능력을 주십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순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리라”하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사명을 감당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으니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능력이 주어집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능력이 주어집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빌4:13)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 것은 내게 사명을 주심이며, 그 사명 충성되이 감당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직분, 선한 싸움을 감당하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주의 거룩한 종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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