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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말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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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주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2008년 2월 2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말라기 1:1-5
여러분들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 예전에 유행했던 유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죠? 어느 날 아기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고양이 맞아?”, “그럼, 고양이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런 고양인데.”
그런데 조금 있다가 아기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에게 또 묻습니다. “엄마, 엄마, 나 정말 고양이 맞아?” 아마도 이 고양이는 사춘기를 타고 있었나 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꾸 하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질문에 어머 고양이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럼, 고양이 맞아. 아주 예쁜 고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다시 아기 고양이는 묻습니다. “엄마, 나 정말 고양이 맞아?” 어미 고양이는 “그럼, 고양이 맞아” 잠시 후에 또 묻습니다. “엄마, 나 고양이 맞아?”, “그래 맞아.” 이렇게 몇 번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어미 고양이는 계속해서 고양이가 맞다고 확인을 해주는 데도 불구하고 아기 고양이는 자기가 고양이가 맞냐고 계속 묻습니다.
그러자 참다못한 어미 고양이가 뭐라고 했다고요? “그래, 맞아. 이 XXX야” 방송부적절용어를 사용했다지요.
예전에 유행했던 우스개 이야기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꼭 우리들 이야기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가끔 그러지 않나요? “저, 하나님 자녀 맞나요?”, “하나님, 정말 저 사랑하시나요?”
언제 이런 말을 합니까? 나에게 고난이 왔을 때, 실패했을 때, 앞길이 막혔을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 병들었을 때, 슬픔이 있을 때 이런 생각과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런데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항의를 합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것을 그 뜻을 살려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고,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라기가 쓰여진 때는 기원전 460년경입니다. 이 때는 중동지역의 패권을 잡던 나라가 페르시아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의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강대국의 식민지였고, 이방 민족의 위협이 늘 있었고, 메뚜기와 가뭄이 잦아서 애써 농사지은 것들을 망치기가 일쑤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곧 임한다고 했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약속도 그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암울하고, 답답하고, 풀리는 일은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을 보면 도무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주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하면서 항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한 적은 없습니까? 현실이 너무나 고되고 힘들어서 “하나님, 저 사랑하는 거 맞나요?” 해 본 적은 없습니까? 상황이 너무나 답답하고 낙심이 되어서 “하나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이지요?”하면서 하소연해본 적은 없습니까?
현실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앞길이 풀리지 않고 막힐 때, 연속되는 실패를 경험했을 때, 상황이 숨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겁니다. 혹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기도도 열심히 했고,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주어졌을 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나의 고통스럽고 답답한 현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고, 하나님은 나의 고통에 대해서 왜 침묵하시고, 내가 그토록 원하는데도 왜 도와주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습니까?
정말 우리의 생각이 맞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실패를 겪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과 슬픔을 당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정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등식으로 본다면 예수 믿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맞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에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진 것 다 버렸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셨습니다.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갖히고 매를 맞고 온갖 고생은 다 했습니다. 게다가 몸에 질병까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질병을 말합니다. 전해오는 전승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력도 좋지 않았고, 간질병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병은 그렇다 치고, 간질병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대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간질이 발작해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을까요?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아마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런 목사님이 있었다면 그 교회에 오래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나중에는 로마에 끌려가서 순교 당했습니다. 말이 순교지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만 평가하면 사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아예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왕위에 오르기는커녕 적에게 쫓겨서 유대 광야를 돌아다니고, 거처도 없어서 동굴에서 잠을 자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는커녕 조롱 당하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왕이 되기는 했지만, 이 당시의 상황만 보면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들은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습니까?
No! 결코 아닙니다. 다윗이나 사도 바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드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사랑 여부를 나의 상황과 연관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상황이 평탄하고 풍요롭고 잘 풀리면 곧 축복이고, 반대로 나의 상황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답답하면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 하면서 신앙적인 회의를 갖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우리는 가지고 있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판단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틀린 데가 많습니다. 위험한 요소가 많습니다.
제가 만약 이 나이에 병이 걸려 죽거나, 사고로 죽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겁니까? 여러분들도 이 예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여러분들을 예로 드는 것이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저를 예로 드는 겁니다.
제가 만약 그렇게 죽는다면 어떤 말들이 들려올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할 겁니다. “류목사님, 죄가 많은가봐.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가봐.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종인가봐.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겠어. 덕이 안돼.”
우리나라에서는 목사는 아무렇게나 죽으면 안됩니다. 덕이 안됀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 복인 것은 많습니다만, 그것만이 복은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가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3, 40십을 사나 7, 80을 사는 한 치도 안되는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내가 오래 살면 오래동안 맡겨주신 일 하다가 오라는 사인인줄 알고 늙어서도 충성하면 되고, 조금 일찍 부르시면 “내가 맡겨준 일 다했으니까 와라, 빨리 보고 싶다, 빨리 와서 나랑 살자”는 뜻으로 받아들으면 됩니다. 나를 데려가시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는 겁니다.
전에 한국에서 목회할 때 한 청년 자매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다 합심해서 간절히 참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을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그 자매를 사랑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 아버님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사랑하셨어요. 처음에 쓰러졌을 때 의사들을 판단은 2,3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달 가까이를 연장시켜주셨어요. 왜일까요? 장례식장에 가면서 생각해 보았는데, 이유가 있더군요. 그것은 준비시키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우선은 가족들입니다.
만약 작년 말에 쓰러졌을 때 돌아가셨다면 가족들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딸만 둘이었거든요. 하지만 두 달의 기간을 통해 가족들이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믿음으로 굳게 서게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본인의 준비였습니다. 듣기로는 그전에는 교회에 그렇게 자주 다니셨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있으면서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알면서 아버지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셔서 데려가시기 전에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하고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평가하지 마세요. 나의 고난과 평탄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마세요. 내가 받은 것의 많고 적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마세요. 그건 이분법적인 사고입니다. 그런 사고를 버리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나의 상황과 상관없이 초월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게 고통이 왔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 마십시오. 내게 실패가 왔다고, 나의 앞 길이 막힌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와 은혜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난과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내 몸의 가시를 없이 해달라고,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응답은 하셨는데,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하는 응답입니다. 그 병을 고쳐주신다는 응답이 아니라 ‘너 그 병 가지고 사는 것이 내 뜻이야’라고 하는 이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간질과 여러 가지 질병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기도의 거절에서, 자신이 그렇게 괴로워했던 질병 때문에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공동변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질병 때문에 그는 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교만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잘난 사람입니까? 갖추고 있는 것이 많았고, 대사도였고, 엄청난 계시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교만해지기 딱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질병인 간질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겸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교만의 마음이 들다가도 간질이 발작하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다시금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강함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놓고 기도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고, 그 힘을 가지고 그는 끝까지 충성되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까?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나 모릅니다. 그의 현실과 상관없이, 그의 질병과 상관없이, 그의 고난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그의 서신서에서 거듭거듭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의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고난은 범죄의 결과다. 따라서 너는 죄값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욥도 처음에는 잘 견뎌내었지만, 나중에는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하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난을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이전에는 귀로만 하나님을 듣더니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내게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그 고난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숨었다고 여겨지고,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현실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커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숙하면 고난 가운데서도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 힘써야 합니다. 우선은 머리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십시오. 말씀도 귀기울려 듣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 많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머리에 있는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성령님께 기도하세요.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세요.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아는 하나님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래서 머리로도 알고 가슴으로도 아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게 되고,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전적의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집 애들이 자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높은 곳에 올라가 저한테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 집 큰 애가 하루는 제가 침대 위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올라가더니 거기에서“아빠!”하면서 뛰어든 겁니다. 저는 신문 읽느라 주의깊게 보질 않았었거든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 머리가 제 얼굴에 부딪혀서 아프긴 했지만 놓치지 않고 받아주었습니다. 우리 집 애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모한 객기일까요? 그것은 아빠가 반드시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뛰어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바로 전적 위탁입니다. 믿기는 믿는데‘하나님이 인도해주실까, 하나님이 도와주실까’의심을 한다면 그건 아직 다 맡긴 것 아닙니다. 여러분, 앞길이 막히고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답답하고 의심이 듭니까? 그것은 아직 다 맡긴 것이 아닙니다.
다 맡기면 앞길이 막혀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평안합니다. 그렇게 불안하지 않습니다. 왭니까? 다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적인 위탁이 있으면 당장은 낙심될지 모르지만 금방 안정을 찾고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보면,“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송두리째 다 맡기는 것이 전적 위탁이고, 그러한 것이 믿음입니다. 다 맡기면 평안이 오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럼 앞길이 막혀도, 실패해도, 상황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왜 그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는지 아세요? 광야에서 적에게 쫓겨다닐 때, 춥고 습한 동굴에서 지낼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조롱당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청년들을 포함한 젊은 분들 가운데는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업의 길을 준비하다가 실패한 이들도 있고, 취업의 길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장년층의 경우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일이 잘 안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당장의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멀리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꾸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그림을 그리시면서 멀리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예를 들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은 왜 우리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반대로 에서의 후손들이 득세를 하고 떵떵거리며 사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흐름을 보면,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나라가 회복이 되었지만, 에서의 후손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멀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길은 생명의 길이고, 축복의 길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들도 멀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앞길과 더불어 형통이라는 말을 합니다. 형통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형통의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은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순종이 왜 형통의 조건이 되느냐 하면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또 우리 집 애를 예로 들어 죄송한데, 아이들은 보통 자라나면서 좋아하는 장난감이 달라지게 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집 큰 녀석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어느날 부터 조립용 로봇을 사달라는 겁니다. 한번은 장난감 가게를 갔는데, 자기가 마음에 드는 로봇을 사달라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아직 일러요. 조립과 조작이 그 나이의 아이들이 하기에는 어려운 로봇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단순한 것을 사주려고 그러는데, 끝까지 그것 사달라는 겁니다. 그 로봇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사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립은 내가 다 해주었고, 몇일 있다 보니까 다 망가졌습니다. 어떻게 조작을 해야 하는지 몰라요. 어른이 해도 그렇게 쉽지 않은 거더라고요.
무엇을 말합니까? 받을 만한 자격이 되어야 주시는 겁니다. 주고 싶어도 내가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실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자격이 뭡니까? 그 준비가 뭡니까? 순종입니다.
순종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만듭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순종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 주실 수 있는 겁니다. 마음 놓고 주실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순종과 믿음이 형통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앞길과 삶을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형통의 의미입니다. 형통은 무조건 잘 되는 것만이 형통이 아닙니다. 앞길이 막힐 때, 사방이 막힐 때,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바로 형통입니다.
또한 내 앞길을 막으시는 것도 때때로 형통이 됩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는 안될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내 길을 막아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돌이킬 수 있도록 해주셔야만 합니다. 이것 또한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저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토록 변함없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눈앞에 현실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낙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일어나 평안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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