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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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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나님과 친해지기 1
2008년 2월 23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호세아 6:3
여러분들은 혹시 이런 생각 해보셨나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해보셨나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나 결단을 말합니다. 더 큰 믿음, 더 큰 희생, 더 큰 충성, 더 큰 섬김, 더 큰 순종, 더 성장하는 것, 혹은 회개와 정직한 삶...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특별히 현재 자신의 상태를 비추어보고 부족한 것들이 느껴지면 그러한 것들을 바꾸거나 채워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어떤 action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큰 믿음을 갖길 원하시고, 더 큰 희생과 더 큰 충성과 섬김, 더 큰 사랑과 순종, 그리고 더 성장하고 더 깨끗한 마음과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친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구되기를 원하십시다. 우리와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서로가 깊이 아는 친밀한 우정을 원하십니다.
창세기 2-3장에 보면 에덴 동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로인한 심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는가가 중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은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유독 사람만은 손으로 만드셨고, 하나님 자신을 닮게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1:27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유독 사람만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 사람의 창조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과 닮아야만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자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친밀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사람의 범죄로 인해 깨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피눈물나는 짝사랑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에녹, 노아, 모세, 아브라함, 다윗, 이사야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과 친구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짝사랑은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0,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면 죄용서 받고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친구되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길 원하시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친하십니까? 얼마나 친하십니까? 정말 하나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친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저 성경 말씀 잘 알고 기도 잘 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걸까요?
서울 동부이천동에 있는 모교회에서 찬양사역을 하고 전도사님으로 알고 있는데, 이 분의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언젠가 외국에서 유명한 찬양사역자가 와서 찬양집회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먼저 집회 전에 opening song으로 약 30분 정도 찬양을 인도했다고 합니다. 무척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멘트도 꼼꼼하게 준비하고, 찬양곡 선정, 악기...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시간이 다 끝나고 외국인 찬양 인도자가 올라가서 단지 한 곡을 불렀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 곳에 임재하심을 강하게 느꼈답니다. 외국인 인도자는 단지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올라갔는데 말입니다.
속이 상해서 그 전도사님이 하나님께 물어보았답니다.
“하나님! 내가 더 준비 많이 하지 않았나요? 근데, 왜 그렇지요? 왜 내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감싸 안아주시지 않으셨지요?”
그 물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너보다 쟤가 나하고 더 친하단다.”
그 전도사님의 고백을 듣고 저 스스로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류목사, 하나님과 얼마나 친하냐?’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많이 알고 기도 잘하고 맡겨진 일들 충성하는 것과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친하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가깝다는 것이지요? 가까워지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지 시작합니다.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또 보여주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까워지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그 사람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흉금없이 터놓는 사이가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정이라고 하고 그런 사이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이러한 친구가 되길 원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저 일만 하는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친구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알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언가 위대한 일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생각을 알기에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를 알고 그들은 행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우정을 원하십니다.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길 원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과 친구되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정말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과 가까와지기 위해 애쓴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데 새벽 빛 같이 어김없이 나타나고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새벽 빛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캄캄한 밤에 멀리 동쪽에서 빛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뀝니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어두웠던 것들이, 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상태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이기 시작하면 무릎을 꿇게 됩니다. 보이기 시작하면 찬양이 터져나오기 시작하고, 보이기 시작하면 감사가 나오게 되고, 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보이기 시작하면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면서 내가 얼마나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한 가운데에 무엇이 있고 누가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품고, 그 나라와 민족을 품고, 그 문제를 품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내 뜻을 구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보이기 시작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친구는 친구가 원하는 것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보이기 사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덮습니다. 나를 채우게 됩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형제 자매도 똑 같이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이고 사랑의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지가 달라지게 됩니다. 억지로,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부담감으로, 두려움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기쁨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과 친구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새벽 빛처럼 나타나시고 비와 같이 임하신다고 했는데, 새벽 빛과 비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따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두움을 빛으로 덮어 버립니다. 비 역시 처음에는 딱딱한 땅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더불어 더러운 것들을 씻어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물로 땅을 덮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나를 씻깁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어두움을 몰라내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되면 될수록 그 은혜가 나를 덮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변화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뒤집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 그것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의 속사람을 덮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옛성품이, 나의 속사람이 언제나 은혜의 수면 아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생각, 나의 언어생활, 나의 삶, 나의 인간관계, 이러한 것들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의 수면 아래 있지 아니하면, 혹은 은혜의 수면 위로 내가 다시 떠 오르면 어김없이 나의 옛성품이 나타나고 나의 속사람이 드러나게 됩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한동안은 늘 감사하고, 늘 기쁘고, 말에 있어서도 늘 은혜스럽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성도들을 대할 때도 정말 섬기는 모습으로 대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옛사람의 모습이 확 드러나지 않습니까?
감사하던 말이, 위로하고 기도하던 말이 갑자기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말로 바뀌지 않던가요? 눈물 콧물 흘리며 감사하다고, 인내하며 기쁨으로 살겠다는 다짐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만 힘든 것 같고, 삶이 너무 버겁고, 온통 불평불만으로 가득차는 삶으로 바뀌지 않던가요?
교회와 성도들을 섬길 때 전혀 아깝지 않던 마음이 어느날 갑자기 크게 보이고 아까워보이고 손해보는 것 같은 마음으로 바뀌지 않던가요?
어떻게 해야합니까?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나를 덮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수면 아래에 언제나 잠겨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나를 덮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나의 옛 사람이, 옛 성품이 여지없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수면 아래에 잠기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몇주간에 걸쳐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시편 25:14에서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야고보서 4:8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그 소원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면 아래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먹으십시오. 날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매순간 순간 말씀을 기억하며 먹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든, 성경을 묵상할 때든, 성경을 공부할 때든, 성경 일독을 할 때든 그 말씀이 지금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으로 받아먹으십시오.
눈을 부릅뜨고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받아 먹으세요. 졸 틈이 어디있습니까? 밥 먹으면서 조는 사람 봤습니까? 정말 피곤하지 않으면 밥 먹으면서 졸지 않아요. 맛있는 먹는 사람이 밥을 통해 가장 많은 영양분을 가져가게 됩니다.
특별히 말씀의 비평가가 되지 마십시오. 설교의 비평가가 되지 마세요. 성경의 비평가가 되지 마십시오. 비평하는 자는 제대로 말씀을 먹을 수 없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어느 목사님이 부임을 했는데 첫 주일부터 노권사님이 그러셨다지요? "목사님, 오늘 설교 죽쒔지요?" 그 말을 매주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직 밥을 먹을 만큼 자라질 않아서 계속 죽을 쒀서 드리고 있는 겁니다."
비평가로 앉아 있으면 절대 밥 못먹습니다. 그 설교를 통해 은혜 못받습니다. 목사도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함에 있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하고 선포해야 하지만, 듣는 성도들도 순전한 마음과 깨끗한 귀로 받아 먹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늘 "이것이 가능한가,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면서 습관적으로 거기에 시간을 다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어지겠습니까? 아니 성경을 통해서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그런 자세로 읽는 사람이 성경을 통해 밥을 먹을 수 있겠냐고요?
순전한 마음으로 먹으십시오. 아멘하고 먹으세요.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오직 나에게만 적용함으로 받아 먹으십시오. 그럴 때 말씀이 나의 밥이 되고 양약이 되어 나의 인격과 영혼을 살찌우고 영양분을 공급하고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기 보다는 보약을 먹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것입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가끔은 보약을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약 한 재 먹었다고 밥 안먹어도 되는 것 아닙니다. 보약은 보약이고 밥은 밥이예요. 날마다 생명의 밥을 드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 밥이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먹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여러분의 심령을 채우고 그분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을 채우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덮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을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친구라 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다니엘, 이사야, 그리고 선지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그리고 제자들... 그 이후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그 명단에 내 이름도 넣어봅시다.
저는 정말이지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의 묘비에, 혹은 나에 대한 사람의 기억에 이런 말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과 친구였던 류공석 목사, 여기에 잠들다.", "류목사님, 하나님과 친했던 분이셨어."
나의 자녀들에게 그런 평을 받고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과 친해."
그리고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주님에게서 감히 그런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야. 기다렸다. 어서 와라."
여러분, 하나님과 친구되고 싶지 않으세요? 하나님과 친해지면 놀라운 일들이 내게 일어날 것 같지 않으세요? 하나님과 친해지면 내 삶이 어떻게 될까,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까 상상해보십시오. 즐거운 상상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힘써 알고자 하는 자에게 새벽빛처럼 보이시는 온 땅을 적시는 늦은 비처럼 임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소원을 만족케 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과 삶을 비추어주실 것이고,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사 그분의 뜻과 사랑과 은혜와 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2"
2008년 3월 1일(토)
요한복음 4:23-24
샬롬! 지난 한 주간 샬롬하셨는지요? 특별히 하나님과 샬롬하셨는지요? 지난 주에 '하나님과 친해지기'란 제목으로 말씀드렸는데, 어떠셨습니까?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친구되기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이 아닌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호세아서의 6:3의 말씀처럼 힘써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모함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벽빛처럼, 늦은 비처럼 자신을 나타내시고 임재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알고자 하는 자에게 알려주시고 가까이 하고자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가까와 지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아주 중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아주 핵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교들이 있고 책들과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들이 들은 바 있고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예배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배란 무엇이다 하는 것보다, 예배는 어떤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예배의 형식이나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란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몇번의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교회에 나오신지 얼마 안되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수백번의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 수많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경험하셨습니까?
정말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만져주시고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런 만남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친해지는 그런 경험을 얼마나 자주 하고 계십니까?
예배는 분명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는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면에 동일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경험하지 못하거나 아예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예배를 통해 큰 은혜를 받습니다. 반면 어떤 분들은 예배를 견디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느 가족이 교회에 갔습니다. 늘 그런 것처럼 그날도 늦게 갔습니다. 자리를 찾아 앉고는 누가 왔나 살펴보면서, 또 주보 오타가 있는지 살펴보면서, 찬송을 불렀는지 출석체크를 했는지, 오타 교정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지나고, 드디어 설교 시간이 되었습니다.
설교 시작과 동시에 아빠가 졸더니 5분 후에는 엄마도 좁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들이 참다 못해 엄마 아빠를 툭치며 말했답니다.
"그만 요금내고 집에 가자!"
우스개 소리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의 은혜를 경험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배 견디기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날까요?
하나님을 아는 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한 분이십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특별히 죄와 분리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죄와는 공존할 수 없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러기에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과 원수되게 만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리고 부활 승리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면 죄씻음받고 용서받게 됩니다. 죄 용서받으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때 우리는 먼저 죄인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죄 용서 받는 자리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준비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 드리기 전에 예배를 준비하십시오.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과 연결된 지역에 오펠 가든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 밑에 몸을 씻는 욕조가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경우 폭이 다릅니다. 하나는 90센티미터, 하나는 40 센티미터로 번갈아 되어 있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급한 마음으로 성전에 올라가지 말고 미리 와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단 밑에 몸을 씻는 욕조가 있는데, 이것을 미크베(מקווה)라고 부릅니다. 예배 드리기 전에 몸을 씻고 성전으로 올라갔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말합니까? 예배를 위한 준비입니다. 이러한 준비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예배의 준비가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토요일이 되면 꼭 목욕을 하십니다. 아주 정갈하게 몸을 씻습니다. 그리고 주중에 헌금을 준비하시는데 가장 깨끗한 돈을 골라 성경책 안에 끼워두십니다. 옷도 깨끗한 옷으로 준비해 놓습니다. 그리곤 성경을 읽으시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이런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저 역시 그렇게 예배를 준비합니다. 저 역시 주일 전날에는 목욕을 하고 헌금을 준비합니다. 깨끗한 신권 지폐를 보면 저건 헌금이다 하는 생각이 금방 듭니다. 그리고 성경 읽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준비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금요일 저녁에, 한국에서라면 토요일 저녁에는 다른 것 하지 마시고 예배를 준비하십시오. 인터넷, 게임, 영화, T.V., 책, 사람들과의 교제, 다 끄시고, 다 중단하고 예배를 준비하세요.
내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실까 묵상해보세요. 내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만나주실까 묵상해보세요. 그렇게 조용히 묵상하며 예배를 위해 기도하세요. 특별히 자신의 죄와 허물을 십자가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솔직하게 숨김없이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죄용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일찍 주무세요.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을 예배 드리기에 가장 좋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와서도 예배 전에 사람들과는 잠간 눈인사만 정도만 나누시고 눈을 감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시고, 죄가 또 생각나거든 죄용서를 구하십시오.
예배 중에, 찬양 중에, 기도 중에,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나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시거든 그 자리에서 바로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려고 하는 싸인입니다.
여러분, 예배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언제 일어나는 지 아십니까? 바로 죄용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인이 죄용서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예배이고, 그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열망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기에 죄용서야 말로 예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예배의 회복도 죄의 회개와 죄용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죄용서가 주어질 때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4:3절 이하에 보면 유명한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옥합을 하지고 와서 그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 중에는 화를 내면서 '어찌해서 이 비싼 향유를 못쓰게 만드냐? 허비하느냐?"고 여자를 꾸짖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요한복음 12:1절 이하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드린 여자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로 나옵니다. 마리아가 아주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마리아를 꾸짖습니다. 비슷한 장면입니다.
자, 보십시오. 마리아라고 여겨지는 한 여인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행동을 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나 여러 사람들은 그것을 허비한다고, 그 비싼 것을 다 못쓰게 만들었다고 아까워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마리아는 향유 옥합이 비싼 것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마리아도 그것이 비싼 것인지 알아요. 어떤 면에서 보면 가난한 살림에 가장 비싼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는 결혼 준비금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용서입니다. 마리아는 죄용서를 받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진실된 죄의 참회와 고백이 있는 곳에 죄용서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죄용서를 경험한 이들에게 생기는 동일한 마음이 바로 감사와 찬양,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 옥합은 자신과 같은 죄인을 만나주시고 죄용서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신 그 예수님께 대한 가슴 터질 것과 같은 감사였고 예배였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가장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지는 현장이었고, 바로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전이었습니다.
예배는, 참된 예배는 이처럼 죄용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드릴 수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죄의 고백이 있는 곳에 죄용서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은혜의 경험이 예배의 출발점이 되고,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는 기초가 됩니다. 죄용서의 체험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파하고 하나도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어놓는 회개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51:1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것이 누가의 말인지 아십니까? 바로 다윗의 고백입니다. 예배자라고 하는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는 인정을 받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을 예배자였다고 하는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예배자였습니다. 사울에게 쫒겨다니는 그 상황에서도 그는 예배자였습니다. 유대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에도, 동굴 속에서 잠을 잘 때도, 적들이 조롱하고 핍박할 때도 다윗은 예배자였습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만 드릴 수 있다면 그는 행복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날부터 갑자기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의 자리에는 있고, 예배를 드리긴 하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느끼던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날부터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전혀 감격이 없습니다. 은혜도 없고 눈물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음이 무겁고 혼란스럽고 원인모를 죄책감만 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는 여인과 간음을 행합니다. 그 결과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리곤 그 일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충신인 우리야를 전쟁터에 몰아놓어 죽게 만듭니다.
이러한 죄를 저지르고도 다윗은 그것이 죄인지도 몰랐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죄는 사람의 영혼을 무뎌지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어둡게 만듭니다. 병들게 만듭니다. 예배자 중에 예배자라고 했던 다윗이 하루 아침에 이러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그를 다시금 고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는 그는 처절한 회개를 합니다. 금식하며 눈물의 회개를 합니다.
그 참회의 고백이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는 더럽혀진 자신의 심령을 새로운 마음으로 채워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내게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12)
보십시오. 얼마나 처절한 회개입니까? 죄로 물든 자신의 심령에 다시금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옷을 찢는 마음으로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고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예배자가 되었는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다윗과 같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십니다(시 51:17).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우리와 똑같은 죄를 범하고 실수를 많이 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상한 심령이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쫒겨 다닐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없이는 살 수 없음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상한 심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안할 때도 자신의 부귀와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상한 심령입니다. 그리고 간음과 살인이라는 죄를 범했을 때는 변명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진심으로 참회하는 눈물의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한 심령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하고 구해야 할 심령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 무엇입니까? 죄를 아파하며 고백하는 심령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으니 나에게 은혜 달라고,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심령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23-24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3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영과 진리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말씀드리자면, 많은 성경학자들이 보는 것처럼 영은 성령,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짐으로 드리는 예배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르게 보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과 진리란 상한 심령을 말합니다. 영은 무엇을 말합니까? 영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마음의 중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예배의 장소를 말하는 것인데, 예배의 장소는 바로 나의 마음, 나의 중심입니다. 몸만 예배당에 있다고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바로 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있고, 그럴 때 주어지는 용서의 감격과 은혜의 감격이 있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합니다.
진리는 다른 말로 하면 진실입니다. 가식없이, 외식적인 요소없이,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 중에 남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개를 해도 진실함이 없고, 찬양을 드려도 그 가사가 나의 고백이 되지 못하고, 헌금을 드려도 나의 진실함이 담겨져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도 역시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한 심령이 있을 때 우리는 진실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인데 무슨 체면이 있고 남을 의식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절실한데 어떻게 가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 드릴 수 있습니까? 내가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거짓되게 예배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연수가 몇년인가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분도 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믿음이 아직 작다고 생각되는 분일지라도 진실된 마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은혜 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길 원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죄용서의 감격과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당신의 거룩과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합당한 찬양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당신의 뜻과 비전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러기에 예배자는 하나님의 꿈을 나누어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에 담긴 수많은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게 되고, 그 마음에 담긴 뜻을 알기에 기쁨으로 순종하고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당신의 능력과 권세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죄를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에게 주시는 예배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경험하길 원합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찾아오는 예배가 아니라 기다려지고 가슴 설레이는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길 원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찾으셨던 바로 그 예배,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셨던 바로 그 예배자가 되어 예배 가운데 임하시고 부어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3
2008년 3월 8일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로마서 12:1-2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고,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은 말입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난 주에 이어 다시 한번 복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친구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알기를 원하시고 가까이 오길 원하시고, 당신의 마음과 뜻을 우리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친구와 같은 친밀한 우정을 우리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이 아닌 태도가 바뀌어야 하고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호세아서의 6:3의 말씀처럼 힘써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모함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벽빛처럼, 늦은 비처럼 자신을 나타내시고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알고자 하는 자에게 알려주시고 가까이 하고자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가까와 지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 역시 중요한 것은 어떤 형식이나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태도로 예배드리는가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자의 마음을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드렸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 즉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역시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51:17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contrite heart, O God, you will not despise."
여기에 보면 상한 심령을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contrite heart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부서진 영혼, 마음"입니다. 상한 심령, broken spirit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표현된 그대로 깨어지고 부서지고 찢기고 상처받은 심령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사람과 여러가지 일로 상처받고, 세상에서 얻어맞아 상처받은 심령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러한 상한 심령을 가진 분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매주 교회에 올 때마다 상한 심령으로 옵니다. 한 주 동안 하나님 말씀 붙들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랑하며 이해하며 그 사람 위해 기도하며 마음에 품기 위해 무척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참 많이 다칩니다.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때로는 내가 왜 이 정도밖에 못했나 하는 후회도 있고, 내가 이렇게 하는데도 바뀌는 것이 없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정말 온 마음이 얻어맞고 깨지고 상처받습니다.
그 마음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께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찬양하며 기도하며 말씀 들으며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하나님, 너무 아픕니다. 힘듭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도와주세요." 상한 심령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 상처들 어루만져 주시고, 눈물 씻겨주시고 새로운 힘과 은혜로, 말씀과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또 한분은 하나님을 이기지 못하는 분입니다. 나름대로 자기의 성격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건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 옳지 않다, 그것 바꿔라, 이것 해라'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어 합니다.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합니다. 자신의 자아나 허물을 건드실 때는 처음에는 힘들어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는 역시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 마음 가운데 참으로 사모하는 마음,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마음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자신의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도 있고,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는 아픔이 있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한 심령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죄를 참회하는 심령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broken spirit입니다. 죄로 인해 깨지고,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세상에서 얻어맞아 깨어진 마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고백하며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감사한 일도 많고 승리의 감격도 있지만, 그만큼 깨어지고 얻어맞고 넘어지고 부서집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깨어집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입힙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또한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때로는 세상에 지고, 넘어지고, 때로는 얻어맞고 상처를 받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broken spirit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우리 역시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지고 이곳에 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잘 오셨어요. 그 상한 마음 가지고 이 자리에 오신 것 잘 한 겁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교회에 가는 것 조차도 힘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오세요. 아픈 마음 그대로 오세요. 상한 마음 그대로 가지고 오세요. 깨어지고 얻어맞고 부서진 마음 그대로 가지고 오세요. 감사하면 감사한대로 오시고 아프면 아픈대로 오세요. 그 모습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세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리고 늦게라도 오세요.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일찍 오셔서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지만, 늦을 때라도 오세요. 예배를 드리면서 오던 분이 안오시면 마음이 쓰입니다. 눈이 가요. '오늘도 지각이네. 오늘도 안오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나?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하는 염려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예배 중에 오신 것이 확인되면 마음이 놓여요.
그런데요, 저는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시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정말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정성껏 드려야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못할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전에 오길 원하세요.
왠지 아세요? 우리가 그분의 아들 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들 딸들이 당신을 기뻐하면서 당신께 정성껏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아들 딸들이 당신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오는 겁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보고 싶으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는 겁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깨어진 마음, 부서진 마음, 상처받은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연약한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된 자녀이길 원하십니다.
아버지 앞에서 점잔빼는 자녀의 모습이 아니라, 솔직하게 아프다고 하고 힘들다고 하고 깨어졌다고 말하는 자녀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아버지, 아파요, 힘들어요, 상처받았어요, 저 넘어졌어요. 저 얻어맞았어요. 도와주세요. 아버지, 저에게 힘 주세요. 상처 고쳐주세요. 새로운 용기와 능력 힘주세요." 그렇게 고백하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녀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함 심령"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제사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이 무엇이냐 하면 '제물'입니다. sacrifice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זבח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물"이 바른 번역이란 말인데, 히브리어 원어성경에 따라 직역을 하면 "זבחי אלהים", "하나님의 제물"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broken spirit가 하나님의 제물이란 뜻인데, 로마서 12:1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도 예배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가 무엇이라고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것입니다.
자, 보세요. 시편 51편의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물은 상한 심령이라" 이 말씀과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시편 51편에서는 상한 심령을 제물로, 로마서 12장에서는 우리의 몸을 제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따로 따로의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제물의 의미를 봅시다. 여러분 제물이 무엇입니까? 구약 제사 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양이나 소, 비둘기를 잡아 드렸습니다. 그것이 곧 제물입니다. 제물이 되려면 어떠해야할까요? 우선 깨끗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흠이 없을 것, 그리고 죽어야할 것, 이것이 제물이 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한 심령이 하나님의 제물이라고 하고 있고,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동일한 의미입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이 깨끗해지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메시아로 믿으면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음을 받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운명이 영원히 살수 있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당장에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죄이든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고백하면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메시아로 믿어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 하나만으로 나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은 것밖에 없는데, 그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은 것밖에 없는데, 그것만으로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잘 안믿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면 알거든요. 그러나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에 그 무엇도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습니다. 또한 우리의 상한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고, 치료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상한 심령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처받은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주실 것입니다.
제가 2004년도 여름에 비자 문제로 잠시 한국에 갔을 때 장신대 신대원 사경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강사가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셨는데, 예배를 인도하는 분이 강사 소개를 하는데, 이분 이름이 부르기가 좀 어려워서 잘못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강단에 서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기를, "내 이름이 구슬 옥 , 옥한흠인데, 예수님 믿기 전까지는 한없이 흠이 많은 구슬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한점 흠이 없는 구슬이 되었다"
정말 옳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까지는 한없이 흠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의롭게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점 흠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스스로를 송사하거나 정죄하거나 하지 마세요. 나를 이미 의로운 존재입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십니다.
나의 의로움의 근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일을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심령이고,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고백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두번째 조건은 죽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할까요? 죽어야지요. 누가요? 내가. 저는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항복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대한 항복선언입니다.
이어령 교수 아시죠?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당대 최고의 지성, 휴머니스트, 문화 게릴라,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현란한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 철저한 무신론을 신봉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 딸의 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는 과정을 보고 나서는 예수님을 영접했고 작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분이 세례 받은 것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과정이 있습니다.
이분이 30대에 교수가 된 양반입니다. 워낙 논리가 명석하고 달변이며 지식이 아주 풍부해서 30대 초에 벌써 명강사로 대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때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에 대해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현상으로서 기독교를 인정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는 미신이 아니냐? 그런 미신을 내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인간사회에 문화적인 현상으로 인정할 따름이다”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40년이 지난 지금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어령 교수에게는 지금 47세가 된 딸이 있는데 유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고, 30대 초에 미국 검사가 됐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약 청소년 전담으로 이름을 날리고 총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성공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32살에 암에 걸렸습니다. 수술을 했는데 4년 뒤에 재발을 해서 다시 또 수술을 했고, 3년 뒤에 또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딸의 둘째 아들은 유치원에 갔는데 자폐증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암에 걸린 것보다 자기 아들이 자폐증이라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검사니 변호사니 모든 일을 다 사직하고 아들을 위해서 자폐증 전문학교가 있는 하와이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자폐증 학교의 교장이 목사님인데 아이를 상담을 해보고서는 중증이어서 우리 학교의 평균적인 아이 수준과 달라 받을 수 없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이 딸이 그 교장을 붙들고 아이를 받아달라고, 구원해달라고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그 잘나고 자존심 강한 여자가 자식 때문에 교장을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10년간 하루도 울지 않고 잔 날이 없다고 해요. 매일 울다가 잠들고 하다보니 눈이 망가졌어요. 이어령 교수가 모처럼 하와이에 딸을 보러 갔는데 이 딸이 눈이 안 보여서 설거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이 딸이 외동딸인데, 그 귀한 딸이 눈이 망가져서 설거지를 못하는 것을 보고 “얘야 미국 사람들은 손이 커서 눈 수술은 잘 못할 거다. 손재간이 좋은 한국 사람한테 가자. 한국에서 수술을 받자.” 그래서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울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세요.”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더랍니다. 비행기에서도 울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신앙이 없으니까 그저 옆에서 우는 딸을 지켜볼 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이후 하나님께서 딸의 눈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암으로부터도 치유해주셨고, 자폐증이 있던 아들도 치유해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자신이 다니던 온누리교회 새벽기도시간에 30분간 울면서 간증을 했어요. 32살 때부터 15년간 겪었던 일을 울면서 간증을 했는데 그날 새벽에 그 간증을 들은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다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어령 박사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을 아버지인 내가 못 해 준 것을 해 주는 하나님이 얼마나 굉장하냐. 내가 못 해주는 것을 해주신 하나님 얼마나 위대하냐. 나도 신앙을 가지겠다.” 이렇게 해서 온누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된 겁니다.
세례를 받은 후 이 분이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그동안 자신은 토끼와 거북이 중에 토끼라고 생각했답니다. 중간에 낮잠을 자는 게으른 토끼가 아니라 능력도 있고 성실한 토끼였다는 것이지요. 정말 최고가 되려 했고 성실하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자신은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였다는 것이지요. 자신은 인생의 성공자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 항복선언을 했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항복선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나의 힘과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으며, 오직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님의 보혈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내가 주인되어, 혹은 돈이 주인되고 세상이 주인되고 쾌락이 주인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주인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다짐이 바로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신앙생활하다보면 여전히 우리 안에서는 내가 살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의 의지가 살아있고, 나의 자존심이 살아있고, 나의 고집과 나의 욕심이 살아있습니다.
자꾸만 내가 다시금 주인되어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죄가 나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될 때 나는 실패하고 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내게는 평안이 없고 기쁨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라는 고백과 선포가 있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며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나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다시금 나의 주인의 자리로 모시고 나를 다스려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금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내가 죽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살기를, 그리스도만이 내 안에 사셔서 나의 주인되어 주시고 나를 다스려 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배자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자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십자가에 함께 못박혔고,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왕되어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서 나를 다스리는 것임을 날마다 확인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늘 고백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또 다시 내가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확인합니다. 나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익합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안에 사셔서 나를 다스려주십시오. 내 삶의 주인 역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내 삶을 다스려주옵소서.
나의 주인되신 주님,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명하시는대로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 나의 왕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 고백이 늘 확인되어지는 자리가 여러분들의 예배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늘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항복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고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과 뜻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broken spirit,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나를 제물로 드리십시오. 죄와 허물로 깨어지고, 세상에서 깨어지고 상처받은 나의 상한 심령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심령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를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을 것이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다시금 임하게 되어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또한 제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십시오. 나는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와 못박혀 죽었으며 오직 주님만이 내 안에 사시어 나의 주인되시고 나를 다스려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다시금 하나님 앞에 항복하십시오. 하나님께 다시금 항복하는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럴 때 왕되신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려주시고 내 마음과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샬롬과 능력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4
2008년 3월 15일 종려주일,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로마서 12:1-2
지난 주 수요 제자훈련 시간 때 어느 자매의 노트북 컴퓨터를 잠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탕 화면의 배경에 큼직하게 써 놓은 글씨를 보았습니다.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친해지기" 제가 "하나님과 친해지기"라는 주제로 4주째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 주제를 노트북 컴퓨터 배경화면에 써놓은 것입니다.
그 바탕화면에 써 있는 글을 보면서 이 자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과 친해지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과 친해지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으신지요?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고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알려주십니다.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먼저 기도하세요. 들을 귀를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내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게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일 수 있고, 게으름과 불순종일 수도 있고, 염려와 근심일 수도 있고 미움과 원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배 드리기 전에, 말씀을 듣기 전에 자신을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고백하고 해결받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배의 준비입니다.
나아가 귀로만 듣지 마시고 마음으로 듣고 삶으로 들으시길 바랍니다. 귀로 들은 것을 마음에 담아 기도하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귀로 들을 것을 바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삶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깨닫게 하시고 더욱 가까이 하시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 예배에 대해서 보는데, 이미 예배는 하나님과 친해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핵점적인 방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봅시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그 어원적으로 보면 '최상의 존재에게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즉, 예배란 최상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최상의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이미 두 주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본문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절 끝에 보면 '영적 예배'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좀더 원어적인 뜻을 살려 번역하면 "이해한 예배, understanding worship"입니다. 우리 성경이나 NIV 등에는 영적 예배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본래 이 단어는 인간의 '이성'과 관련된 언어입니다. 그래서 원어적인 의미로는 '이해한 예배'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해한 예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대로 이해해서 드리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즉 제대로 알아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요? 무엇을 제대로 이해해야, 무엇을 제대로 알아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성령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한 것이 바로 로마서 1장부터 11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앞에서 우리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해를 먼저 시키고는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1절 처음이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이 그 모든 내용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마는, 지금 시리즈로 전해드리는 말씀을 통해 이미 말씀드렸고, 앞으로도 말씀드릴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만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은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출발점이 왜 창조에 관한 구절이 아니고 이 구절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나의 구주로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이 구절의 '세상'이 '내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나, 류공석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류공석으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에게 있어 세상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에게는 세상입니다. 온 우주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머리로 아는 신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아는 하나님 이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로마서 3:21-24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라."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죄가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는 그것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으며,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후회함이 없으며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 때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 때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 때, 제대로 이해할 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해한 예배, understanding worship'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사랑과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때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 앞의 구절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면 그렇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 봅시다. 먼저 제물이 무엇입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에서의 제사 때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그런데 이 제물이 누구입니까? "너희 몸", 곧 "우리 몸"입니다. 나의 몸입니다. 정확하게 해석하면 '우리 자신, 나 자신'입니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의 전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마음, 나의 몸,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마음은 이미 두 주에 걸쳐 시편 51:17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 broken spirit입니다. 죄로 깨어지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세상에서 얻어맞아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처받은 심령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숨김없이 고백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심령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능력을 사모하는 심령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심령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은 제물로 받으십니다.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는 말은 깨끗하다는 의미와 동시에 구별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깨끗해야 하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몸의 죄를 짓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고 죄의 자리에 있게 해서도 안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임을 인식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해있는 자이며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 살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몸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은사가 있습니다. 나의 재능이 있습니다. 나의 시간이 있습니다. 나의 재물이 있습니다. 나의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 있으므로 죄를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예배 때만 내 마음 드리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그렇게 드려야 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드려야 하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도록 드리라는 것입니다. 산 제물이라고 하였는데, 살아있는 제물이란 뜻입니다. 제물은 죽어야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 제물, 살아있는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참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야 산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갈라디아서 2:20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 희안한 것이 내가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되시는지요? 내가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그래서 내가 망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나도 죽습니다. 즉, 나의 옛사람이 죽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나도 삽니다. 제대로 삽니다.
그리고 예수 믿은 후에도 내가 자꾸만 살아나는데,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가 죽어야 내가 삽니다. 즉, 예수님이 나의 주인되시고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장해주실 때 참다운 의미에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내가 죽어야 산다는 말이 마음으로 이해되고 날마다 고백되고 확인되는 신앙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거룩한 제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깨끗하고 구별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을 깨끗하고 구별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뻐하시는 제물은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인데, 나의 마음, 나의 몸, 나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인데, 나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시고 기뻐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늘 우리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매 순간 순간마다 생각하세요. 일을 할 때마다, 말할 때에도, 대화를 나눌 때에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돈을 벌 때도, 공부할 때도, 먹고 잘 때도 늘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늘 생각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묵상해 보세요.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보세요. 그럼 답이 나올 겁니다. 성령님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되요. 간단하죠? 어려운 것 아니예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녀들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보세요. 그 아버지가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그냥 그 자녀들 자체만으로도 기뻐하세요. 그런데 그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살면 더욱 기뻐하세요. 그 자녀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하면 기뻐하세요.
그 자녀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 그 마음 보시고 기뻐하세요.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씀과 뜻에 대해 알고자 하고 순종하려고 하면 너무나 너무나 기뻐하세요. 그 자녀들이 서로를 사랑하려고 하면 기뻐하세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아버지 앞에 솔직하고, 늘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을 기뻐하세요. 왠지 아시죠?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부연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2절입니다. 즉, 예배로 드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2절만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더불어 영어 본문을 보십시오
"And 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e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will of God."(KJV)
여기에 보면 두 가지 대조적인 단어가 나옵니다. "본받다"(conform)라는 말과 "변화를 받아"(transform)라는 말입니다. 즉, 본받다는 말은 따른다는 말이고, 일치된다는 말이고 동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세대의 풍조와 가치관에 따르고 일치되고 동화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stop하라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거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와 가치관은 어떠합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는 문화이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문화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이 죄성으로 이루어진 문화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19-21절에 있는 것처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문화와 가치관이 팽배한 세대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보면 이런 문화와 가치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물들어 버리거나 따르게 되거나 심지어는 똑같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는 늘 이런 위협과 압력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이 세대와 동일화시키려고 안깐힘을 씁니다. 세상은 우리 성도들을 이 세대와 동일화시키려고 늘 유혹합니다. 어쩔 때는 강한 위협으로 어쩔 때는 아주 천천히 눈치 못챌 정도로 천천히 우리를 이끕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아시죠? 어떤 개구리 두 마리가 각각 우유통에 빠졌습니다. 우유가 점점 따뜻해집니다. 밑에서 불을 때고 있습니다. 한 마리는 그 따뜻함이 좋아서, 그 안락함이 좋아서 편하게 즐깁니다. 배영을 하면서 즐깁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곤 아주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냥 익어버렸습니다.
또 한 마리는 점점 따뜻해지는 우유통 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깐힘을 씁니다. 열심히 수영을 합니다. 힘껏 발을 젓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는 중에 점점 우유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우유가 치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개구리는 굳어진 치즈를 밟고 우유통 밖으로 뛰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시지요? 정말 자칫하면 우리도 모르게 이 세대에 따르게 되고 동화되고 일치되어 버리게 됩니다.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가다가라도 stop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무엇을 해야하냐? 끊임없이 자신을 transform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죄의 길로 갔다가 다시 회개하고 바른 길로 가면 그것이 곧 transform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 끊고 그것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그것이 곧 transform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keep going, 그것이 곧 transform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면서 이 세대에 따라가지 않고 동화되지 않고 일치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transform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됩니까? renewing이 됩니까? 우리의 노력과 결단, 의지로만 될까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의 의지와 결단,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무엇으로 가능하냐? 그러기 위해서는 1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즉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무엇을 말합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 독생자까지 내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우리가 능히 세상을 이기고 이 세대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으로 늘 업그레이드 되고 변화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늘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나는 연약하나 이미 세상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배의 삶으로써 드리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으로 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내가 하나님께 드릴 예배가 무엇인지를 깊게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의미를 깊게 묵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나 자신을 드리고 나의 삶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세대를 따르지 않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게 묵상하시고,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삶으로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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