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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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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들
2008년 3월 22일 부활주일, 텔아비브 욥바 교회
요한1서 5:4-5
할렐루야! 우리 주님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소망과 능력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여러분 자신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살 것을 믿습니까? 대단한 믿음이네요. 그걸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 믿지 않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부활을 믿는 것이 이성적입니까 안믿는 것이 이성적입니까? 부활을 믿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부활을 믿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우리가 합리적이다, 혹은 이성적이다 라는 표현을 쓸 때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증명할 수 있을 때 합리적이다, 이성적이다 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냐는 질문은,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고,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증명할 수 있으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증거가 없다고 하면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대달라.”고 합니다. 성경에 과학적인 설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증거는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과학적으로 잘 증거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몇 명이요? 열명, 백명도 아니고 최소 오백명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에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대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지 못해서 나중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을 막았다고 합니다.
보통 법정에서 어떤 사건이 사실로 증명이 되려면 증인이 몇이나 있으면 됩니까? 구약성경에는 두 세사람이면 되고, 오늘날 법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 한 사람의 증인으로 인해서 그 사건이 사실로 인정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그 증인이 오백명이 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오백명이 한꺼번에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헛것을 봤다고 하는데 오백명이 한꺼번에 헛것을 봤겠습니까?
한 두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수가 오백명이 넘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무서워서 다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무슨 유익이 있다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부활하셨다고 일제히 말을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서 핍박받고 순교까지 합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겁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진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겁니다. 그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한결같이 부활의 증인이 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국에 린드 허스트 경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지냈고 캠브리지 대학교 총장까지 하신 분입니다. 법조계의 최고의 권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책상 위에서 쪽지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법관으로서 증거라는 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진짜 증거가 어떤 것이고 가자 증거가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인데, 내가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하나하나 검토해보니까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존속하는 이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목사가 아니라, 신학자가 아니라 법관까지 지낸 법조계의 최고 권위자가 한 말이라면 믿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외의 증거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 외의 자료에도 예수님의 빈무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부활이 진짜냐 아니냐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 정도 증거를 대도 못 믿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겁니다. 물론 신앙이 늘 증명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은 아닙니다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 증거가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믿지 못한다는 것은 합리와 이성을 앞세우지만 정작 자신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지를 판단해 보세요.
여러분 모두는 합리적인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은 실제의 사건입니다. 확실하게 믿으세요.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으세요. 머리로도 믿고 가슴으로도 믿으세요. 그럴 때 부활은 2천년 전의 사건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2008년 오늘의 나의 삶의 현장에서도 능력으로 나타나는 사건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삶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신앙적으로 고백해야 하지만 단순히 신앙고백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저 부활절에나 기억하고 회상하고 마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인 능력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예를 들까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33-37절을 봅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겼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당시 최강의 나라인 이집트를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고 불의 세력을 멸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와 6.25 전쟁 때 순교자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믿음으로 이리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38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기쁨으로 받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떤 방법으로도 이들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들을 유혹해도 넘어가질 않습니다. 위협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핍박하고 죽음이라는 방법까지 쓰지만 그것조차도 통하질 않아요.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오는데, 그 믿음 가지고 찬양하면서 죽임을 당하는데 누가 감당을 하겠어요. 세상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가능한 겁니다. 부활 승리하신 주님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이 되었을 때 가능해 지는 겁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이기기도 하고, 핍박과 순교의 상황에서는 장차 내게 주실 부활과 영광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겁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 말로 부활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런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봅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것은 확신에 찬 선언입니다. 이길지도 몰라가 아니예요. 반드시 이긴다, 이길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 찬 선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능히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이미 세상을 이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16:33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러 가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죽임을 당하는 것은 망하는 것이고 패배한 것인데, 오히려 주님은 내가 이기었다, 내가 승리했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세상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임으로 이길 수 있다고,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방법으로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팝박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유혹도 통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죽음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물리치시고 부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역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이겼어요. 그래서 세상을 이긴 사람들은 세상에서 그 능력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세상이 더 이상 그들을 물들이거나 그들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들의 삶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이미 세상을 이긴 사람들은 세상이 더 이상 그들을 물들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좌지 우지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까딱없어요. 세상에 휩쓸려 다니지 않아요. 타협하지 않아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어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뒤집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지 않습니까? 세상은 그들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고 무릎을 꿇게 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무엇으로? 믿음으로!
이 말씀에서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일도 목사님 잘 아시죠? 청량리 588이라고 불리는 사창가에서 노숙자들과 매춘녀들을 상대로 사역을 하시는 분입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지고 자리가 잡혀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최목사님을 유혹했어요. 왜 그 고생을 하냐고, 더 좋은 자리 있다고, 이리로 오라고... 창녀촌의 기둥들에 의해 뭇매를 맞은 적이 수없이 많았어요. 그짓 그만 두라고, 안 그러면 죽을줄 알라고...
하지만 그 어떤 세상의 핍박과 유혹도 최일도 목사님을 꺽지 못했어요. 이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다일천사병원을 세우고 노숙자와 외국인근로자 등을 무료진료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이지선 자매입니다. 이미 소개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지선 자매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것처럼 불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불이 그를 사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통해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지 모릅니다.
그의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희망을 얻는 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영향력입니다. 지난 번에 지선 자매의 글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오늘 하나 더 볼까요? 십자가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오늘 고난주간 금요철야예배에 가서 성찬식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기도하다가 저는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제 아픔은 예수님의 고난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견줄 수도 없는 고난이지만
그간의 고통의 시간들이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매일 아침 죽어야 했던 화상치료실.
그 죽음 같은 고통으로 매일 점점 더해졌던 두려움의 시간.
치료 후 다시 진통제를 맞기까지 벌벌 떨면서도
애벌레처럼 기어 다시 침대로 옮겨 가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나빠질 수도 없을 꺼라고, 더 이상은 떨어질 나락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식했던 인조피부가 녹았다고..그렇게 또 다시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았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발을 굴렀었습니다.
정말 너무 아파서, 정말 내 고통은 끝나지도 않을 것 같아서
예수님도 나만큼은 안 아펐을 꺼라고 대들던 적도 있었습니다.
기도하려고 손을 모으고 "아버지…"라고만 불러도 눈물이 줄줄 흐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적을 보여달라고 간 일본에서 생일 전날, 내일 수술을 하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말도 안 통하는 그 일본 병원에서 왜 내겐 기적을 안 보여주시냐고 소리 내어 엉엉 울던 적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평범한 사람 이지선이 아닌 그저 장애인으로 대해지던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너무 어렵고 너무 속상해서 십자가 앞에 세상 무엇보다 초라하고 작은 모습으로 엎드려
나는 예수님이 아니라고 더 이상은 이걸 견딜 수가 없다고 울부짖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100억을 준다고 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보상할 수 없는 제 모습, 이전의 삶을 잃었습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할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예수님이 닦으십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의 찢김과 찔림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의 눈빛이 어떤 것인지 아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신은 아신다고 하십니다.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나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고난이 나를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 손의 못박힘이 그 창의 찔림이… 그 피흘림이...
만왕의 왕이 죄인으로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그 억울함에서도 침묵하셨던 그 예수님의 고난이
나를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초라한... 이 부족한 나를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고난으로 끝났다면 정말 저도 같이 여기서 끝이라고 절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보다 더 큰 보상은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의 새벽을 기다립니다.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그 부활의 새벽을 기다립니다.
(2003/4/19)
보십시오. 참 귀한 믿음의 고백아닙니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런 불행과 고통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고 원망하며 살았을 것인데, 지선 자매는 그 고통이 때로는 견디기 어렵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자신보다 훨씬 그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한 부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지금도 수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그런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예요. 그런데 가끔은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무능력하고 패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능력, 승리의 능력을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주셨는데 이 권세를 못 누립니다. 그래서 죄 앞에 넘어집니다. 고난 앞에 주저앉습니다. 낙담 앞에 주저앉습니다. 괴로움 앞에 주저앉습니다. 유혹 앞에 맥없이 넘어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어떤 시골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하니까 "어머니 제가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께요.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아들은 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두 달 후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제가 돈을 보내드리니 이 돈으로 편안하게 사세요.’ 그런데 돈은 없고 종이 쪼가리만 있는 것입니다. ‘이 녀석이 나를 놀리는구나.’ 편지와 함께 들어있는 종이로 문에 난 구멍을 막습니다. 매달 그 종이가 아들에게서 오는데, 어머니는 그것으로 문풍지로도 쓰고, 때로는 낙서하는데도 쓰고, 코도 풀고, 급할 때는 그걸로 화장실에 쓰기도 하고...
한 2년 뒤에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러왔습니다. 어머니가 잘 살고 있겠지 생각하고 왔는데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방문에 수표가 더덕더덕 붙어있고, 쓰레기통을 보니 수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이게 뭐예요?” “이 녀석 어미를 놀리다니. 돈을 보낸다더니 돈은 없고 종이 조각만 보내냐! 이눔아!”
그 종이가 수표라는 사실을 모를 때는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얼마나 강력하고 권세있고 파워풀한 것임을 알지 못하면 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수표예요. 액면가 무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수표인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맨날 쫓아다니는 것이 만원짜리, 천원짜리예요. 누가 그것 준다고 하면 홀딱 넘어가요. 그것이 제일 좋은 건줄 알고 따라가요. 왜? 수표의 가치를 모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가졌다면 그것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누리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주셨어요. 그것을 알고 누리는 사람이 바로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다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저 기념하는 날입니까? 아닙니다.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가 부활을 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기념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론도 아니고 기념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이고 삶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믿습니까?
오늘날 세상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우습게 알아요. 왜요? 우리 안에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예요. 그래선 안되죠. 분명 성경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이것이 그저 성경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진실이고, 바로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진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이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타협하고 휩쓸려다니고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능히 이겨내고 승리하는 사람 되길 바랍니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온다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으로 이겨내는 사람들 되길 바랍니다.
이미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읽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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