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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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진리를 잃어버린 세상에 기독교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사상과 윤리와 은혜의 힘입니다.[책 소개]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과 원칙에 관한 성경적 메시지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에 회의를 느끼며‘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고민하는 신자들을 위해 김남준 목사가 제시하는 가장 성경적이고 통합적이며 실천적인 해답이 책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중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는 말씀을 근간으로, 불의에 잠 …[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을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1365-1436호까지 한편씩 나눔  -최용우

 

1.빛으로 부르신 사람들
이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신 열 두 제자 같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 고침을 비롯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국 백성이 된 모든 사람이 바로 이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당신의 나라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그 빛으로 살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그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벧전2:9) 

 

2.신약에 나타난 빛의 용례
신약성경에서 빛을 의미하는 단어 '포스'는 약 75회 정도 나타나는데
첫째로 물리적인 빛입니다. - 이것은 자연적이고 광학적인 빛을 가리킵니다. 어둠을 비추는 자연의 빛을 가리키기도 하고 혹은 이 세상의 많은 보화 또 그 보화가 나타내는 영광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로 윤리적인 빛입니다. - 이것은 그 빛을 담지한 사람의 착한 행실로서 진리의 효과를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일 때 그 사람은 빛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신학적 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 나아가서 어떤 가치의 질서를 보여주는 효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빛은 곧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3. 빛의 본질
첫째로 빛은 그 자체가 존재입니다.
둘째로 빛의 본질은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빛을 누리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빛은 자신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 빛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물들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없었더라면 보지 못하거나 잘못 보았을 사물들을 올바로 보게 만들어줍니다.
넷째로 빛은 존재와 인식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진리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효과를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빛이 있어도 인간이 그 빛을 인식하지 못하면 사물들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4.발광과 반사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할지라도 그 빛은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을 받아서 비춘다는 점에서,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암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표면에 태양빛이 비추어 반사될 뿐인 거울이나 달의 빛과 달리, 우리가 비추는 빛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깨뜨려 우리의 지성 속으로 파고 들어와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지핀 결과라는 측면에서 암체와 비유하는 것도 적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뿜어져 나오는 것이기는 하나 우리 안에서 저절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신 진리의 빛을 받음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5. 물질주의의 그림자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중산층이 누리는 물질적 소비생활이 17세기의 왕족들이 누리는 것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하니 얼마나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곧 현대인이 더욱 행복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발달한 의학 기술들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지만 그 삶의 정신적인 질까지 포함하여 고려한다면, 반드시 인간이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경험하는 모든 비극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바깥에서 빛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물들을 올바로 보고 그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신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인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6.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
신자가 도덕적으로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죄에 대한 신적 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신자의 윤리적 삶은 그가 거룩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자의 거룩한 생활은 나 자신을 모든 가치와 질서의 기준으로 삼던 태도를 버리고 진리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7.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철학적인 깨달음이지만, 자신을 진리의 근거라고 생각하던 인간의 사상을 통하여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책을 탐독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성을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즐거워 할 줄 알고, 세상의 부조리와 악함을 보며 그것을 공격하고 개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길러낼 수 있도록 사상과 윤리의 힘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학문과 예술, 정치와 사회, 모든 학문 안에서 발견한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질서들과 연관을 이루는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포스트모더니즘 상황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이 고도의 지성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9.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이 말씀은 '현재직설법'입니다. 즉 앞으로 빛이 될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하여 빛이 되라는 당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너희는 어두운 이 세상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신 바로 그 빛이다."라는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선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백성, 혹인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어야 함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며,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힘써야 할 일입니다.

 

10.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기독교 신앙은 복음을 통해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그 일을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그 진리를 추구하며 그 빛과 하나되기를 갈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수히 많을 것이며, 또한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 부활을 통하여 나타난 사랑을 알게 되고 나면 가야할 길은 같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1.하나님의 영광의 빛-본체적 영광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는 정의될 수 없습니다. 사물에 대한 정의는 그것이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과 견줄 수 있는 다른 사물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한자이시고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비교될 수 있는 사물이 아니시기에 정의될 수 없습니다. 다만 술어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서술처럼 말입니다. 

 

12.하나님의 영광의 빛 -발산적 영광
이것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인 '쉐키나'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어떤 특별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로서 하나님 자신이 거기 계신 사실을 지시하는 표지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13.하나님의 영광의 빛-효과적 영광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높이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은 소멸되거나 감소될 수 없으며, 더욱이 인간에 의해 훼손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은 높여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인간이 그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의 위상이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는 곳입니다.

 

14.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도덕적인 삶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상 만물의 질서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세워지는 건물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도덕적 행동은 그의 신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 신념은 세상만사가 마땅히 정위(正位)되어야 하는 도리에 대한 신념입니다. 그 도리에 대한 이해가 체계적이고 확고하면 일관된 도덕 생활이 나오고, 그렇지 못하면 도덕 생활이 우발적이고 자의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내세, 절대가치의 기준 등에 대한 믿음이 도덕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그리스도인의 모든 윤리적 행동의 동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고, 그렇게 살게 하는 은혜로운 감화(感化)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성육신 안에서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거룩한 삶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에 있습니다.

 

15.하나님을 앎: 들음과 봄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관해 많이 배웠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어둠과 무지속에 살아가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그들의 헌데를 어루만지시며 땀을 흘리시고, 더러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무서운 율법의 칼을 든 하나님이 아니라, 한 손에는 우리를 때리시는 사랑의 회초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우리를 치료하고 싸매시는 용서와 위로를 들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 없던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위로와 안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품은 완벽한 쉼의 자리였습니다.

 

16.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삶
우리는 빛의 근원이 될 수 없으나, 빛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써 빛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찬란한 지식의 빛을 받고 예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 세계는 우리의 숭배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돌보고 가꾸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할 일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결코 숭배의 대상일 수 없고, 나의 진정한 보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의 연관을 알게 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17.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
오늘날 비윤리적인 행위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이러한 사람들 중에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와는 상관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어떤 이들은 한때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빛의 비추임을 받았으나 그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현재성입니다. 이전에 아무리 신앙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매일 진리의 빛 앞에서 그와 하나된 삶을 살아가려는 수고와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그렇게 비윤리적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8.진리의 빛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진리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킬지 모르지만 인간을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눈부신 과학의 기술로 우주를 여행하고 사물의 미세한 세계와 천체의 거대한 우주를 헤아린다 할지라도 그것들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무엇으로도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의 발전이나 물질의 풍요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진리는 인간의 육체를 풍족하게 할지 모르지만, 영혼을 자유하게 하여 진정으로 인간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게 하는 것은 오직 진리의 빛 뿐입니다.

 

19. 왜 '장로'라고 기록했을까요?
언젠가 어느 일간신문에 무슨 범법 행위를 저지른 인물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대개 신문기사를 쓸 때에는 이름 석자 옆에 괄호를 표시하고 나이와 직업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범인의 경우에는 특이하게 '장로'라는 교회직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 사람에 대해서 '직업'이 아닌 '장로'라는 교회의 직분을 기록했을까요?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기자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인이기에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 눈에 특별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존재에 있어서부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20.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분에 있어서 진노를 받을 불순종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외에도, 내적 변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포함합니다. 바로 자기사랑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마음의 성향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도록 변화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것들을 아는 영적 감각을 새로이 갖게 되는 것이며, 죄의 속박으로 노예 상태에 있던 의지가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돌 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 새 나무가 되는 변화이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분명하다, 원리적인 면에서 그는 이 어두운 세상에 필연적으로 빛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21.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어떠한 구별도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고 믿는 사람과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은 이웃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야 할 존재로 보는데,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다 죽는 것이 꿈이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 죽는 것이 꿈인데, 이 두 사람의 삶의 양식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22 '그 빛'이 없는 사고
만약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빛이 되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여러분의 삶이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비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말 아래 둔 등불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모든 사랑에 하나님의 중심성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고는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따라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세계관이며 가치관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분열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둘을 조화롭게 양립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3.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남겨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세상 속에서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비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자신의 인생과 세상,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올바른 방식으로 보았을 리 없는 사람들을 그 빛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되고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만 하면, 그의 존재 자체가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게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24. 세상을 비추게 하신 사람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사는 것입니다. 이 소명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가 우리를 빛으로 드러나게 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비추어져 진리에 속한 것과 거짓에 속한 것을 분별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여전히 복음과는 관계없이 헛된 꿈을 쫓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불러 주신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더욱 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25.너희의 '그 빛'으로 비치게 하라(마15:16)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 진리를 깨달았을 때,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지식들은 이미 그때 모두 주어졌습니다. 이 세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던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을 통해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느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이렇게 우리 인생이 올바른 인생이 되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모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빛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26.진리를 소유함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데, 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롬16:25) 복음이 자기 안에서 발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의 인격과 삶이 복음이 주는 의미와 친숙하여 일체를 이루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사도 안에 계시고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을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 빛의 기원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삶이 그 진리의 빛에 친숙하도록 합치되었기에 그 빛을 우리의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27.진리를 위탁하심
복음의 능력은 허공에 나타나는 능력이 아니라, 그 복음 진리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와 그 지체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위탁받은 진리를 올바르게 파수하고 풍성한 가르침으로 자기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 각 사람이 그 진리를 '나의 진리'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자기화 할 때에 비로소 세상에서 진리의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28.진리를 확장하심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를 위탁하신 그리스도의 기대는 우리를 통해 그 빛이 세상에 비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와 우리가 일체를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빛이 참으로 너희와 일체를 이루어서, 너희의 삶을 통해 환히 비치게 하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빛 때문에 예전에 보지 않던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해 비친 진리의 빛이 확장됨으로써 이 땅에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체는 '그 빛'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 빛'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사모합니까?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처럼 온전히 성취되기를 갈망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9.그리스도의 위격의 불변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 되심은 그분의 위격의 영원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진리가 되시는 것은 잠정적 조치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 혹은 교회가 맺은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일부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성자의 영원한 위격 안에서 우리에게 그분을 진리로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진리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진리에 대하여 온전히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이 이제껏 이성만으로 발견한 모든 빛을 합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비치는 진리의 빛에 비한다면 그것은 찬란한 태양볕 아래 있는 희미한 등잔에 불과합니다.

 

30.복음적 교회의 영원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 주신 계시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곧 진리에 대한 계시입니다. 교회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는 이 지상의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위격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보편 교회는 영적으로 그 빛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지상에 있는 지역교회는 그 빛을 현저히 상실하기도 하고, 완전히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한 몸으로서의 보편 교회의 빛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약하게 비치나 언제나 하나님은 교회가 그 빛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교회가 그 빛이며, 그것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31.지상 교회에 대한 섭리
역사적으로 이 세상은 그 빛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싫어하고 핍박하였고 그것은 물리적인 박해와 사상적인 억압으로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사상이 교회를 스치고 지나갔고 근대에는 계몽주의의 거센 물결이 교회를 덥쳤습니다. 나라와 제국들에 의한 치열한 박해가 있었고, 이성주의로 흘러가 신앙을 버리는 나라가 속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 교회에 있는 그 빛을 제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단이 지나가면 정통교리는 더 견고해졌고 핍박이 지나가고 나면 교회는 더욱 강하여졌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을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쇠퇴하는 것 같고 때로는 종말이 가까운 것 같았으나 결코 그 빛의 흐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32.교회의 정체로서의 그 빛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는 그 빛이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하고 파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편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을 따라 영원합니다. 때로는 진리의 빛이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 빛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적 교회의 영원성이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3.다시 타오르게 하시는 하나님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에는 빛이 있고, 따라서 그 교회의 지체된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빛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그런데 등불은 심지를 올려 환하게 빛날 수도 있고, 심지가 신통치 않고 기름도 부족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언급처럼 "꺼져 가는 등불"일 수도 있습니다. 등불의 기름이 다 떨어져 심지의 불꽃이 꺼져 갈 때 그을음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심지를 제거하거나 혹은 입으로 불거나 손으로 비벼서 아예 불꽃을 꺼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렇게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을음을 내며 사위어 가는 심지조차 등불로 여겨주시며 다시 기름을 부어 타오르게 하셔서 어둠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34.가변적 교회에 위탁하심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빛과 그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진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며 다른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려고 합니까?", "특별히 행복할 만한 환경이나 조건이 아닌데도, 당신이 그렇게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인 당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그렇게 묻는 세상 사람들의 언어로 충분히 답할 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35. 진리의 빛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진리의 빛을 더욱 많이 발견하고자 몸부림칠 때, 어찌하든지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려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힘쓸 때,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 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혼자서 수 없는 밤을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던 인생의 문제들이 그 빛으로 말미암아 해결이 됩니다. 인생의 문제는 반드시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돈도 건강도 젊음도 있었으나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받고, 이 세상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에 붙들려 사는 행복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이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빛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36. 무시당하는 진리
때로는 진리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습니다. 또 진리를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 진리가 설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그 빛을 완강히 미워하고 거절한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것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변적 교회에 진리를 위탁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이 냉담하고, 성도라 불리는 사람들이 진리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37.진리에 대한 불신자들의 사상적 도전
현대의 사상은 가치 질서의 중심에 인간 자신을 두고 있습니다. 불변하는 진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배척하려는 세계관을 수립하려는 경향성은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38.진리에 대한 불신자들의 윤리적 도전
불신자들은 기독교의 윤리적 기준들을 논리적으로 무시(절대 가치와 절대 진리에 대한 거부)하고, 기독교의 윤리적 기준들을 실천적으로 무시(개인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김. 탈 구범화)합니다.

 

39.진리에 대한 신자들의 잘못된 교훈으로의 방해
복음과 복음 교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사상적 자유화에 쉽게 물듭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훈들(신사도운동,번영주의 등), 탈 신학적 설교들, 다양한 이단들이 범람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조차 진리의 가치를 신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0.진리에 대한 신자들의 그릇된 삶으로의 방해
세속적인 생활방식은 신자 안에도 존재합니다.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밖에서 기쁨을 찾는 것은 영혼의 질병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41.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창조하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목표는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사물 안에서, 심지어 악의 현존을 통해서조차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아름다움을 찾아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설교는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고, 목양은 양떼가 그것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42.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처럼 창조하지 않으시고 마치 당신 자신이 당신을 아시는 것처럼 인간도 자기 자신을 아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인간은 진리를 보고 기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사다리 삼아 단순하고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과의 지복의 교제 속에서 살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진리와 추루한 욕망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열어 놓으셨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을 원하셨습니다.

 

43.'그 빛'의 공동체적 성격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당신의 자녀들과 교회의 그 빛이 가변적이도록 내버려두신 이유는 그 빛의 공동체적 성격 때문입니다. 진리의 빛은 개인에게 알려지지만 공동체에 위탁됩니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구약의 개인에서 가정으로, 신정 국가로, 그리고 신약의 교회로 이어져 왔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진리의 빛을 직접 위탁받은 지상의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가정이 참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는 신적 기관이라면 교회는 어떻게 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우는 신적 기관입니다.

 

44.그 빛에 참여한 교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르는 삶의 기쁨을 안 사람들은 그것 없이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빛 안에서 사는 즐거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따르는 커다란 윤리적인 결단일지라도 그것은 곧 큰 기쁨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작은 윤리적인 결단조차도 끔찍한 희생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반대하는 결단들이기 때문입니다.

 

45.교회에 성경을 주심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성경을 주심으로써 세상이 그 빛을 위탁받은 교회의 빛을 보고 돌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안에 당신의 빛들을 남기셨습니다. 실로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중 그분의 빛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것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의 도움을 통해 인간의 지성으로서는 추측하여 알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을 알지 않고는 결토 인간이 자신이 창조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진리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계시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만큼 성경의 형태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게시의 특별한 형태입니다.

 

46. 성경의 해석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 왔어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의 빛이 성경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마치 보화를 담은 광산이 탐광을 기다리듯이 교회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할 수 있는 한, 성경을 올바르고 풍부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으로 경주하여야 합니다. 한 편의 설교는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려는 노력과 함께 시작되어야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강조는 성경 해석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47.교리의 수립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의 결과물들은 마치 예쁜 구슬과 같습니다. 그 구슬들을 성경의 원리에 따라 교리라는 실로 서로 꿸 때 유용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이 됩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바로 성경 본문의 의미를 통하여 신앙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들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열심히 성경을 해석하고 그 참된 해석들을 소재로 하여 자기들이 믿는 신앙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48.신앙의 변증
 기독교 교리는 단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주고받는 종교적 사실들이 아닙니다. 이 교리는 교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확인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들을 통하여 진리가 아닌 이 세상에 대하여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표명하는 논리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선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둠에 있으며 또 그 어둠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빛의 본질뿐만 아니라 어두움에 본질에 대해서도 연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사람들이 사랑하는 어두움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틀과 용어를 가지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을 이해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49. 목회사역으로 드러나는 '그 빛'
목회사역은 성경에 주신 그 빛을 밝히 드러내어 성도들 마음 안에 담음으로써 그들을 개별적으로 이 세상에서 빛들로 살게 할 뿐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그 빛의 총화를 통하여 이 세상에 진리를 보여주게 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주신 성경 계시의 빛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목회사역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50.인간의 마음에 그 빛을 담으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빛은 이 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실제로 그 빛을 누려야 할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그 진리의 빛을 담으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외부의 사물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판단하며 그것에 대하여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을 갖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사물들이나 사실들을 판단하고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의 요체는 인간의 마음에 그 빛을 가득 담아 성도들로 하여금 그 빛을 사랑하고 그 빛을 마음에 적용하여 그 빛의 사람이 되게 하고 또 그 빛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51.은혜의 부패와 마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순수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시험하는 율법사에게 제일먼저 망므을 다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목숨이나 뜻보다 마음을 먼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마22:37-38)

 

52.'그 빛'의 누림이 하나님께 의존함
어두운 세상에 있는 교회가 간절히 구할 것은 보다 많은 회중도 아니고, 더 넓고 큰 교회의 대지나 건물도 아니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고가의 악기도 아닙니다. 심지어 경영의 능력이나 수완도 아닙니다. 그것은 찬란한 진리의 빛이 교회 안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우주적 보편 교회와 지상 교회가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로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괴테가 침대에서 죽어 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 창문을 열어. 더 많은 빛을 내게 비추도록..."

 

53.하나님과 생명의 역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진리는 비록 면도날처럼 예리한 지식이 아닐지라도 성령 안에서 선포될 때 모든 인간의 지혜를 굴복시키는 장중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성령과 말씀의 경험 안에서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자가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진리를 배우고 또 많은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54.하나님만을 의지함

한 시대의 교회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애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우리의 모든 신학활동은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실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경외심에 가득 찬 간절한 기도야말로 성령의 인도를 받기에 가장 적합한 신학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렬한 기도의 실천 없는 진리에 대한 탐구는 지적인 즐거움에서 끝나기 쉽습니다.

 

55. 산 같은 사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경건의 첫 번째 요소는 산 같은 사상입니다.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세우고, 그 지식들을 삶의 실천과 관계지으면서, 진리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약 1700년 동안 계속 이어져 오던 기독교적인 전통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는 이 일에 봉사하는 진리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던 기독교 신앙이 이제 와서는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확신이 있을 때에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살고 행동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과 같은 사상을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진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겨우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거나 죄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지혜자로서 창조세계와 인간과 자신에 대하여 통일된 사상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바라보며 해석함으로써 자신이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갈 뿐 아니라 이웃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56.물 같은 마음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지식 속에서 더 많은 그 빛을 발견하여야 하며, 성령의 은혜 안에서 더 온전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알게 하신 진리의 빛이 아주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부요해지는 것은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비록 불신자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고 여겨질지라도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소원을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더 많은 진리를 주시면 더 철저하게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 더 많은 영광을 주님께 돌리겠나이다."

 

57.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예수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현실을 버리면 안 됩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문제지만, 현실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천하는 삶과 신앙과의 연관성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현실과 유리되는 것이라면, 구원받는 순간 장렬하게 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죄의 때가 묻기 전에 하나님 앞에 가게 되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현실을 깊이 인정하며, 순교의 각오보다 더 철저한 각오로 그 세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신자로서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은 세상의 불의를 용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현실을 끌어안고 그리스도의 진리로 녹여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58. 꾸짖을 세상을 알고 사랑함
시대정신을 꾸짖기 위해서는, 말씀의 빛 아래서 그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현대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판단하고 꾸짖을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바르게 하는 끈질긴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빌2:5) 이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빛으로 사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조명가게에 수없이 매달린 등기구처럼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과 관계없이 빛인 제자들 속에서 또 하나의 빛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59. 거목과 같은 신학자들
저는 오늘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들에게서보다 지난 세대의 거목과 같은 신학자들에게서 훨씬 더 많이 배웠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깊은 신학 사상의 세계를 탐구하노라면 마치 누구도 다가가보지 못한 히말라야 설산의 영봉들을 밟는 것 같은 장엄미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그들의 작품을 버렸습니다만, 저는 지금도 유럽 출장 길에는 꼭 고서점에 들러 수백 년 손 때 묻은 그 고서들을 구입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책이 먼지 앉은 골동품처럼 보이겠지만, 저에게는 거룩한 지혜의 보고이기에 수집하고 공부합니다.
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읽으며 받았던 그 빛의 광채를 말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그 책의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대한 저작물들 중 두 권을 다 읽기 전에 그가 천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저자의 지성의 크기와 힘 앞에서 저의 정신의 초라함과 무력함을 대조하며 눈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60.빛을 따라 산 사람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들려오는 그 빛을 잃은 그리스도인에 관한 우울한 소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무지하고 불법한 자들만 살아가는 것 같은 시대에도 언제나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그들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수도 있고, 기억조차 해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사모하며 그 빛을 따라 사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의 빛과 윤리의 빛은 자기 시대뿐 아니라 이어지는 세대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 빛이 될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그들이 비춘 그 빛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 시대를 그 빛으로 섬긴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등불이 됩니다.

 

61.시대정신의 본질

자신을 온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자신이 창조된 목적과는 상관없이 스스로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정신의 본질은 바로 죄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왜냐햐면 죄는 하나님의 중심성에 대한 모든 반항과 무협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대정신의 본질에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무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그 죄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 하는 적의이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에서 태어난 인류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죄가 내재합니다. 그래서 학습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모든 기능에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한 성향이 우세하게 작용합니다. 여기에 시대의 정신까지 합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중심성과 인간에게 계시하신 도덕의 기준들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듭니다. 

 

62 시대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육신으로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과 지상의 나라를 함께 만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바로 생각과 삶이 시대의 정신의 틀에 찍힌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변전하는 세상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63. 시대를 거슬러 사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복음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한, 그는 결코 이 세상을 온전히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저절로 이 시대의 정신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열렬한 삶을 통해서 비로소 이 시대를 거슬러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64. 두 틀
성경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성을 가진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여기에 두 주체가 개입하여 자기의 틀을 반영한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그 두 주체는 그리스도와 세상으로, 세상이라는 틀에 찍혀서 나오면 그는 시대정신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사람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전(全) 본성을 새롭게 하십니다.

 

65. 두 가지 틀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은 시대 정신이 사람들을 찍어 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각 사람의 영혼을 신비롭게 거듭나게 하시고 그의 지성을 설득하시고 의지를 감화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참된 인간의 형상을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잘 계시되었습니다. 어쨋거나 인간은 세상이라는 주체의 틀에 찍혀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리스도라는 주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빚어지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인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66. 비치게 하라
어둠 속에 등불을 비췄을 때, 정말 보고 싶은 것은 등불이 아니라 그 불빛을 받아서 이제 보이게 된 방안의 사물들입니다. 그래서 등불로 방안을 두루 비추어 어디에 문턱이 있고 가구가 있는지를 살펴 그 방을 안전하게 걸어 다니도록 도움을 받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빛을 비치게 하라는 명령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고있는 진리의 빛을 세상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 그리하여 너희가 그 빛으로 비추어 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분별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빛 때문에 새로운 이해와 판단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라."

 

67. 사랑은 교통입니다
사랑은 교통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기사랑은 단절적 사랑이고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교통적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사랑하지도 않고 생각나지도 않았던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고 그들의 영혼의 곤궁한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경건한 슬픔이 폭포수처럼 솟구쳐서 그들을 그 진리를 모르는 어둠과 비참한 상태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안 그리스도인의 운명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이 필연처럼 역사하게 될 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일치를 이룹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68. 창조에 대하여
성경은 창조를 말하지만 세상의 빛은 모든 물질이 영원 전부터 있는 단자(單子)라고 주장합니다. 창조는 처음부터 없는 개념이으로, 모든 물질은 영원 전부터 단자로서 존재하고 있다가 무수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도 물질적 필연을 따라 등장한 개체일 뿐입니다. 이런 사고 속에서는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또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사유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은 창조에 대해 전혀 다른 설명을 합니다. 원래는 하나님 한 분만 계셨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서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개의 세계는 하늘의 영적인 세계와 이 땅의 물질의 세계인데, 하나님은 그 가운데 특별히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부여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우연히 어떤 물질로부터 진화되어 등장한 개체가 아니라,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다스리며 하나님과 가족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69.타락에 대하여

이 세상은 오늘날 인간이 이렇게 비참하고 괴롭게 된 이유를 "종교와 도덕의 개입으로 자유가 억압된 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설명을 합니다.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좌우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아래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피조세계를 잘 돌보고 가꾸며 살아가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그 모든 질서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타락이고, 이 타락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징후로 이 세상에 수많은 악과 부조화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70.구원에 대하여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에 빠진 인간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출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그 비참함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우주의 중심이자 모든 가치의 최고봉이라 생각하는 죄성과 교만과 무지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간을 원래의 창조실서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71.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는 인간의 마음에 배척되기도 하고 받아들여지기도 하면서 밤하늘에 별들이 명멸하듯이 인간의 도덕 세계 안에 선과 악이 반짝이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의 도움 아래서 이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심으로써 창조주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불의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로운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이시며,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비참한 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72.대적할 세상과 끌어안을 세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은 대적하여야 할 세상인 동시에 사랑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올바른 질서로서 분별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대적하여야 할 세상 안에 있는 요소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여야 할 것을 대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그 빛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올바르게 분별하고 이에 합당한 정서를 가지고 올바르게 의지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 있는 무엇이 끝까지 대적해야 할 것이며, 또 무엇이 끝까지 끌어안고 사랑하야 할 것인지를 올바로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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