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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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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참고: 히 11장 23절-31절)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중에 여자가 어찌 요게벳 하나만이겠습니까? 많은 이스라엘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스라엘 여자들은 하나님께서 모세 같은 그런 어린아이를 자기에게 주실 때에 그 아이를 자기 손으로 다 낙태시키고 죽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요게벳은 모세 이 아이를 받아 감사함으로 길렀습니다. 받을 때 감사, 기르면서 감사. 그러니까 아이를 받고 원망하면서 기르지를 아니했습니다.
사실인즉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가 이 모세를 받아가지고 기를 수 있는 사람이 아마 그렇게 많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보아집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면에서 볼 때에 진리 따르는 신앙양심을 다 죽이고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모세를 기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오늘날 누가 요게벳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그 옛날 요게벳 하나만을 위해서 역사하신 것이겠습니까?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신앙, 진리 따르는 양심, 진리지식을 죽이지 않는 이 요게벳을 바라고 계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도맡아서 기를 자가 누굴까’ 하고 찾으신다 그 말이요. 요게벳을 찾으신다. 왜? 요게벳을 죽이려고, 아니면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모세를 받았다 하면 요게벳은 그 날로 투쟁을 해야 됩니다. 바로 왕은 ‘아이를 죽이라’ 그러고, 세상이 와서 ‘죽이라’ 그러고, 세상이 성도에게 와서 ‘진리 따르는 양심을 죽이라’ 그러고, ‘진리지식을 죽이라’ 그럽니다. 요게벳인 나는 ‘못 죽인다’ 그러고.
바로 왕은 자기 스스로 모세를 못 죽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어머니 자기가 죽이지 않으면 죽일 자가 없는 거요.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말이요. 물론 가견적으로 보면 싸움의 상대는 왕이지요? 왕은 영토가 있고 국민이 있고 또 군대도 있고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영광도 있고 부귀도 있고 모든 무기를 다 갖추고 있고.
그러나 그 왕을 대항해서 싸우는 자는 나약한 여자요, 종이요, 돈이 없고, 경제력도 없고, 자유마저 빼앗기고 있습니다. 자기 개인적인 주권과 자유는 없습니다. 그가 왕을 대적해서 싸울 무기라고 하는 것은 진리 따르는 양심하고 진리지식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받은 신앙양심 또는 진리지식 그것가지고 애굽 왕과 싸우는 겁니다. 오늘날도 이런 싸움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을 싸우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생명적 하늘나라의 신령계의 축복적 계대의 자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다니엘서에도 보면 그게 나오지요? 느브갓네살 왕은 권력으로 무기로 군대로 동원시켜서 예루살렘을 파괴시켰지만, 무기로서 정복을 했지만 그 때 10대 소년 누구지요? 다니엘. 이 다니엘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물려준 진리지식, 신앙정신을 이어받아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느브갓네살 왕과 영적 정신적으로 싸움을 걸었다 그 말이요.
이 싸움에서 끝내는 누가 이겼지요? 오, 다니엘. 이 다니엘 앞에 느브갓네살 왕이 와서 넙죽이 절을 했지요?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다. 너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사람이다’ 하면서. 이거 멋있는 싸움 아니요? 우리 신앙성도들에게는 이게 있어야 돼.
믿는 자가 신앙 정신력에 있어서 이런 싸움을 할 줄 모르면 이건 죽은 거예요. 명칭적 호칭적으로는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사상 예수정신이 없는데 그게 무슨 예수 믿는 거요? 세상이 와서 이리 끌면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면 저리 끌려가고 하는데 무슨 싸움이야. 싸움이 안 되지. 잡아먹힌 거지. 정복된 것만이 아니고 상대의 밥이 돼버린단 말이요. 그 어디 쓰겠어요?
아침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잘 믿는데 쓰라고 일반은총으로 준 일반적인 재간이 있지요? 이건 달란트라는 그런 의미하고는 달라요. 일반은총으로 준 재간 이건 복음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인인관계 연관적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접속물이요 매개물이지요. 그렇게 써나가면서 신앙 정신적으로 줏대가 있게 싸워야지요. 그런데 진리지식을 빼앗기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마태복음 5장에 너희는 세상에서 무엇이다? 빛이다. 또? 소금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자체화 된 복음 없이, 자체화 된 신앙사상 없이 주일날이고 뭐고 상관없이 가서 돈 안 받고 봉사활동을 하면 그게 소금이요?
소금의 역할을 활동에다가 두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못 찾습니다. 찾아질 수가 없어요. 자기 속는 거지. 소금이 뭐요? 역할 이전에 뭐가 돼야 되요? 소금이 돼야지. 소금도 안 돼 있는데, 소금의 정신 사상도 안 들어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복음적인 역할을 한단 말이요. 이용이나 안 당하면 천만다행이지.
우리는 진리지식을 가지고 왕하고 싸우는 겁니다. 그 때 당시로 보면 애굽의 왕과 싸우는 것이고. 여러분들 속에도 애굽의 왕이 없습니까? 애굽의 왕이 있어요. 애굽의 왕하고는 배짱 가지고는 못 싸워요. 안 되는 겁니다. 애굽 왕에게는 명예 영광 등 모든 게 다 있어요.
애굽은 애굽 나름대로의 지식이 있어요. 애굽의 왕이라고 그러면 세상에서 최고의 엘리트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왕을 뭘 가지고 이겨내겠어요? 진리 따르는 신앙양심밖에 없어요. 진리지식밖에 없어요. 진리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자기는 싸우려야 싸울 힘도 없고 기력도 없고 의욕도 없고 이길 재간도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 믿음으로 승리를 못한다 그 말이요.
그러나 내가 진리지식을 버리지 않고 싸운다면 이것은 백전백승이요. 진리가 있으면 안 집니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싸우고 나가니까 누가 점령을 당하는가 하니 왕의 딸이 누구지요? 공주가 점령을 당했어요. 영적으로 말한다면 공주가 요게벳에게 점령을 당했단 말이요.
공주가 요게벳에게 정복을 당하고 나니까 왕과의 전면적인 싸움이 누구와 붙은 거지요? 왕하고 누구하고 싸움이 붙었어? 공주가 모세를 데리고 갔으니까 왕이 누구하고 싸우겠어? 공주하고 싸우지요. 그러니까 딸하고 아버지하고 싸움이 붙은 겁니다. 모세로 인해서 집안싸움이 돼버렸어요.
모세를 보고 왕은 ‘보나마나 이거는 히브리인의 아들이다. 갖다 버려라’ 그럴 것이고, 그러면 공주는 요게벳에게 정복을 당했으니까 ‘이 모세를 못 죽인다. 내 아들을 삼겠다’ 그러고 있고. 그러니 천상 아버지가 져야지 뭐.
그런데 공주가 모세를 기를 때에 모세가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게 다 어디서 나와요? 공주의 아버지 왕으로부터 나오지 뭐. 그러니까 왕의 돈을 가지고 모세를 길러나가는 거지.
그러니까 첫째는 진리지식이요, 두 번째는 자기가 모세만 죽이지 않으면 자기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백전백승이다. 그러니 자기 속의 모세를 절대로 죽이지 말아요. 자기 속의 모세를 죽여 놓고서는 절대로 믿음이 안 들어갑니다. 들어갈 리가 없고, 자라지도 못하고, 신앙인도 안 되고. 성경책 들고 일 년을 그렇게 믿어도, 십 년을 그렇게 믿어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믿어봐야 그렇게 믿으면 평생 그대로야.
자기의 믿음은 자기 후손이나 마찬가지고, 자기의 후손이 있다고 그러면 그건 자기의 영광이지요. 말하자면 믿음이 있고 신앙이 있는 거는 자기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차원이 인격적으로 자꾸 올라가요. 반드시 올라가게 돼 있어요. 자기가 교회에서 옳은 진리지식을 받고 옳게 살려고만 한다면 그 신앙성도는 분명히 깨달음으로 성장하게 돼 있고 자라게 돼 있어요. 사람이 온전하게 자라게 돼 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자기 속의 모세를 죽여 놓으면 자기에게 그건 없는 겁니다.
이질적인 교훈을 받는다고 그러면 그거는 타에게 이용감으로 당하고 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나쁘게 말한다면 신앙사기 당하고 살았다. 그거는 사기 당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아닌 말로 예수를 수 년 동안 믿었다고 해도 그 사람 속을 한 번 들여다보면 여러분들, 그 왜 쌀 뒤지 속에 좀 먹은 쌀 있지요? 구석에 보면 속은 텅 비어있고 거미줄처럼 너덜너덜하게 딸려오는 쌀이 있지? 그거나 다름이 없어요. 겉은 쌀인데 속은 알맹이가 하나도 없어. 다 도둑맞은 거요. 종교적으로 보면 신앙사기 당한 거고, 세상적으로 보면 세상에게 다 도둑맞은 거고 그래요.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바로 왕은 ‘모세를 죽이라’ 하고, 요게벳은 ‘죽이지 않겠다’ 하는 그 역사를 볼 때에 세상 바로는 세상을 대표하는 거거든요. 세상이 와서 내 속의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거, 진리의 신앙양심을 죽이려고 하는 거. 이 역사는 세상 마지막 그날까지 여러분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오늘날 기독교인치고 모세를 돋보고 부러워 안 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를 주목해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별로 드러나지를 않고 모세만 크게 드러나지요.
그런데 사실 모세를 모세답게 키운 것은 모세 어머니 요게벳이지요. 이 요게벳은 교회도 될 수도 있고, 진리적으로 나가는 신학교도 될 수 있고, 가정도 될 수 있고, 가정의 부모도 될 수 있고, 교회적으로 성도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공주는 모세를 길렀지만 주워다가 길렀지요. 주워다 길렀기 때문에 이 공주는 아마 자체화가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히브리서 11장 23절로 31절 한 번 읽어봅시다.
히 11장 23절-31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절대로 자기 속의 모세를 죽이면 안 됩니다. 모세는 자기의 영광입니다. 이 모세를 살려야 돼요. 모세를 살려야 만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바가 돼요. 모세를 죽여 놓고도 하나님 손에 붙들려? 그건 말이 안 되지. 그건 자기 스스로 속는 거지. 모든 이치가 그래요. 하나님의 손에는 붙들리지 않고 자꾸 인간 자기의 잔꾀가지고 하는 걸 하나님의 일꾼처럼 말을 하는데 성경의 원리가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이제 히브리서 본문을 의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래는 하나님 한 분만 자존하여 계셨고 그 외의 모든 존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들 중에는 신령계에 속한 것과 신령계에 속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지음을 받았던 간 다 하나님의 어떤 목적 하에서 지음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이 수수 많은 피조물들 중에 가장 특수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것이 바로 인간 자기입니다. 가장 특수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것이 누구라고요? 바로 인간 자기. 나는 하나님의 특수 목적물이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신령계의 천사도 특수목적물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특수 목적물이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나는 이 세상의 그 누구로부터 어떤 지식을 받고 사느냐’ 하는 이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지식을 넣어주고 가느냐’ 하는 이것도 중요해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도 또 중요하고. 아주 이게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70명이 애굽에 들어가서 60만 대군으로 나오기까지 430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하고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고받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 말이요. 그 면에 대해서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요게벳이 세상 학적으로 보면 상당히 빈약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바른 사상이 들어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부모들이 혈육적인 부모나 교회 교역자나 교사들이나 자녀들을 기름에 있어서 내가 어떤 지식을 넣어주느냐? 가르치는 자들이나 부모들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보통 큰 책임이 아닙니다. 큰 책임이요.
부모들이 알았던 몰랐던 우리 부모들이 과거에 나에게 무엇을 넣어주고 갔느냐? 그 면에 대해서 아마 만족할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생전에 부모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받지 못한 것을 한을 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은 우리 후대에 진리지식을 줄 그 면을 생각을 하면서 ‘나는 두 번 다시 과거의 조상들처럼 쓸데없는 걸 물려줘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옳은 진리지식을 넣어주어야 하는 겁니다. 부모들에게 큰 책임이 있어요.
하나님이 부모들에게 자식을 준 이유가 뭐라고요? 뭘 넣어주라고 자식을 준 겁니까? 진리지식을 넣어주라고 자식을 주었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언제부터 교육이냐 하면 태아부터 교육입니다. 그리고 출생을 해서도 어린아이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언제부터 지식을 받은 것 같아요? 출생 당시 때부터입니까, 서너 살 때부터입니까? 몇 살 때부터 자기가 지식을 받은 거 같아요? 모르지요?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린아이에게 지식이 언제부터 들어가는 건지는 모르지만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교육하는 것은 딴 세상적 일반지식이 들어가기 전인 아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넣어줘야 합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게는 그런 정신이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이 모세를 주지를 아니 않고 바로 그런 요게벳에게 모세를 주었다 그 말이지요.
만약의 경우 아기 예수를 저 사창가에서 태어나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는 평범한 신앙은 아닙니다. 절대로 평범한 신앙은 아니요. 예수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족보를 왜 그렇게 해 놨느냐? 단순히 ‘하나님께서 예언한 그것이 사람을 통해서 나왔다’ 그렇게만 보면 안 되고, ‘왜 성령님께서 기록자들을 등용시켜서 족보부터 기록을 해가지고 이렇게 마리아가 나왔는가?’ 이렇게 보면서 이 족보를 위에서부터만 보지 말고 마리아로부터 거슬러서 올라가며 보면 마리아의 그 신앙이 거슬러서 거슬러서 올라가고 있어요. 참 옳은 신앙을,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심을 찾기 위해서 그 족보를 타고 올라간단 말이요.
그리고 마리아가 가만 앉아 있으면서 그 신앙을 타고 또 이렇게 마리아에게로 내려온단 말이요. 그래서 그 족보가 다 기록이 돼 있는 겁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줬는데, 마리아가 도성인신의 예수님을 받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의 경우 오늘날 여성 여러분들에게 그 예수를 줬다면 어떨까요? 예수를 예수 되게 키울 수 있을까요? 보나마나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권투학원에 보내고, 레슬링 학원에 보내고, 컴퓨터학원에 보내고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니 예수를 안 줬지요. 줬다간 이건 뭐 하나님 사업 다 망쳐먹게?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 부모들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성도들에게 일반지식이 들어가기 전에 진리지식부터 우선적으로 첫째로 꼽아라 그 말이요.
나라고 하는 나에게는 죽을 때까지 내 인격의 진리지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있어요.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옳은 지식, 진리지식을 갖는데 따라서 인격에 변화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좋네, 나쁘네’ 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 속에 진리지식만 들어간다면 그 사람은 변화가 오게 돼 있어요.
사람마다 속에 든 대로 나오게 돼 있어요. 사람마다 그 독성이 다 다르게 나와요. 그러니까 선악과 속의 그 독성이 다 든 거지. 그걸 바로 고치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 그렇지 않겠어요?
사람은 지식을 갖는데 따라서 인격의 변화가 온다. 그러니까 믿음이 성장되고 바로 되고 좋아지려면 진리지식을 갖는 수밖에 없어. 다른 도리가 없어요. 사람을 데려다가 아무리 두들겨 패도 그 사람 속의 사상은 변화되지를 않아요. 벗겨지지를 않아요. 불가능이요. 하나님의 진리사상이 들어와서 세상사상은 다 뽑혀나가고 그 진리사상이 그 인간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그 사람이 바로 돼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보면 성질이 고약하거나 성격이 고약하거나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어느 사람을 한 면만 보고서 그 사람을 ‘너는 아예 그렇다. 구제불능이다’ 하고 붙여버리기 쉽습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지요.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아주 지독하고 고약한 사람이었어요. 그렇지요? 또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현재적으로도 잠재의식 속에 그럴 마음이 얼마든지 들어있어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진리지식에 대한 감화를 많이 받아야 된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이 세상적으로 많이 감화를 시키려고 그러지요? 우리 신앙성도들은 자녀들을 신령한 천국 쪽으로, 말씀 쪽으로 감화를 많이 시켜야 돼요. 이게 부모 자기에게 영광이요.
그리고 죽음 저 편에 가서 후회치 않으려면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의 생모이지만 그러나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를 모세 되게 기르는데 있어서 그 생모가 아닌 다른 애굽의 아무 여자에게 ‘내 아이를 길러다고’ 그럴 수가 없단 말이요.
구원도리가 바로 사상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의 사상 정신인데, 사상 정신은 구원도리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러면 구원도리는 뭐냐 하면, 사상은 뭐냐 하면 신의적인 믿음의 바탕에서 신앙적 믿음으로 되어지는 거.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서 믿음이 자라나가는 거.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적으로 볼 때에 ‘누구로부터 배우느냐’ 하는 게 중요하지요? 모세가 어렸을 때에 무엇을 배웠을까요? 처음에 진리지식부터 먼저 배웠어요. 그러니까 자녀교육에 있어서 진리지식이 우선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요.
모세가 어렸을 때에 왕궁에서 어학도 배우고 문리학도 배우고 철학도 배우고 생물학도 배우고 지리학도 배웠습니다. 애굽의 모든 박사들이 와서 가르치는 거지요? ‘공주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박사들이 와서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모세가 어려서부터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우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생모 요게벳의 교훈이 있었습니다. 개인적 노예요 민족적 노예요, 학박사도 없고 간판도 없는 어머니 요게벳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생모의 젖줄을 타고 내려가는 그 정신 속에는 신령계에 속하는 생수가 흘러서 들어가는 거지요. 이것이 기준이 되고 이것이 점점 자라나서 모세 육체를 움직여서 훗날에 자기 백성을 출애굽을 시킬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그 말이요.
오늘날 저도 여러분들을 보는 것이 그렇습니다. 저는 교인숫자 키우려는 그런 마음은 없어요. 저는 학박사나 유명한 학교에 다닌 그런 거는 없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여러분들이 오직 진리사상으로 철저히 무장을 해서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훗날에 자기 개인이나 연관된 이웃을 신앙적 성분적으로 출애굽을 시킬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되길 바라요. 제발 우리교회 교인들은 딴 데 가서 끌려 다니는 그런 자들은 되지 말아라 그 말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이 진리로 연관되고 아는 사람은 그래도 딴 교회에 가서 교사노릇을 하고 애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고맙긴 해요. 생각을 해봐요.
제 자랑은 아닙니다마는 우리교회에서 받는 교훈의 도는 차원이 굉장히 높습니다.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도 자화자찬이 아니고 딴 거와 비교해 볼 때에 여러분들에게 이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인간 자기는 누구든지 자기 속에 들어간 대로 나오게 돼 있어요. 그건 속이지를 못해요. 먹은 대로 뒤로 나오는 거 아니요? 쌀밥을 먹었는데 뒤로 빠지는 건 보리 똥이 빠집니까? 그렇지 않지요? 먹은 대로 나오게 돼 있어. 자기가 어느 교회에서 뭘 배웠느냐? 들은 대로 입으로 나오게 돼 있어요.
그리고 모세 어머니가 모세를 가르칠 때에 늘 새롭고 다른 애굽의 것을 계속적으로 가르쳤을까요, 아니면 늘 성경에 있는 같은 말을 했을까요?
제가 들은 소린데 제 설교를 듣고서 ‘맨날 같은 말이다’ 그런 말하는 사람이 있다던데, 여러분들, 제 설교가 맨날 같은 말입니까, 다른 말입니까? 물론 분석해 보면 성경은 한 사건을 가지고 이 면을 말하기도 하고, 저 면을 말하기도 하고 그래요. 사랑 면, 진리 면, 의 면, 선의 면, 능력적인 면, 이런 면을 다 말하고 있어요.
늘 같은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은 늘 온전자가 되라 그 말이요. 성경 어디를 봐도 우리의 온전을 위해서 주는 말이고. 그래서 하나님처럼 온전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인격적 온전. 그리고 어느 사건을 들었어도 그 방편이야 어떤 방편이었던지 간에 우리의 인격의 온전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말로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성화구원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성화구원을 주격으로 놓고 이런 면으로 성화구원, 저런 면으로 성화구원.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그 면으로 볼 때에 날마다 같은 말일 수밖에 없어.
그러면 ‘날마다 같은 말이다’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온전이 아닌 세상적인 말을 하면서 세상적으로 옳은 것을 말하고, 세상적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세상적으로 악한 것을 말하고 그렇게 하면 목적은 천국이 아닐지라도 늘 다른 말로 들리지.
성경은 늘 같은 말이에요. 성경에 신명기에도 있고 레위기에도 있지만 그 제사 드리는 거 보면 맨날 같은 말인 것 같아. 모세가 백성들을 앞에 모아놓고 첫 장부터 끝 절까지 낭독해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다리가 아프고 진절머리가 났을까? 맨날 같은 말이니까.
여러분들, 세상에도 그런 말이 있지. 백 번을 강조해도 싫지 않은 말이 뭐지요? 늘 백 번을 강조해도 싫지 않은 말이 뭐요? 불조심. 그렇지요? ‘사랑하라’ 뭐 그런 거라든지 이런 건 백 번을 강조해도 좋지.
그런데 물론 저도 경험을 했지만 스승목사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 또 나온다’ 그러고 들으면 그냥 졸리기 시작하데. 은혜가 안 되더라고. 그런데 지나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왜 내가 그걸 안 적어놨던고’ 하게 돼요. ‘내가 아는 말 또 한다’ 하지 말고 적어놓으면 다 자기 것 되는 거요.
누구든지 속에 든 대로 나온다. 박사 되게 만들려면 오구 잡탱이가 들어가게 하면 돼요. 세상의 오만 잡탱이가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박사가 돼요. 이걸 뒤집어서 말을 하면 박사 속에는 오구 잡탱이가 다 들어있어요.
아침에 테레비에 아침마당인가 저녁마당인가 나오지? 저는 가끔 그거 가만 들어본다고요. 들어보면 일반적으로는 재미가 있어. 방편적으로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니까 재미가 있지요. 그러나 속의 기준을 찾아보면 교육의 기준이 하나도 없어요. 교육의 기준이 없어.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박사예요.
우리가 박사라 그럴 때에 그 면에 대한 것에 박사지.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오구 잡탱이로 알면 그것도 박사야. 만물박사. 그렇지요?
그리고 세상이라고 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지식을 받아가지고 그 지식을 써먹으면 그 사람은 최고가 되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은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따라서 사람이 또 달라지고. 그러니까 뭐가 중요하지요? 고깃덩어리가 중요하다 그 말이요, 지식이 중요하다 그 말이요? 지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 들어가서 그 지식을 받아서 그렇게 써먹는 사람이 되므로 지식이 중요한 거지만 그러나 그 지식을 감염시키는 것이 인간 속에 들어있으니 이게 더 중요하다 그 말이요. 감염성이 중요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감염성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 내가 감염되어 나가느냐, 나에게 무엇을 감염시키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진다. 그리고 사람은 말로 가르쳐서만이 되는 게 아니고 인격전달이 더 무섭다 그 말이요.
마지막으로 신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진리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전제해 둘 것은 인격의 변화가 문제다. 인격의 변화가 되어서 진리지식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꼭 잊지 마시도록.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 옛날 모세의 사건을 들어서 오늘날 우리 눈앞에 전개시켜 주시고, 역사적으로는 이미 지나갔지만 영적 신앙적인 면으로 볼 때에 오늘날도 그러한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나 진리 이치적으로 구원도리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 옛날 모세의 생모인 요게벳이 모세만은 죽이지를 아니했고 보호를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저희들 역시 영적 신앙적으로 볼 때에 진리 따르는 이 신앙양심을 살리면 훗날에 자기의 영광이 될 터이니 아버지 하나님, 이 진리지식의 신앙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들은 부족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더욱 더 붙들어 주시고,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남이 볼 때는 이 세상이 편안하고 좋은 세상 같으나 그러나 누림성적으로나 교훈성적으로 볼 때에 너무나도 미혹거리가 많고 유혹거리가 많고 혼탁하고 혼란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살고 있는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의 눈을 밝혀서 진리지식 신앙양심을 내 속에서 죽이지 않도록 저희들에게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오늘날 영적인 모세를 바로 키우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 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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