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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 (Meaning of Bearing the Cross)
마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3882 추천 수 0 2013.06.21 21:56:53성경본문 : | 막9:3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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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9월 30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 (Meaning of Bearing the Cross)
--마가복음 9:38-50
1.
요즈음 교회력을 따라 마가복음을 읽으며 '제자 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한 교우께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마침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막상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은유(metaphor)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을 표현하는 비유 어법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실, 은유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수사법의 원리에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일상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그 뜻을 구체적으로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십시다. '가이사랴 수양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4)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1. 자기를 부인하라.
2. 십자가를 지라.
3. 나를 따라오너라.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크게 보아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은유의 의미는 '자기를 부인하다'라는 말씀으로 풀어 볼 수 있습니다.
'부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르네오마이'(aparneomai)는 마가복음에서 딱 네 번 사용되었습니다. 방금 읽어드린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한 번 사용되었고, 다른 세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야기 안에 나옵니다. 베드로는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막 14:68)라는 질문을 받고 그 사실을 부인합니다. 자신은 예수와 상관 없다는 주장을 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파르네오마이' 즉 '부인하다'라는 말은 '나와 상관 없다고 주장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의 의미가 좀 분명해집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실은 내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스스로 만들어 온 나, 그 동안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쳤던 그 내가 실제로는 나와 상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선언하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씀을 '십자가를 지라'는 은유로 담아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로마 제국 내에서 행해졌던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심한 극형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은유로 바꾸자면, '교수대에 목을 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사형수가 되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하라는, 즉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 동안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에도 맞지 않고, 현대 사조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아 실현'에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풍조는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 진짜 나인지에 대해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자아 실현을 위해 분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아 실현'이 아니라 '자아 부정'에 진정한 길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자아를 부정하고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입니까? 그 동안 나라고 생각해 왔던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그 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 분투해 왔는데, 자아에 대해 사망 선고를 하고 나면,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나라고 여겼던 것을 부정하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나라고 여기라는 뜻입니다. 사망을 선고하고 폐기 처분한 자아의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라는 뜻입니다. 누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제 안에 있는 예수가 바로 접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처럼 되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남긴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이 말씀 속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께서 '가이사랴 수양회'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자신의 고백으로 잘 풀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는 것이며, 자아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고, 매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아의 생각대로, 자아의 욕심대로, 자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생각대로,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아니, 그런 정도는 바울같은 위대한 성인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고,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라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의지로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 지어질 때에만 우리는 자아를 부정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하나되어 살아갈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자아는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었음을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부모를 만나고 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하듯,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부모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 그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면,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자아상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놀랍게도, 백만명이 예수를 영접했다면, 백만명이 모두 각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독특하게 창조된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스스로 만든 자아상을 붙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헛된 싸움을 싸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평생 자신이라고 믿고 그 자아를 위해 분투했는데, 알고 보니 허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평생 업적을 쌓고 명성을 높이기 위해 살아왔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세상적으로 내 놓을 것이 별로 없어도 자신의 존재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자아를 세우기 위해 분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의 존재를 채워 주셨기에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루 하루가 영원의 일부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열고 비우고 나눌 길을 찾습니다.
3.
믿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것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라는 것이 있죠. 어떤 사람들은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야 할 질병이나 장애를 두고 "이것이 저의 십자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단지 '감당하기 힘든 짐'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떠맡아 안으면서 "이것이 저의 십자가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 짐'과 상당히 닮은 면이 있습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듀크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스탠리 하우어워즈(Stanley Hauerewas)가 오래도록 조울증을 앓아 온 아내와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내의 질병으로 인해 지옥같은 일상을 지내면서도 그 아내를 위해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내를 품고 견뎠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장애입은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어떤 면에서 십자가를 진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입니다만, 장애 자녀를 둔 부부가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이혼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 자녀를 키우는 일이 부부가 함께 짐을 져도 힘겨운데, 부부 중 한 쪽에서 장애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거나 장애로 인한 모든 짐을 홀로 지게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든 남편이든 어느 한 편에서 "나는 도저히 이 짐을 질 수 없다!"고 포기하면, 그 부부는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럴 경우, 다른 한 사람도 두 손 들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느 한 편이 홀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집니다. 그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로 "저 아이를 위해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매일같이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때로 장애 자녀를 둔 부부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장애 자녀를 둔 어느 부부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까 찾다가 우리 부부를 택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저희에게 그만한 사랑의 능력이 있다고 믿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저희를 믿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이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래서 저희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렵니다."
얼마나 기가막힌 말입니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장애 자녀를 키우고 돌보는 일은 매일 작은 전쟁을 치루는 일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다짐해도 때로 벅차기도 하고 때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사랑의 능력이 속에서 솟아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 중 극진한 효심으로 칭찬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보고 효녀라고들 칭찬하는데요. 저는 그 소리 들을 때마다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싸움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칭찬하는 것입니다. 제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면, 절대로 저를 효녀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으로 죄를 짓고 살아요." 그 말씀을 듣는데 참 마음이 싸하게 아팠습니다. 하지만 마음에서 하루에도 수 없이 풍랑이 일지만, 그분은 그 풍랑을 억누르고 딸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마 전, 실낱같은 희망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사는 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남편과 자녀, 부모와 형제, 직장 문제와 경제 문제등이 서로 얽히고 섥혀서 하루 하루 전쟁을 치루는 듯이 살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항상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늘 풍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분은 언제나 해결사여야 했고, 언제나 뒷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겨웠던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제발 저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간청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 데,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습니다. 쌓이고 쌓인 슬픔이 터진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씁니다. "내가 안다!"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분은 깜짝 놀라 옆에 있던 남편에게 "지금 무슨 말 했어?" 하고 묻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분은 그 옛날 사무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음성임을 알겠더랍니다.
그 음성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더랍니다. "그래, 하나님이 아셨으면 됐지!"라는 생각을 하니, 훨씬 짐이 가벼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제발 저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겠더랍니다. "만일 내 딸이 나보고 '나 좀 죽여 줘'라고 보챈다면 내 마음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니, 그 기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겠더랍니다. 그 이후, 더 이상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이런 것이 있지요.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Must Jesus bear the cross alone, and all the world go free?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No, there's a cross for everyone, and there's a cross for me.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The consecrated cross I'll bear, till death shall set me free.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And then go home my cross to bear, for there's a crown for me.
우리 중에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어 지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하루 하루 지옥같은 일상을 견뎌내시며 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변모시키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부터 살고 보자"고 외면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등을 돌릴 때, 나만은 그럴 수 없어서 "저것이 내게 주신 십자가인 걸!"하고 짊어지고 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다른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루 하루 사는 것만으로 충분히 제자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하지만 이것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가진 뜻의 전부는 아닙니다. 만일 이것이 전부라면, 역경이나 고난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매일'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 없이,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박해를 받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크고 심각한 일만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살아가면서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들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대로 행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서 십자가를 지는 훈련을 할 때, 점점 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마가복음 9장 38절부터 50절까지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매일 작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시하십니다.
첫째, 38절부터 41절까지에서 예수님은 내 편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아를 따라 살다 보면, 경쟁심과 시기심에 휘둘릴 수 있습니다. 자아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진 사람은 경쟁심과 시기심과 질투심을 내려 놓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배려하며 작은 친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둘째, 42절에서 예수님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조차 정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믿음의 식구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를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하는 것에 대해 아무 개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특히, 별 존재감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배려하는 일은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별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일이 됩니다.
셋째, 43절부터 49절에서 예수님은 죄 짓게 하는 원인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하십니다. 손이 죄 짓게 하면 손을 찍어 버리고, 발이 죄 짓게 하면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 짓게 하면 눈을 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때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말귀를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죄 짓게 하는 것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를 찍어 버리고 빼어 버려야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매일 이렇게 죄 짓게 하는 원인에 대해 경계하고 그 때 그 때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넷째, 50절에서 예수님은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아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크고 거대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는 곳에는 항상 평화가 깃들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이사랴 수양회'가 끝난 후 갈릴리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안에 예수께서 주신 말씀들은 대부분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지를 여러 가지 예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지난 주에 읽은 말씀(9:33-37)에서는 낮아져서 섬기도록 힘쓰라고 하셨고, 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찾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역시 자아가 이끄는 방향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혹은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작은 희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때로는 큰 희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이기에 그분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분께 의지하여 그분의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 자신을 복되게 하고 나를 통해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길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힘을 내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는 매일의 삶을 무척이나 힘겹게 만드는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까? 때로는 벗어 버리고 싶고 달아나 버리고 싶은 십자가를 지고 사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들려 주시는 음성, "내가 안다!"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오래 전 그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토론토에서 처음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교회 문제로 인해 심한 마음 고생을 한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었는지, 지금 그 내용은 잊었으나, 당시로는 참 억울했습니다. 교회를 위해 나대로는 성심을 다하여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그 뜻을 몰라주는 것 같았습니다. 제 마음을 채우고 있던 열정과 의욕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요일, 저녁 예배를 준비하러 한 시간 정도 일찍 예배당에 갔습니다. 어두운 예배당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중에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한 동안 기도하는 중에 문득 "내가 안다"는 음성이 귀에 들린 것처럼 제 마음에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쓴 감정이 순식간에 녹아 버렸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그보다 더 큰 오해와 억울함과 심지어는 모욕도 참아낼 것 같았습니다. 열정과 의욕이 다시 솟아 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마음만 있으면 웬만한 짐도 거뜬히 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모두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듣지는 못해도 그렇게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능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그리고 이 사회도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 때
문에 온전히 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도 기꺼이 져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아를 내려 놓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에도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 작고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십시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혹은 직장에서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작은 십자가를 짊어 지십시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코(Francisco of Assisi)가 지은 '평화의 기도'(Prayer for Peace)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매일 작은 십자가를 지는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이끄시는 방향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같은 기도를 마음에 품고 그같은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는 기도는 '평화의 기도'로 대신하겠습니다.
평화의 기도
--프란시스코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를 위한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속회자료> 2012년 9월 30일 주일 설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Meanings of Bearing the Cross)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365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가복음 9장 38-50절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정리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마가복음 8장 34절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오. 당신의 자아와 당신 안의 그리스도는 어떤 상태입니까?
3) 당신에게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를 지고 살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나누어 보십시오.
4) 당신이 지금 져야 할 작은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하나씩 찾아 보십시오.
5. 기도
1) 당신 내면의 자아와 그리스도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2) 십자가를 지는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13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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