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0:1-12 |
---|---|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10월 7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기준이 다르다 (Our Standard Is Different)
마가복음( Mark) 10:1-12
1.
요즈음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마가복음을 읽어가면서 제자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로마 도시들에서는 더욱 그랬지만,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이혼은 드믄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신명기24장 1절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은 율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듯, 율법은 이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남편에게만 있습니다. 여성에게는 매우 부당한 율법입니다. 이 율법에는 해석을 어렵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라고 했는데, 이혼의 사유가 될만한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학자들의 끊임없는 논쟁의 초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크게 두 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샴마이(Shammai)라는 율법학자가 이끄는 보수파(conservatives)는 '수치스러운 일'을 오직 간음으로만 해석했습니다. 반면, 힐렐(Hillel)이라는 율법학자가 이끄는 자유파(liberals)는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편들 멋대로 이 율법을 휘두르게 만든 것입니다.
두 학파 중에서 어느 학파가 대중으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힐렐 학파였습니다. 요즈음 정치 현상에서도 누누이 확인하는 것입니다만, 사람들은 진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갑니다. 사람들 특히 남성들에게 힐렐 학파의 입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2절에 보니,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드리기 위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샴마이 학파의 입장을 지지하면, 그 순간, 그에게 열광하던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릴 것입니다. 반대로, 힐렐 학파의 입장을 지지하면, 보수적인 추종자들이 등을 돌릴 것입니다. 어떤 대답을 하든, 예수님은 추종자들의 일부를 잃을 위험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문하시지요.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3절) 이 순간, 바리새파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놓은 덫에 발을 들여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4절)라고 대답합니다. 신명기 24장 1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이 때, 예수님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대답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그것은 샴마이 학파의 이론도 아니고, 힐렐 학파의 이론도 아닙니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5-10절)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내 놓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과 2장 24절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 질문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창세기를 기준으로 삼아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본질에 대해 한 말씀 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율법은 인간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즉 인간의 죄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원래는 그렇게 살게 되어 있지 않지만, 이미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 정도만이라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법이 그렇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만일 법이 없이 인간에게 각자의 도덕성에 따라 행동하라고 하면 그 사회는 얼마 가지 못하여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성이 타락해 있고 죄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워도 이것만은 지키라"는 뜻으로 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도 이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기정 사실로 하고 보니, 이혼은 때로 불가피하게 보였습니다. 이혼이 불가피하다면, 차선책은 법으로써 이혼이 남발되는 것을 막고 이혼 당한 여인의 인권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4장 1절에서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본뜻은 이혼이 다반사가 되는 것을 막자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성에 빠진 인간은 이혼을 억제하려고 만들어진 율법을 이혼을 허용하는 율법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해야만 하는 경우를 위해 마련된 율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한 것입니다. 옛날, 유교에서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것으로 여성들을 옥죄었는데, 힐렐 파의 율법학자들은 그보다 더 심각하게 남성들에게 유리하도록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힐렐 학파에 따르면, 음식을 태운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죄성 앞에서 법은 이렇게 무력한 것입니다.
그나마 샴마이 학파는 이 율법 정신을 존중하여 이혼을 최대한 억제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라면 법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 나는 죄인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나는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예수의 제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죄성을 극복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 나는 죄인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 지어졌어. 나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율법의 수준에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수준을 넘어 태초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원리대로 살아가기를 꿈 꿉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예상치 않았던 대답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황하여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숨겨놓은 덫에 걸리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의 덫에 걸려 버린 형국입니다. 그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을 범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1-12절)
이 말씀은 이혼이 다반사가 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아주 불편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이 말씀을 또 다른 율법으로 만들어 그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이혼한 사람들을 정죄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새로운 율법으로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이상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이들에게는 율법은 더 이상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죄성을 전제하고 주어진 율법은 죄성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자기 아내 혹은 남편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새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제자로서 서로를 제자로 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제자들의 부부 생활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5:21)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5:33)
죄된 자아가 살아 있을 때, 부부는 서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죄성에 속박되어 살아갈 때, 부부는 서로를 지배하고 자기 뜻대로 주장하려 했습니다. 어느 한 편이 완전히 제압당하기 전까지는 눈치와 긴장과 싸움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벽에 부딪히면 '법대로' 갈라서기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면, 상대방을 위해 섬길 것을 먼저 찾습니다. 서로 지배하기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섬기기를 노력합니다. 자기 뜻대로 주장하기를 사양하고, 상대방의 뜻을 받들어 줍니다. 어느 한 편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섬기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몫을 챙겨 주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혼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일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부부가 함께 제자로 자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한 편은 그대로 죄성에 빠져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서만 제자로 살아가려 하면, 자주 문제가 생깁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제자로 사는 배우자에게 감동하여 자신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이 일어납니다. 제자로 사는 배우자의 희생과 헌신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제자로 사는 배우자는 참 어렵습니다. 그 희생과 고난을 계속 감당해야 할지, 아니면 이혼을 선택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부부가 같이 신앙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고, 함께 제자로 자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함께 제자로 자라가는 것은 부부 관계를 개선시키고 향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다만 동거인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부부가 함께 제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4.
지난 주, 부부 관계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사회연구소에서 최근에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부부가 평등한 관계에서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한 경우,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보다 이혼률이 50%가 높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입니다.
집안 일에 대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남편들은 이 기사를 악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내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데 이 연구 보고서가 악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참으로 교묘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하나도 그냥 흘려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캔터베리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 프랭크 푸레디(Frank Furedi)가 훌륭한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부부 간에 평등을 이야기하고 가사 분담에 대한 계약을 맺는다는 사실은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의 불신이 있다는 뜻이고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몫을 지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가사를 분담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가사를 분담할 생각을 할 때 이미 부부 사이에 균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감지하고는 더 큰 갈등을 막으려고 계약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계약을 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쁜 생활로 인해 쫓기다 보면, 계약대로 하지 못할 때가 생깁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화를 내게 되고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쁜 생활 중에 계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불만이 누적됩니다. 의무감으로 가사일을 하는 것처럼 힘 든 일이 따로 없습니다. 이미 계약을 했으니 불평할 수는 없고, 하기는 싫고, 그래도 해야 하니 눈 질끈 감고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마음 속에는 분노가 소복소복 쌓입니다.
프랭크 푸레디에 의하면, 부부 관계는 불신이 아니라 신뢰에 기초하는 것이고, 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애정에 의해 움직여져야 합니다. 정해진 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누구든, 무슨 일이든 맡아서 하는 자발성(spontaneity)이 부부 관계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푸레디 교수는 이 논평의 말미에서, 현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부부들이 계속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필요'를 최우선에 두기를 힘쓴다면 부부 관계는 더 심한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푸레디 교수의 지적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5장에서 한 말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라면 자신의 이기심이 이끄는대로 배우자를 마음대로 부리거나 주장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아가 아직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제자라면 배우자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법대로" 실행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예수의 제자요 배우자도 예수의 제자라면, 제자가 제자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섬겨야 마땅합니다. 제자라면 자신의 이기심을 십자가에 매달고 배우자를 위해 기쁘게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와 맺은 계약을 지키기 위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를 한다면, 설거지로 씻겨 나가는 그 모든 오물들이 하수구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담길 것입니다., 힘들어 하는 배우자를 위해 설겆이를 한다면, 깨끗이 씻긴 그릇만큼이나 그 마음이 상쾌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이혼을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한 번만 더, 자신과 자신의 배우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함께 예수의 제자로 발돋움할 방법은 없는지 기도 중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이혼의 상처를 가지고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상처가 속히 아물고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겠지만, 과거를 흘려 보내고 이제 제자로 자라가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에는 멋진 제자 부부로 살아볼 것을 꿈에 그리며 자신을 제자로 키우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희망을 캐는 일입니다.
결혼을 꿈꾸고 계십니까? 앞으로 주어질 결혼이 축복이 되려면, 지금 제자로 자라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위해 준비할 것이 많지만,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준비는 제자로 발돋움하는 것입니다.
이혼의 위기들을 잘 극복하고 오늘까지 왔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 해서 그렇게 된 줄 아십니까? 여러분의 배우자 덕분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은총입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더욱 부부가 함께 제자로 자라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부부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5.
눈치 빠른 분이라면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이혼에 대한 말씀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혼에 관한 질문을 다루시면서 예수님은 제자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전하십니다. 제자는 기준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진리,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법'(law)을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상식'(common sense)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리'(moral)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예의'(propriety)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아무 기준 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생각한다면, 모두가 이 정도의 기준만 가지고 살아도 우리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보혈의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으로 지어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사람된 제자는 자아가 기준으로 삼았던 것들을 초월하게 됩니다. 이 땅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는 어느 곳에서나 차별성(difference)을 드러냅니다. 일부러 튀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차별성은 가정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하게 드러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평등을 강조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낮추어 섬기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제 제자의 가정은 작은 천국이 됩니다.
그 차별성은 직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제자는 법이 정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법의 함정을 피하여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라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직장에 제사장으로 보내 주셨다고 믿고 제사장으로서 자신이 할 일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을 하지 않게 되고, 직장 동료들을 진정한 관심으로 돌아보게 되며, 자신의 위치를 군림의 도구가 아니라 섬김의 도구로 삼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는 교회로 모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얻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한 은혜를 받았기에 자신의 유익을 찾기보다는 교회를 위해 그리고 교우들을 위해 드릴 것이 없는지 찾습니다. 내 책임을 다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없는지 찾습니다. "나 좋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불편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일이 없는지 찾습니다. 교회에서 제자는 "Why bother?"라고 말하며 몸을 움츠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활짝 열고 "Please bother me!"라고 말합니다. 교회 생활을 세상의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가 많은 교회는 뭔가 다릅니다. 군중이 많은 교회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갑니다. 그 기준을 넘어설 영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교회가 세상적인 기준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그럴 때면, 참으로 미안하고 수치스럽고 민망합니다. 교회가 법만 지켜도, 상식만 지켜도, 일반 도덕률만 지켜도 칭찬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로 가득한 교회라면, 법과 상식과 예의와 도덕의 차원에서도 흠 없도록 힘써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이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보기 힘 든 일들이 제자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한 주일 후면 우리 교회는 설립 61주년을 맞습니다. 진갑(進甲)을 맞은 교회로서 우리는 무엇을 꿈 꾸어야 합니까? 교인들 각자가 제자로 자라가기를 힘쓰는 교회, 교인 수가 아니라 제자를 늘리는 교회, 제자답게 선택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봄에 우리가 교인 총회를 통해 선택한 안, 즉 끊임없이 자체 성장을 위해 힘쓰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나누어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교회가 되자는 안은 제자 공동체 다운 결정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많아져서 새로운 건축을 시도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식대로 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분립 개척'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제자 공동체로 자라가라는 하나님의 도전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같은 거룩한 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6.
땅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는 희망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하늘이 임할 때 비로소 희망이 생깁니다. 인간의 죄성이 치료되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때 비로소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도 인간의 죄성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아니, 약한 자를 압제하는 사악한 도구로 바뀝니다. 희망은 좋은 법을 만들고 법대로 집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자는 그 이상을 꿈 꿉니다.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태초의 본성을 되찾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꿈 꿉니다. 그것이 개인에게서,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먼저 이루어지도록 힘씁니다. 그럴 때, 그것이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금 우리는 제자로의 거룩한 부름 앞에 서서 우리의 무력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 놓고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들여 그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존재로서 변화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매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스스로도 놀랄만한 일들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사람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를 제자로 부르시는 이유이며, 그것이 우리를 교회로 묶으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뜻을 이루시도록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가십시다. 각자 그리고 함께 제자로 자라가기를 힘쓰십시다.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저희를 제자로 부르시고
또한 제자로 자라게 하시는 주님,
저희를 주님께 드립니다.
교인이 아니라 제자로 자라게 하시고,
땅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게 하소서.
저희의 의지로는 할 수 없어
주님께 의지합니다.
저희를 새롭게 빚어 주시어
주님의 나라를 살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2년 10월 7일 주일 설교
"기준이 다르다"(Our Standard Is Different)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89장(통 208)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가복음 10장 1-12절을 읽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을 읽습니다.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배우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당신은 얼마나 제자답습니까? 어떤 점에서 부족합니까?
3) 제자로서 법과 상식의 한계를 넘어선 예를 한 두 가지씩 말해 봅시다.
4) 우리 교회에 제자가 가득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한 두 가지씩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5. 기도
1) 배우자에게 혹은 가족들에게 제자로 행동하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2) 와싱톤한인교회가 제자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36장(통 493)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