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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떠나 길을 잃다 (Being Lost Away From Grace)

마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53 추천 수 0 2013.06.21 21:56:53
.........
성경본문 : 막12:38-44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2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은혜를 떠나 길을 잃다 (Being Lost Away From Grace)
--마가복음 12:38-44

1.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오바마의 압승으로 끝이 났습니다. 선거 결과로 인해서 환호하는 사람도 있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미덕은 선거 결과에 대해 흔쾌히 승복하고 당선된 사람이 선정을 펼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선된 한 사람의 성패가 아니라 미국의 성패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성패는 세계 여러 나라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4년 동안 미국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도록 기도하고 또 우리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주에 잠시 살펴 본,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의 말씀입니다. 

먼저, 율법학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을 생각해 보기 전에 율법학자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과거에 the scribe이라고 번역하더니, 요즈음에는 the lawyer라고 번역합니다. 그 사람들이 법에 대한 전문가였으니 the lawyer라고 번역하는 것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lawyer와는 성격적으로 꽤 다릅니다. 율법학자는 오늘의 lawyer의 역할과 신학자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사회법이 따로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의 율법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가 되려면 존경받는 율법학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밤에는 스승에게 율법을 배우고 낮에는 스승의 일을 거들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여 보통 40세쯤 되면 안수를 받고 독립적인 율법학자의 역할을 합니다. 도시에는 여러 명의 율법학자들이 활동했고, 시골 동네에는 한 두 사람이 있거나 혹은 전혀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 동네에는 율법학자가 가끔 방문하여 문제를 처리해 주곤 했습니다. 

율법학자는 자기의 생업을 따로 가지고 사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해 상담해 주고 돈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율법학자였는데, 그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였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율법학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업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만 하고 율법 공부와 상담을 위해 주로 시간을 썼습니다. 

율법학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주 순수하고 희생적인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명석한 두뇌를 사용하여 많은 돈을 벌고 출세할 수도 있지만, 가난하게 살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로서의 관록과 경륜이 커갈수록 점점 더 높이 추앙받고 특권이 많아집니다. 그 특권이 처음에는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조금씩 물들어갑니다. 모든 특권에는 타락의 누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 특히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율법학자들은 타락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킵니다. 사례를 받지 않는 대신, 율법을 교묘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무지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하곤 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 여섯 가지가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범하고 있던 잘못들 중에서 몇 개를 예로 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율법학자들은 누구보다도 엄한 심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경고였습니다.


2.

이 말씀은 모든 설교자들이 피해가고 싶은 말씀입니다. 만일 교회력을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가 이 본문을 지정해 주지 않았다면, 저도 일평생 이 본문에 대해 설교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은 가장 먼저 그리고 너무도 분명하게 목회자들에게 칼날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목사가 되고 목사로 사는 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목사도 예복을 입습니다. 예복을 입는 이유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개신교 목사의 예복은 대개 두 종류입니다. 제사장을 상징하는 예복이거나 종을 상징하는 예복입니다. 예복은 목사의 신분이나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신분을 상징합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위해 일하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이 화려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멋으로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목사의 예복이 때로 얼마나 화려합니까?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이 입는 예복에 비하면 그래도 수수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복이 화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복이 화려해질수록 그것을 입은 사람만이 돋보이게 됩니다.

목사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노예가 됩니다. 그것을 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어쩌지 못합니다. 이유 없이 장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타락한 율법학자처럼, 목사도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찾아 다닙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뒤에서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합니다.

율법학자들이 회당이나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던 것처럼, 목사로 살다 보면 윗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위험에 노출됩니다. 교회 모임에서 식탁을 차려 놓으면 항상 "목사님 먼저 하십시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버지같은 어른들이 둘러서 계신데, 저보고 먼저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극구 사양을 하지만, 어떤 때는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을 태세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송구함을 무릅쓰고 맨 앞에 섭니다.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마치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나중에는 그렇게 대접해 주지 않으면 불쾌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율법학자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했는데, 목사도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받는 사례비는 교인들의 헌금에서 나옵니다. 그 헌금에는 부자가 드린 돈도 있지만, 가난한 교인들이 드린 돈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정도 이상의 사례비를 받고 호의호식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살기를 탐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놀아도 마음 껏 놀지 못하고, 즐겨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굴레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때로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이지만, 그 굴레를 벗어버리는 순간 타락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영대'(stole)를 걸고 있는 겁니다. 영대는 멍에를 상징합니다. '명예'가 아니라 '멍에'입니다. 목사는 멍에를 짊어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려고 길게 기도하는 율법학자처럼, 목사도 신앙 생활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초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나 금식할 때 혹은 구제할 때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신앙 생활을 하면, 속은 텅 비어 버리고 껍데기만 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신앙 생활은 어쩔 수 없이 공개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공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의 초점을 오직 하나님께 두고,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매일 싸워야 할 영적 투쟁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자 한 것은 출세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부자가 되자는 것도 아니었으며, 권력을 얻자는 것도 아니었고, 존경을 받고 살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저에게 부어 주신 은혜, 저를 지으신 은혜, 저를 부르신 은혜, 저를 구원하신 은혜, 저를 아들 삼으신 은혜, 저의 죄를 용서하신 은혜, 저를 돌보시는 은혜, 저를 사용하시는 은혜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온전히 나를 드리겠다고 나선 목사의 자리인데, 그 자리에 서고 보니, 그 자리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자리라는 사실을 늦게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받은 구원을 완성하고 제가 아는 복음을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 자리가 가장 혹독한 심판에 노출되어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마치 홍두깨로 정수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공포와 전율에 휩싸인 것입니다. 계속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두렵고 떨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3.

이 즈음에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 내가 목사 아니길 얼마나 다행인가? 딱한 목사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안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언제나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얼른 보면 목사들에게나 해당하는 것 같지만, 곰곰이 묵상하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며 회당이나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탐하고 길게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초점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믿음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고, 그로 인해 존경받고 싶고 대접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자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부패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다짐을 했는데, 어느 사이에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누구에게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중에 이러한 욕구가 마음을 파고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직분이 커감에 따라 점점 심해집니다. 집사에서 권사로, 권사에게 장로로 직분이 커진다는 말은 점점 낮아져서 더 많은 사람을 섬기라는 뜻인데, 그것을 계급 상승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한국 교회에 팽배합니다. 이민 교회들 가운데 평신도들의 직분 싸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직분 문제로 시험에 들어 교회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정반대의 문제를 겪어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직분을 얻겠다고 나서서 문제 일으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좋은데, 직분을 맡겨도 사양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양하시는 데에는 나름대로 다 각각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이유를 존중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주어지는 직분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더욱 낮아져 더 많이 섬기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목사로 사는 것이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서는 것이지만, 누군가 그 자리에 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위험하다고 모두 피한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이루려는 일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사 6:8)라는 말씀을 듣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길을 가는 동안 타락하고 오염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평신도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커질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위험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주어지는 책임을 '아멘'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늘 깨어있어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주장하려는 태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학자의 잘못에 빠지고 맙니다. 

율법학자들이 범한 또 다른 잘못이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대해 잘 모르는 평민들을 상담해 주면서 율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무지몽매한 이들의 재산을 삼켰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은 율법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상담할 때 그들의 머리 속에서는 그 사람을 속여 먹을 궁리를 찾았습니다.

저는 앞에서 목사로 사는 것이 이와 동일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저를 구원하신 주님께 헌신하기 위해 목사가 되었고 또한 목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혹시나 제가 주님 때문에 얻는 이익이 제가 주님을 위해 드리는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참되게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희생과 헌신에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 생활과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 보면, 어느 새 희생과 헌신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자신의 권리를 찾고 이익을 찾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가 나중에는 주님의 이름을 빌미로 더 많은 것을 잡으려고 머리를 굴리는 타락은 목사와 선교사에게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 모든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느끼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두리번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은혜를 잊었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인색하고 자신의 이익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 것입니다.



4.

예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과부'라고 표현했는데, 이 단어에는 비하하는 느낌(pejorative sense)이 있으므로,  '싱글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성전 헌금함의 맞은 편에 서서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광경을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돈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네 복음서의 기록만을 두고 통계를 내 보면, 예수님께서 설교에서 가장 자주 다룬 주제가 '하나님 나라'이고 두 번째로 자주 다룬 주제가 '돈'입니다.

그 분이 왜 돈에 이렇게 관심을 두셨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처럼 중요한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돈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돈의 문제입니다. 돈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하나님 나라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헌금함 맞은 편에 서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먼저 부자들의 헌금하는 모습이 그분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헌금함에 많은 돈을 넣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어떻게 아셨을까요? 보란듯이 거금을 쏟아 넣는 부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헌금을 한 것입니다. 혹시나 그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쨋든, 그 부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변질된, 타락한, 오염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 가난해 보이는 싱글맘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누가 볼까 무서워 서둘러 헌금을 하고 사라집니다. 그가 드린 헌금은 두 렙돈이었습니다. 렙돈은 당시에 유통되던 동전 중에서 가장 값이 낮은 동전이었습니다. 두 렙돈이면 한 끼 정도의 음식을 살만한 작은 돈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43-44절)

하나님께 드린 헌금의 무게는 액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드린 사람에게 얼마나 큰 것이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백만 달러를 헌금했다면, 액수로 따질 때 결코 작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백만 달러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근근히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 백 달러를 헌금했다면, 그것은 빌 게이츠의 백만 달러보더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과부의 헌금이 부자의 헌금보다 더 크다고 칭찬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지극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입을 것이 없어 헐 벗고 사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하시고, 부자들에게 그런 사람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가난한 싱글맘이 자신에게 있던 돈 전부를 헌금한 것을 칭찬하셨다니,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여인은 그 날 굶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칭찬할 것이 아니라 말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만일, 그 여인이 매일 그렇게 자신에게 있는 모든 돈을 헌금함에 털어 넣었다면 말리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책임적이고 규모 있는 경제 생활을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칭찬한 것을 보면, 그 여인에게는 필시 특별한 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그 여인은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한 번 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마침내 성전에 오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들어서자 하나님의 은혜가 그 여인의 마음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은혜와 사랑에 압도되어 그 날 먹을 음식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꼭 이런 사정은 아니었다 해도, 필시 그런 내적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하여 혹은 경제적으로 쪼들린다고 하여, 하나님께 드릴 것이 면제된다고 생각한다면 혹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한 것이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성을 병들게 하는 가난에 대해 가장 마음 아파하시지만, 가난하다고 하여 그것을 핑게 삼아 물질에 집착하는 것을 바라시지도 않으십니다. 사실, 우리가 쓸 것을 먼저 쓰고 나서 하나님께 바치고 이웃과 나누겠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많이 벌어도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하나님께 드릴 것을 먼저 드리고, 할 수 있는대로 나누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태도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 대해 주신 경고의 말씀과 가난한 싱글맘에 대해 주신 칭찬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목사인 저에게는, 처음 가고자 했던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중도에 곁길로 들어선 것인지, 두렵고 떨림으로 돌아보게 만듭니다. 바울 사도는 타락한 전도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고후 2:17)이라고 말했는데, 제가 그 지경에 빠져 있지나 않는지, 스스로를 반성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진지한 반성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믿음 생활에 들어선 여러분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상 생활에서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까? 믿음 때문에 얻은 것이 더 많습니까? 드린 것이 더 많습니까? 여러분은 율법학자에게 더 가깝습니까? 가난한 싱글맘에 더 가깝습니까?

현실적으로 여러분보다 제가 더 위험한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안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변질된 것이 있다면 다시금 정결하고 순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방향이 빗나갔다면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처음의 그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 있다면, 무엇이 우리를 제 자리로 돌려 주겠습니까? 가난한 싱글맘으로 하여금 하루의 끼니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바치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마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율법학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되게 만들었습니까? 은혜를 떠나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첫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잊었기에 그분께 드릴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분을 통해 얻을 것만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욱 깨어 기도하십시다. 더욱 찬송하십시다. 더욱 말씀을 사모하십시다. 더욱 영적 사귐을 나누고 섬기십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늘 마음 안에서 출렁일 것입니다. 은혜를 떠나면 길을 잃습니다. 끊임없이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더 큰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길에서 길 잃지 않게 됩니다.

주의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영혼을 깨워 주시고 첫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합당한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더욱 큰 부자가 되고, 물질에 있어서는 더 가난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며, 드리고 나누기를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오, 주님
타락한 율법학자들을 통해
저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가난한 싱글맘을 통해
저희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오, 주님
저희의 영혼을 깨워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에 깨어나게 하소서.
그 은혜에 이끌려
믿음의 길을 완주하게 하소서.
완주할 때까지
늘 자족하게 하시며
늘 감사하게 하시고
드리며 나누는 일에
늘 넉넉하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2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은혜를 떠나 길을 잃다"(Being Lost Away From Grace)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15장(통 354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가복음 12장 38절부터 44절까지를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율법학자들이 행한 잘못 중에서 당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있는지 찾아 보십시오. 믿음의 길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의 눈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습니까? 
3) 믿음의 길에서 당신은 얻은 것이 더 많습니까? 드린 것이 더 많습니까? 희생과 헌신의 믿음의 본질이라면, 당신의 믿음은 본질에 얼마나 가깝습니까? 
4)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항상 당신 안에 살아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5. 기도
1)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십시오.
2) 자족, 감사, 드림, 나눔의 은사를 구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211장(통 346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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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7 마태복음 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마9:12~13  김남준 목사  2013-10-16 2655
15226 로마서 입맞춤 [1] 롬16:16  한태완 목사  2013-10-12 2655
15225 창세기 축복의 통로 창12:1-4  김동호 목사  2012-01-24 2655
15224 시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하라 시146:1-10  한태완 목사  2011-01-30 2655
15223 요한복음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요7:37∼38  조용기 목사  2008-09-06 2655
15222 고린도후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16-21  정용섭 목사  2013-04-03 2654
15221 열왕기상 실패에서 배우기3 -이스라엘의 3대왕 바아사 왕상15:33-16:7  김필곤 목사  2012-02-20 2654
15220 마태복음 나는 아니지요? 마26:14-25  정용섭 목사  2011-05-05 2654
15219 마가복음 숨어 있는 평화의 왕 막11:1-11  정용섭 목사  2009-12-10 2654
15218 사무엘하 속죄제와 속건제 삼하21:1-9  조용기 목사  2009-05-14 2654
15217 민수기 살듯이 죽기(In Death as in Life) 민20:1  최창모 교수  2008-08-08 2654
» 마가복음 은혜를 떠나 길을 잃다 (Being Lost Away From Grace) 막12:38-44  김영봉 목사  2013-06-21 2653
15215 사도행전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묻지 말라 행5:12‐29  박신 목사  2012-01-21 2653
15214 요한복음 주님과 교제하는 삶 ..... 요1:43-51  이정원 목사  2010-08-06 2653
15213 마태복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갖기 원합니다. 마6:9-13  김필곤 목사  2010-04-29 2653
15212 다니엘 인격화 된 감사생활 단6:10  김필곤 목사  2010-01-24 2653
15211 마태복음 축복을 좌우하는 생각의 힘 마1:18-25  이한규 목사  2009-12-31 2653
15210 빌립보서 승리의 법 겸손 file 빌2:5-11  강종수 목사  2007-01-07 2653
15209 창세기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자 창39:19-23  김성철 목사  2013-05-16 2652
15208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 마28:1-20  한태완 목사  2013-03-30 2652
15207 이사야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사63:1-6  이한규 목사  2012-03-16 2652
15206 야고보서 비방 뛰어넘기 약4:11-12  김필곤 목사  2011-07-28 2652
15205 마태복음 [팔복6] 긍휼히 여기는자의 복 마5:7  김동명 목사  2011-07-13 2652
15204 마가복음 나귀 타고 입성하신 왕 막11:1-10  김필곤 목사  2010-11-17 2652
15203 마가복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막2:13-17  김필곤 목사  2010-08-21 2652
15202 누가복음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눅16:10  한태완 목사  2013-11-07 2651
15201 마태복음 하나님과 친해지기 5-8 : 예수 그리스도 마16:13-16  류공석 목사  2013-05-27 2651
15200 로마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롬12:2  한태완 목사  2012-04-21 2651
15199 고린도후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사람 고후5:1-7  김동호 목사  2013-01-10 2650
15198 시편 십자가의 도 시27:1-3  조용기 목사  2012-12-06 2650
15197 갈라디아 십자가만 자랑하십시오 갈6:11-16  이한규 목사  2012-06-19 2650
15196 요한복음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요2:23-25  이한규 목사  2010-08-07 2650
15195 로마서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 롬8:9-14  강종수 목사  2007-04-29 2650
15194 사무엘상 에벤에셀! -송구영신 삼상7:5-14  류공석 목사  2013-07-27 2649
15193 디도서 은혜를 주신 목적 딛2:11-15  민병석 목사  2012-05-10 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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