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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7:1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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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나님과 친해지기: 두 자아의 싸움에서
2008년 5월 31일(토)
로마서 7:15-8:2
예전에 어떤 청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교회에 다닌 지는 얼마 안됐지만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 교회 봉사도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본 이 청년의 모습은 무척이나 풀이 죽어 있었고 큰 고민을 했는지 얼굴에 그 빛이 역력하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제가 구원받은 것이 맞나요? 저는 정말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 맞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말은 한 까닭은, 구원 받은 이후 자신의 삶을 보니까 도대체 구원받은 사람 같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았는데, 그 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어찌된 까닭인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자꾸 갈등이 생기고 실망만 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죄에 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미워 실의에 빠졌다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 청년은 교회에서는 그래도 믿음 좋고 열심 있는 청년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삶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몹시 괴로워 자신이 마치 소설에 나오는 ‘지킬 작사와 하이드씨’ 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인간의 이중성을 묘사한 소설입니다. 지킬 박사는 이태리 중부에 있는 플로랜스시 한복판에 있는 한 병원의 원장입니다. 지킬 박사는 찾아오는 환자들을 자기가 손수 친절하게 맞아서 진찰을 해주고 약값이 모자라는 사람이나 가난해서 돈이 없는 환자는 무료로 치료해주어 선한 사람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하이드라는 도적 떼의 두목이 되어서 경찰의 눈을 피하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사람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한 사람이 낮에는 천사와 같이 살고, 밤에는 악마와 같이 사는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중성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이중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그런데요, 우리 성도들이 정말 고민하고 갈등하며 우리에게 좌절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이중성, 인간성의 이중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차원의 이중성, 우리 안에 있는 두 부류의 세력으로 인해 겪는 갈등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내면적인 갈등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내면적인 갈등이기도 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먼저 15절을 보면,“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있는데 정작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오히려 죄 짓는 쪽으로 기우는 성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8절을 봅니다.“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것은 바울이 겪는 갈등의 고백인데, 선을 원하는데 그의 행동은 악을 행하는 쪽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2-23절을 보겠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은 앞의 갈등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죄를 행하려는 겉사람과의 싸움에서 져서 자신이 죄 아래 놓이게 됨을 한탄하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을 좋아하는데, 이 부분을 보고 처음에는 적잖이 실망했었습니다. 너무나 예상 밖의 고백이었기에 그랬습니다. 위대한 사도, 이방인의 사도, 믿음의 사람 바울이 죄에 지는 모습, 죄에 사로 잡혀가는 충격적인 모습이 있었다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아닌가?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 부분은 사도가 되기 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고백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도무지 위대한 사도 바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기 이전의 모습이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기 이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면서 그 입장을 바꾸어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투쟁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그러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거듭나기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거듭난 이후에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는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많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내적인 갈등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은 사람은 절대로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갈등이 있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싸워 승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850 대 1, 대단한 싸움이고 참으로 멋진 싸움입니다. 이 때 엘리야의 모습은 마치 포효하는 사자와 같습니다. 마치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것 같은 기세 좋은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이세벨이 이를 갈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나옵니다. 그 때 엘리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갈멜산에서처럼 자신있게 호통을 치며 나왔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무서워 도망쳤습니다. 브엘세바 남쪽 네게브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어서 죽여 달라고 웅얼거렸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도대체 이게 정말 엘리야의 모습인가? 한탄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이 엘리야의 진면목, 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흔들리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러한 연약한 인간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도 바울 정도 되면 갈등, 고민, 문제란 하나도 없이 날마다 확신에 차서 입만 열면 “할렐루야!” 찬송이 나오고, 어떤 어려운 시험과 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울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고민이 있고 그 속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이러한 내면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 성도의 삶 속에 이런 갈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그 속에 싸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싸움이 있으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세력이 있고, 이 두 부류의 세력의 싸움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본성, 죄를 범하는 성품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옛성품, 옛사람, 혹은 겉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품이 주어집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사람 혹은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옛성품이 남아 있어 나를 죄로 이끌고 좌절을 겪게 하고 갈등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우리를 죄로 이끄는 겉사람, 옛사람의 세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중생을 통해 얻은 새로운 성품, 속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자아가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겉사람과 속사람, 옛성품과 새성품, 이 두 자아가 우리의 내면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그 싸움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죄의 법, 옛성품, 겉사람에 진다면 우리는 다시 범죄케되고 패배하게 되고 좌절과 실의를 맛보게 됩니다. 반면 옛성품과 싸워 이길 때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이 두 자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에서 옛 성품에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싸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오늘날 교회는 전의를 상실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군인들이 너무 군기가 빠졌다고 생각한 어떤 지휘관이 자기의 병사들을 집합시켜 놓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가 북쪽과 싸울 때 공군력은 확실히 우세하다. 그러나 육군이 문제다. 제군들은 북한에 있는 적병 한 사람을 맞았을 때 그 한사람을 과연 책임질 수 있는가?”
이 물음에 한 병사가 손을 번쩍 들어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책임지겠습니다!” 이 지휘관은 아주 흐믓했습니다. “그래 좋아! 자네 같은 병사가 많아야 돼”
이번엔 옆에 있는 병사에게 같은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습니다. “음, 자네는 어떻게 할껀가?” 이 질문에 옆에 있던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 이 친구가 두 사람을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저는 이 친구에게 맡기고 대신 집에 가겠습니다.”
이런 군인들이 많이 있다면 전쟁은 하나마나겠지요. 그런데 전의를 상실한 군인들의 모습보다 더 큰 비극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다는 사실입니다. 더러는 관심을 갖지만 그 싸움의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여 그 싸움에서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도 갈등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갈등을 한다는 것은 그 싸움에서 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겨보려고 애쓴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승리함으로 인해 늘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막상 싸움이 벌어지고 보면 우리에게 전혀 이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려고 마음먹고, 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일을 벌려 놓으면 정말로 마음에 뿌듯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내 속에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기기는 이겨야 하겠는데 힘이 없습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세력들을 물리쳐야 할텐데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낭패감에 휩싸이게 되고 좌절감이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고백이요 심정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토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 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마음이 있지만, 또 하나의 법이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 지배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고 만다. 그래서 내가 봐도 나는 한심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 죄에 패배하는 나를 누가 건져내랴”
그러나 이 고백은 죄인이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사람의 고백이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사람의 고백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 사람, 하나님의 은혜 앞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탄식입니다. 이러한 탄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벌써 은혜에 얼마만큼 깊이 있게 들어간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이러한 탄식이 없습니다. 전혀 모릅니다. 그는 자기의 연약하고 더러운 모습을 발견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빛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너무나 연약한 자기의 모습과 더러운 모습을 보기 때문에 ‘오호라!’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부족함을 깨달은 사람만이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탄식에는 애통하는 심령과 내가 변화 받아야겠다는 간절한 심정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이어지는 25절을 보십시오. 어찌된 것인지 앞 구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갑자기 뚱딴지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꼭 엉엉 울다가 갑자기 히죽히죽 웃는 모습과 같습니다. 왜 24-25절에는 이러한 큰 반전이 있습니까?
그것은 성도가 탄식 가운데 오래 머물러서는 안되는, 아니 머물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라면 이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탄식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탄식하는 존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도약은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니 힘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내 자신을 보니까 사망의 몸인게 분명합니다. 자기에는 희망이 없고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내가 사망의 몸에서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으며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지닌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힘이 생기더라는 말입니다. 내 속을 바라보니까 소망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과 힘주심을 바라보니까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갑자기 감사와 찬송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탄식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될 근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8:1-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자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성령충만을 받으면, 그래서 오직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만 하면 이 모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내 능력으로는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길이 없지만, 내 속에 계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면 이 모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선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옛사람과의 싸움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질 때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 사탄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걸고 넘어지면서 끊임없이 정죄하고 고발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결단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까닭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성령 충만을 받으면, 오직 성령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시면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고 옛 성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내 힘으로는 안되는 일,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 능히 모든 일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재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하지만 성령께서 역사해주시면 한꺼번에 3천명이 회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시몬 베드로, 그는 옛성품에 져서 패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충만함으로 입었을 때 그는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어 주시고 함께 해주시면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성도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의 삶이요 성령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 주시면,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승리하는 삶! 이것은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됩니다. 이를 악문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능력 부어주시면 비로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할 때 옛사람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능력있는 삶, 열매맺는 삶,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분명히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사실 건강하다는 증거이고, 내 속에 생명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속에 두 자아, 옛 사람과 새 사람, 겉사람과 속사람, 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이 싸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끗한 모습으로 서서 성령의 능력과 충만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 자아의 싸움에서 갈등을 경험하지만, 오히려 그 갈등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더 강하게 힘입고, 성령충만함을 누리는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사시고 많은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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