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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 지역 지대를 높이는 공사 (사진:최용우)
【쑥티일기376】옛날에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금강변의 갈대숲에 불을 놓아 평지를 만든 다음 동네를 만들었는데, ‘대평리’입니다. 대평리는 일제시대 연기군에서 조치원보다도 더 큰 동네가 되었습니다. 대평장의 쇠전(소를 거래하는 장터)은 그 규모가 전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만큼 큰 장터였습니다.
그런데 해방 다음해인 1946년 6월 큰 장마에 제방이 터져 단 하루만에 대평리는 물길에 대부분 휩쓸려 떠내려가버렸습니다. 대략 360채의 집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복구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평리가 처음부터 강가 갈대밭 자리에 만든 동네라 또다시 물속에 잠기지 말란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평리보다 지대가 높은 용포리 지역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오일장, 학교를 모두 용포리에 만들어서 용포리는 꽤 큰 마을이 되었습니다. ‘대평리’는 당연히 사라지고 논으로 변했습니다. 행정구역상 ‘대평리’는 50년 전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동네는 용포리 보다는 ‘대평리’로 불립니다. 정류장도 ‘대평리’ 시장도 ‘대평시장’ 파출소도 ‘대평파출소’ 이발소도 ‘대평이발소’ 버스 노선도 ‘대평리 종점’ 교회도 ‘대평교회’.... 죽은 대평리가 살아있는 용포리를 잡아먹은셈입니다.^^
대홍수 당시 대평리를 복구하려면 다시는 홍수로 물에 잠기지 않도록 낮은 지대를 흙을 채워 높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산 몇 개를 옮겨다 메워도 부족할 정도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대평리를 포기하고 지대가 높은 용포리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시 공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옛날 대평리 지역에 돌과 흙을 채워 지대를 높이는 일을 언제 했는지도 모르게 끝내놓았네요. 저 많은 돌과 흙을 언제 어디에서 가져다 채웠을까요? 우리나라 토공기술 참 대단합니다. 옛날에는 꿈도 못꾼 일을 소리소문 없이 뚝딱 해 놓았네요.
그리고 ‘대평리’라는 옛날 지명도 새롭게 다시 붙였고, 그 자리에 세종시청, 교육청, 법원, 학교, 고속버스터미널, 종합운동장이 들어섭니다. 세종시의 도시행정 중심지가 되는 것이지요. 대평리가 옛 영화를 다시 되찾을 모양입니다. ⓒ최용우 2013.6.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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