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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5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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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년6월30일 http://dabia.net/xe/sermon/695230 |
정용섭 목사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성령강림절후 제6주, 6월30일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생각들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십자가 사건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당시에 합법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종교법과 로마의 정치법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당시 어느 누구도 억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건을 정의 실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오늘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분의 죽음이 왜 합법적인 것이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은 그 시대에 한정되기 때문에 잘못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해서 판단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판단이나 시대정신에 예속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리켜 제자도(弟子道)라고 합니다.
보통 제자라는 말은 선생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제자라는 말을 별로 잘 안 쓰고 학생이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 제자와 학생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제자는 스승과의 관계에 무게가 있다면 학생은 배우는 것에 무게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제자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배우는 내용도 중요합니다. 불교는 내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부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처의 깨달음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깨달음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와서 배운 다음에 각자의 길을 가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물러갔다거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장면에서 제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게 인간에게는 아예 불가능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각각 반응한 세 사람이 나옵니다.
세 종류의 제자들
첫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큰 소리 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 이런 대답을 들으면 ‘기특하다.’고 칭찬해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예상외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민망했을 겁니다. 자신의 선의나 진정성이 무시되었으니까요.
이 사람이 예수님을 실제로 따르고 싶어 했는지 아니면 말만 그럴듯하게 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양쪽 가능성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내다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이런 일들은 반복되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그대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은 많이 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게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세상살이에서도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도 쉽게 무너집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는 유별나게 의지가 약하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말과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겁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똑바로 믿고 반듯하게 따라서 살아가십시오, 하고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둘째, 어떤 제자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일단 장사를 끝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부모의 죽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대답을 들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심하지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요?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비정한 말씀을 하신 걸까요? 제자가 되려면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할 최소한의 인간관계마저 포기하라는 뜻일까요?
아버지를 장사하겠다는 말이 지금 당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치루겠다는 뜻처럼 들리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늙으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 마친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말에는 진정성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녀로서의 책임까지 뒤로 물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야박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 일을 대비시킵니다. 하나는 죽은 자들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죽은 자들의 일은 이 세상살이에 속한 일들입니다. 먹고, 자고, 배설하고, 그리고 돈 벌고, 가족을 꾸리고, 여가를 즐기는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젊음, 건강, 미모, 명예, 재물, 심지어 고상한 윤리적 가치와 사상까지 모두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그런 정도로 처리하면 됩니다. 거기에서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서 가능한 것을 사람에게서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세상살이는 손에 딱 잡히는데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못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완전히 부정하고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져듭니다. 그건 뭘 모르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여기 세상살이 안에 신비한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서 살라는 뜻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신앙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셋째, 어떤 제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절) 이 사람의 말에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 문장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출가하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하겠다는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걸 부정하는 듯한 말씀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절)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본다면 이 사람이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걸 피하고 싶어 한다고 봐야 옳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선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가리켜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세 종류의 제자들 중에서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한 경우에 해당되기도 하고, 세 경우 모두에 해당되기도 할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다시 절감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제 신앙적인 자세를 새롭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짐해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세 명의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그런 말씀을 다시 듣게 되는 상황에 떨어질 겁니다. 그게 우리의 삶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신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겁니다. 예배, 기도, 헌금, 봉사 등등, 모든 교회 생활에 매진하는 겁니다. 이런 신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도 대부분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매달리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냥 신자라는 타이틀만 걸어두고 느슨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신앙은 그야말로 형식이 됩니다. 신앙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그만둘 생각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기회만 되면 교회생활을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 지성인들이 이런 입장에 속할 겁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미 앞에서 저는 대답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이 실제적으로 이해되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게 뭔데, 그렇게 살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지금 이렇게 세상살이의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제자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의 긴박성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셨고, 출가하신 뒤에 첫 마디로 전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셨나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그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막 1:15)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회개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나 운명은 재천이다, 하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주인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고, 돈을 벌고, 세련된 웰빙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끝없는 경쟁을 통해서 자기를 성취하고 확대하려고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을까요? 소유는 늘어나고 취미생활은 다양해졌을지 모르나 영혼은 죽어갑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3-21)가 말하듯이 오늘밤에 죽는 것도 모르고 재산을 늘리는 것에만 온갖 신경을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지금 도사 연하면서 그런 일상을 가볍게 뛰어넘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상을 소홀하게 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분명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생명의 주인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확신하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로 영혼의 관심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생명은 선물로 주어질 뿐입니다. 이런 말이 추상적이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절대 자유, 절대 평화, 절대 만족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잠시 즐거운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죽음까지 넘어서는 궁극적인 기쁨을 우리가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마 6:31-33)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놀랍게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게 단순히 교회 잘 나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에 관계된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보다 더 시급한 일은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살이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즉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롭고 고유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어두십시오. 거기에서 여러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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