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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4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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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
산상수훈(16) 하나님의 상 받는 아들 (마태복음 5장 43-48절)
성도의 제일 소원은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을 만납니까?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낼 때입니다(히 12:14). 사람관계가 막히면 하나님관계도 막힙니다. 즉 한 사람이라도 원수를 맺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도 막힙니다.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살면서 잠깐 혈기를 내고 분노할 수는 있지만 곧 회개하고 혈기와 분노를 극복하며 온유와 평안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무협지를 보면 대개 얘기 흐름이 유사합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부모가 무참하게 죽습니다. 그때 주인공은 간신히 살아나 절벽 밑에서 최고의 무술을 연마해 결국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원수를 갚는 삶이 복된 삶일까요? 아닙니다. 복된 삶은 ‘원수를 갚는 삶’보다는 ‘원수를 품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만 억울하고 삶의 통쾌함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통쾌한 은혜가 없고 원수를 품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통쾌한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27년 전, 서울 신당동에 있는 10층 건물의 합선으로 난 화재가 저의 아버님이 운영하던 자동차 부품 대리점 창고로 옮겨 붙었습니다. 그때 고시생 3명이 새벽 2시쯤 당구를 치러 나왔다가 그 건물에서 아버님 창고로 불이 옮겨 붙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그대로 증언해서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고시생들의 증언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10층 건물에서 불이 옮겨 붙었다는 증언이 쏙 빠진 것입니다. 그날 고시생들과 건물주 사이에 어떤 은밀한 작업과 약속이 있었는지 하루 만에 고시생들의 진술이 번복되고 조서도 바뀐 것입니다. 결국 저의 아버님은 화재로 인한 손해를 한 푼도 배상받지 못하고 당시 돈으로 약 1억 5천만 원 정도를 허공에 날렸습니다. 지금 돈으로 약 10억 원 정도입니다.
그때 저는 한참 정의감에 불타던 20대 중반으로서 그 건물주와 고시생들을 미워해야 했지만 다행히 그때는 교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던 때였습니다. 그 은혜로 미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늘 은혜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만약 그때 계속 그 일에 집착했다면 그 건물주는 아무 탈 없이 잘 살아도 저만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을 잊고 대신 새로운 길을 찾아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 건물주 소식은 모릅니다. 그를 계속 미워했다면 제 삶이 망가졌겠지만 하나님께 그 상처와 아픔을 다 맡겼기에 하나님이 가장 공의롭게 그 일을 처리하셨을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어떤 큰 상처도 마음속의 쓴 뿌리로 자라지 못하게 하십시오. 인생의 아픔은 새로운 기회의 문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상처 중에도 평안을 잃지 말고 그때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골로새서 3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은 감사와 직결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상처와 아픔 중에도 감사할 것을 찾아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평안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자기와의 평화, 이웃과의 평화는 한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을 때 자기와의 평화가 있고 그때 이웃과의 평화도 있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면 자기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그때 하나님과의 막힌 관계가 뚫리면서 은혜의 문도 열리게 됩니다.
< 하나님의 상 받는 아들 >
본문에는 2가지 위대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 4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과 또 하나는 본문 4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상주시는 축복입니다. 그 2가지 축복이 엮인 ‘하나님의 상 받는 아들’의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질문에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막 12:30-31). 사랑은 성도의 평생 실천 제일 덕목입니다. 그 사랑 중에서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어머니의 사랑일까요?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도 자식에게만 지나치게 집중되어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한계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한적이고 육적인 사랑 이상을 원하십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본문 43절과 44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원수사랑은 예수님의 교훈 중에 최고의 교훈입니다. 당시 어떤 유대 공동체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당한만큼 보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 45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큰 범주에서 같은 개념이란 말입니다. 성도를 가장 성도답게 만드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2.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본문 44절에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며 기도를 강조하신 것은 원수 사랑과 용서는 자기 의지로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기도할 때 주어지는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면 가장 큰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 부족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문제해결과 응답 이전에 자신이 변하면서 용서할 마음과 용기가 생기고 상처를 준 사람의 단점보다 장점이 크게 보이면서 용서가 쉬워집니다. 그때 평안도 생기고 자신을 얽어맨 질병과 저주의 사슬도 풀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용서하소서!”라는 ‘용서의 은혜’만 구하지 말고 “하나님! 용서하게 하소서!”라는 ‘용서의 능력’도 구하십시오. 기도의 승리자가 되어야 용서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 십자가의 핵심 메시지도 용서입니다. 또한 복음의 핵심 내용과 하나님의 핵심 성품도 용서입니다. 용서는 지상 최대의 치료약입니다. 병의 치유를 원하면 용서할 사람을 찾아 용서하십시오. 또한 인격과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를 원해도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엔도르핀보다 천 배 약효가 있고 기적의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보다 만 배 약효가 있습니다.
왜 현대인에게 질병과 상처가 많습니까? 그만큼 용서가 어렵고 현대인들이 용서를 잘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살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용서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현재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고 계속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기적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용서는 원수를 위하는 것 같지만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평안도 없고, 행복도 없고, 축복도 없습니다. 그처럼 용서가 중요한 줄 알면서도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괜히 오해하고, 무시하고, 거절하고, 비판하고, 냉대하는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합니까? 또한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난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합니까? 그처럼 용서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안 되는 신적인 것이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3. 사랑의 폭을 넓히십시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 말씀은 사랑의 폭을 넓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만 품지 않고 한과 상처가 많은 죄인들과 병자들도 품으시며 그들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처럼 사랑의 폭을 넓히십시오.
본문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은 세리나 창녀가 못된 존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세리나 창녀보다 더 못된 사람도 많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차원 높은 사랑을 도전하려고 당시 죄인의 대명사로 여겼던 세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사실 세리나 창녀들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차원의 사랑에서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한 것은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면 상이 없지만 원수 사랑과 같은 차원 높은 사랑을 하면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 말씀은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을 세세하게 살피시고 상급을 차등적으로 주신다는 암시가 담긴 말씀입니다.
본문 47절에서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안 된다!”는 말씀도 차원 높은 폭넓은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동족만 지나치게 사랑해서 남은 무조건 배척합니다. 그것은 확장된 이기심이 될 수 있습니다. 애향심이나 애국심도 너무 지나치면 끔찍한 죄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성도는 선교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편협한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악인들도 ‘의리’를 내세워 좋을 때는 자기들끼리 더 끈끈하게 뭉칩니다. 그처럼 좋아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는 수준의 사랑에 머물지 말고 사랑의 폭을 넓히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내려주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같은 거리에서 같은 정도로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닙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은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무분별한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사람을 무분별하게 다 구원하거나 같은 정도로 사랑하거나 보상하시지 않습니다.
때로 멀리해야 할 사람은 멀리서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것은 일반은총입니다. 그런 일반은총 외에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은총도 있습니다. 일반은총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본문 말씀을 내세워 무분별한 사랑을 조장합니다. 그러나 원수 사랑에 관한 말씀은 원수를 대하는 태도로서 복된 길을 가라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지 무분별한 사랑을 조장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은 사랑보다 복수를 강조하고 신약성경은 복수보다 사랑을 강조한다고 여기지만 구약성경에도 원수 사랑을 언급한 구절이 많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도 타락한 사람을 강력히 정죄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그처럼 사랑은 공의로운 분별을 동반해야 합니다. 때로는 고난과 징계나 출교 등을 통해 멀리서 사랑하는 모습도 있어야 깨달음과 성숙함도 얻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자녀에게 고난의 채찍을 허락하시고 사랑하는 부모도 자녀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십시오
사실 원수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가 신적인 성품을 닮는 문제와 관련된 명령입니다. 본문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은 ‘완전함’의 의미는 아닙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인 성품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인 성품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성품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신적인 성품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해줄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남을 축복해주는 일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축복해주기는 쉽지만 마음에 들지 않고 미운 사람을 축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원수를 축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축복하기 어려울 때 축복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습니다.
왜 하나님은 원수를 축복하길 원하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최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와 복수는 잠깐의 통쾌한 감정은 주지만 통쾌함 후에 자기 실망감과 허전함도 뒤따릅니다. 저주와 미움은 하나님의 저주와 미움을 부르고 용서와 축복은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을 부릅니다. 또한 함정을 파면 자신부터 그 함정에 빠지고 남에게 고통의 짐을 지우면 자기 삶의 무게도 무거워집니다. 남을 비판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마음도 불편해지고 생각도 많아지면서 결국 창조성도 떨어집니다.
이제 억울한 일을 만나면 너무 속상해 하지만 말고 그 일을 자기 성숙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원수는 ‘자신의 무지로 내 성숙을 돕는 사람’이란 반전적인 생각을 가지면 얼마든지 원수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감정을 극복해서 원수를 불쌍히 여기며 축복할 때 하나님의 마음도 얻게 되고 점차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과 자기 초월적인 시각이 생기면서 생각을 초월한 축복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통쾌하게 원수를 갚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서로 용서하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다 부족한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일은 힘든 일이지만 그 일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답게 되고 마음에 평안도 임하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가끔 누군가 내 차를 받고 말없이 가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화가 납니다. 그래도 욕하는데 너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를 찾기도 힘들고 자신이 욕한다고 해서 그가 저주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 그 일을 넉넉하게 웃어넘기십시오.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그런 경우에 넉넉하게 웃어넘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물질적인 능력도 힘써 구하고 구비하십시오.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웃어넘기는 삶을 훈련하면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물질적인 능력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원수가 잘못되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가지고 그를 용서하십시오. 그런 용서의 삶이 쉽지는 않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깊이 성찰하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원수를 용서하고 큰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미움을 떨쳐버릴 때 그 손해 입힌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그를 처리해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자신의 사명을 따라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 화평을 먼저 추구하십시오 >
이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십시오. 받은 상처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살다 보면 연약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만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처를 줄 때도 많습니다. 그처럼 상처를 받은 것만 알고 상처를 준 것을 모르는 무지가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삶에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1994년 이곳에 아파트가 입주할 때 지하 전 층이 슈퍼였습니다. 단지 내 슈퍼가 손님에 비해 실 평수가 200평이 넘을 정도로 너무 크니까 매년 적자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2000년에 서울에서 이사 온 한 교회에 이 공간을 팔았습니다. 그러자 생필품 구입이 불편해지고 주차난이 생긴다고 일부 아파트 주민들이 1년 반 동안 무섭게 교회 입주 반대 데모를 벌였습니다. 일부 상가 점주들도 장사가 안 된다고 데모에 동조했습니다. 그래도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법적으로 막지 못해서 결국 그 교회가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들어왔지만 아파트 입주가 오래 전에 마무리 된 상태에서 이사 오는 사람도 적었고 싸움의 후유증으로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 3년 동안 교회에 단 2명만 등록했습니다. 결국 그 교회가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우리가 이 공간을 샀습니다. 그 후 교회가 강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나오면 반대 주민들도 강해지니까 지난 10년간 조용히 지내면서 주민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많이 참았습니다.
지금은 동네 주민들 중에 우리 교회에 반감을 가진 사람도 없고 또한 단지 내에 사는 여러 권사님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이제는 아파트 동 대표들도 함부로 못합니다. 10년 전에 동네 교인이 한 명도 없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도 상가 내의 관리비, 시설물 관리, 청소, 수익 배분 등의 문제에서 여전히 불공평한 관행들이 많습니다. 그런 잘못된 관행으로 지난 10년 간 대략 5천만 원 이상의 관리비 추가 지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그 문제를 논의하는데 그때마다 항상 내리는 결론이 “교회니까 참자!”란 결론입니다. 소중한 헌금의 잘못된 지출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이웃 점주들과 다투면 교회의 이미지만 나빠질 것이기에 선교하고 나눈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이웃 점주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축복 받아서 나눔을 선도하는 모델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도 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것을 정말로 믿으면 혈기를 동반한 정의감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정의감을 내세워 혈기를 부리고 이웃 점주들과 싸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해서 건강해야 할 우리 성도들이 건강을 잃고 축복받아야 할 우리 성도들이 축복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쉬운 소탐대실이 됩니까? 가슴속에 품은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루려면 원수 사랑과 용서와 양보는 필수 이수 과목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헌금의 잘못된 사용 결과로 점주들이 축복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25개 상가 중 한 상가도 잘 되는 상가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관리비 더 내는 문제는 화평을 위해 이웃들과 나눈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작은 것을 얻으려고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잃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자세히 보면 심은 것보다 더 거둘 때가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그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또한 원수를 축복할 때 하나님은 그 원수를 축복하지 않고 그 원수를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진정으로 많이 나누고 선교하는 능력을 원하면 지금 이 시간에 원한과 미움을 다리 아래 물처럼 깨끗이 떠내려 보내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후로 편안한 마음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내일의 축복과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며 사십시오.
살면서 ‘관계의 화평’과 ‘금전의 이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을 만나면 이익보다는 화평을 먼저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화평 중에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고 그 평안을 통해 꿈과 비전을 위해 나갈 수 있는 건강과 지혜와 창조성을 받아서 마침내 꿈을 이루고 나눔의 모델이 되는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상 받는 아들이 되고 예수 믿고 인물 되는 꿈을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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