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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과 신앙을 회복하자

요한계시 빛의 사자............... 조회 수 2729 추천 수 0 2013.07.12 14: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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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계2:1-7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처음 사랑과 신앙을 회복하자

 

본문: 계2:1-7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

 

옛날에 가난과 고생을 딛고, 열심히 노력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상이 되면서부터 날마다 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있던 무거운 기왓장을 뒤뜰로 옮겨 쌓아놓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마당으로 옮겨놓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그러한 광경을 보게 된 친구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낮도깨비 같은 짓인가! 듣자하니 꼭두새벽에 기왓장을 뒤뜰로 옮겼다가 저녁이면 다시 마당으로 옮겨 쌓는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 말에 재상은 나즈막하게 그러나 힘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힘든 일을 일부러 함으로써 내가 어려웠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함이네. 지금의 편안한 생활에만 빠져 나태해질 정도라면, 하물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정치를 어찌 하겠는가? 파멸이 오는 것은 지식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어려웠던 경험이나 그때의 마음가짐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네."하고 말하며 기왓장을 계속 옮겨 쌓았습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히13:7) 처음에 얼마나 좋은 말을 하고 모범적인 행동을 보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의 마음과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금융의 중심지이며 여신 디아나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전도할 때 디아나를 섬기는 은장색들이 일어나서 크게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에베소는 마술이 성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 수많은 마술쟁이들이 그들의 요술책을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 후에는 아볼로,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이곳에서 전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목회활동을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성경훈련을 잘 받았고, 교리적으로 바르며 지식이 풍부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 중심의 좋은 교회가 크게 부흥을 하고 나니까 교회가 제도화되고 조직화되면서 처음 사랑을 잊어가게 되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봉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전도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찬송하던 것이 그쳐졌습니다. 그러니 예배가 형식이 되고 의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절 말씀 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에베소 교회의 사자’는 에베소 교회 자체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드리는 장소, 즉 예배당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았다’고 했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사자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 가정을, 사업을, 생각을, 하는 일을 붙잡아 주십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일곱별을 붙잡고 그 중에 다니십니다. 섭리하십니다. 다스려주십니다. 직접 일하십니다. 직접 확인하십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절과 3절, 6절에는 주님의 칭찬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3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본문에 에베소 교회의 일곱 가지 칭찬이 있습니다. 먼저 네 행위를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십니다. ① 앉고 섬을 아십니다. ② 우리의 언행심사를 아십니다. ③ 여러분들의 수고를 아십니다. ④ 여러분의 인내를 아십니다. ⑤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함을 아십니다. ⑥ 거짓사도를 분별 한일을 아십니다. ⑦ 참고 또 참는 것을 아십니다. ⑧ 부지런함을 아십니다. ⑨ 특히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을 주님께서 먼저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니골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신앙에서 타락하여 법을 무시하며 도덕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① 율법의 때는 지났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 ② 육신은 악이요, 영만이 선하므로 육신으로 무슨 일을 하던 관계가 없다. ③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던지 해 받음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 주장을 좇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으나 그 생활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지만 호색했습니다. 방탕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죄악의 길을 걸었으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서 죄를 씻어주십니다. 거기에 우리는 깨끗함을 얻습니다.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생활이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방탕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니골라당의 교훈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 니골라당의 잘못된 교훈과 그들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사실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는도다”

 

나는 누구입니까? 지금 말씀을 주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혹에 빠집니까? 나도 모르게 죄악에 빠집니까? 나도 모르게 탐욕에 빠집니까? 하나님께 멀어집니까? 교회와 멀어집니까? 예배와 멀어집니까? 기도가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전도가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신앙의 고백과 생활이 멀어지십니까? 예수님은 ‘나도 이것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가 날마다 생활 중에 나타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실 것입니다.

 

본문 4절에는 주님의 책망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춘추 시대의 일입니다. 천자나라인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각 제후들의 패권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 중 오나라와 월나라가 싸움을 벌여 오나라 군대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오나라 왕 합려가 죽어가며 아들 부차에게 나라를 일으킬 것을 당부했습니다. 왕이 된 부차는 아버지 임종시의 맹세를 잊지 않으려 언제나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면서 병력을 증강시켰습니다. 후에 다시 오와 월이 격돌하여 이번에는 월나라 왕 구천이 포로로 붙잡힙니다. 그러자 부차는 예전에 장작 위에 자던 때의 자세를 금새 잊어버리고 구천 왕을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교만해지고 향락에 빠지는 생활을 합니다. 대신 목숨을 구걸해 건진 구천 왕은 천장에 쓸개를 달아 두고 수시로 그 쓰디 쓴 맛을 보며 힘을 키워 나갑니다. 그러다 부차 왕이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해서 결국 승리를 얻어냅니다. 이것이 유명한 '와신상담'의 고사 내용입니다.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행위를 일컬을 때 하는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와신상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로 사람들이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의 마음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바리새인들도 처음에는 독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외식과 율법주의로 변해 예수님까지 정죄하는 무리로 전락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감격하고 좋아하고 열심입니다. 취직을 해도 막 들어가서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열심히 합니다. 부부도 처음에는 좋아해서 화합이 되었지 싫어하는 사이에 부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첫날밤은 아름답고 추억에 남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는 항상 첫날밤과 같은 마음으로 지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생활에서 처음 가지는 이 마음으로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감동이 없고, 마음에 감동이 없을 때 육체에 감동이 없으며, 마음과 육체에 감동이 없으면 생명에 감동이 없는 법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에게 칭찬 받을 일을 많이 한 교회입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악한 자들과 거짓 스승들을 용납지 않은 것과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여러 가지 훌륭한 충성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귀중한 처음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99가지 잘한 것이 있을지라도 한가지 중요한 처음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99가지가 아무 의미도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어진 것입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는 처음사랑으로 맺어진 신혼 부부와 같습니다. 부부사이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살림을 잘하고 인물이 아름답고 재물이 풍성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만 있으면 셋방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살림을 좀 잘못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처음 열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집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권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장로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목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전도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감격을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가의 구절과 같은 감격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격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처음 구역장이 될 때의 열심을, 처음 성가대원이 될 때의 그 열심을, 처음 교사가 될 때의 그 열심을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봉사와 전도와 예배가 형식과 의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교회선택은 교인이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선택할 때 무엇을 보고 선택하셨습니까?

① 목사의 설교입니까? 심방입니까? 사랑입니까?

② 장로님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 때문입니까?

③ 구역장님들의 권면 때문입니까?

④ 권사님들의 사랑 때문입니까?

⑤ 교회의 분위기 때문입니까?

⑥ 성가대의 찬양 때문입니까?

⑦ 교회학교의 가르침이 좋아서 입니까?

⑧ 교회의 시설이 좋아 보여서입니까?

 

그 선택은 몇 년 전의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단체와 다른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한번 나왔다고 금시 그 생활이, 생각이, 사는 모습이 갑자기 깨끗하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로서 날마다 한 가지씩 서서히 변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사람냄새가 납니다. 인간의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100% 흡족히 맞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왔다갔다 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처음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좋았다면 그 좋은 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귀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귀한 것 하나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직업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직업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일 사람도 같습니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칼이나 가위가운데 ‘쌍둥이표’가 있는데 이 상품은 수대를 내려오는 가업이라고 합니다. 변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합니다. 심지가 굳은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또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처음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으면, 내가 집사가 되면, 내가 장로가 되면, 내가 권사가 되면, 내가 구역장이 되면, 내가 목사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먹은 자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어떤 자세로 헌신하고 어떤 자세로 사랑하겠노라고 했는데 물거품 같이 그 열심이 사라졌다는 꾸지람입니다. 직분을 가진 자의 교회 봉사는 감사의 열매입니다. 감격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못해서, 할 수 없어서, 남의 눈치 보여서,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정도라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사이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면 그 가정에는 불화만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돈 벌어다 주는 기계이고 아내는 자식 키우고 살림살이하는 의무에만 매여 살면 짜증뿐일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감격, 구속의 감격,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 나를 위한 것이고, 채찍에 맞은 것이 나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감격이 사라지면 주일날에나 겨우 나와서 건성으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헌금 내고는 돌아갑니다. 그리고 한 주간 예수님을 잊고 삽니다. 가정에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직장에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이 생활화되지 않아 불신자의 손가락을 받는 것입니다.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한 때 볼품 없는 작은 인명 구조 본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초라한 오두막 한 개 뿐이었고 구명 보우트도 작은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헌신적인 몇 명의 구조대원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험한 파도 속에서 계속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점차 이 구조 본부는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구조된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발적으로 구조 대원으로 봉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많았고, 돈을 대주는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인명구조 본부는 구명 보우트도 새로 구입하고 구조 대원들도 더 훈련시키는 등 작은 구조 본부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기구가 커지자 새로 가입한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볼품 없는 낡은 건물과 시설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조된 사람들의 임시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도 좀 더 편안한 시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간이 침대를 훌륭하고 편안한 침대로 갈아치웠고, 건물도 확장 보수하고 좀 더 좋은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구조대원들이 대기하는 동안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간단한 운동 기구들과 장기, 바둑 등 오락 시설도 갖추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 인명 구조 본부는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 장소가 되어 버렸고 그곳을 일종의 사교 클럽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곳을 더욱 아름답게 치장했고 멋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이런 변화와 함께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본연의 임무를 위해 위험한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차 관심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런 일을 전담할 수 있는 구조대원들을 새로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가자 그 다음 번에 모인 회원들의 총회에서는 불화가 생겨났습니다. 많은 회원들은 클럽의 인명 구조 활동들이 별로 즐겁지도 않고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제부터는 인명 구조 활동은 그만 두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회원들은 인명 구조 활동이야말로 이 조직 본연의 임무요 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인명구조 본부가 사교 클럽으로 바꾸어져서는 않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주장은 투표 결과 패배당했고, 만일 그들이 계속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저 아래편 해안에서 그들나름의 구조본부를 새로 만들어 시작할 수 있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교 클럽에서 나와 새로이 구조 본부를 만들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 구조 본부는 옛날 구조 본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구조 본부는 또다시 일종의 사교 클럽으로 발전해버렸고, 그래서 또 그 아래편에 또 다른 인명 구조 본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고 그래서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서 수많은 클럽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구조 당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사람을 생명을 구하는 일인데, 많은 교회가 선교를 통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자체 유지와 교인 상호 간의 친목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인명 구조 본부의 역할보다는 사교 단체나 친목 단체의 역할만 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회 위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교회의 본질이 변질되어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과 사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역자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성품과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경건한 성품과 거룩한 영적 습관을 갖도록 양육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바울 사도가 처음 갔을 때의 기록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갔을 때 너무 냉냉하고 차갑고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12명의 사람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바울이 물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물세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3년간 목회하고 떠날 때 사랑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봉사와 희생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첫 은혜입니다. 이 은혜와 은사를 잊어버렸다는 책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아멘, 아멘으로 넘칠 것입니다.

 

본문 5절에는 주님의 권면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데는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① 생각하라 ② 회개하라 ③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먼저 과거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절을 생각하고 그때와 지금과의 차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현재의 형편과 나의 영적인 생활의 현 주소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 있을 때 정확한 처방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회개하라’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사용한 회개라는 말의 뜻은 ‘마음을 고침’이 근본적인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회개를 늦추면 안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고쳐야 합니다. 미루면 안됩니다.

 

다음은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 그냥 머무르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말하기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즉 회개치 아니하면 예수님께서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한다는 엄숙한 경고입니다. 불행하게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했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현재 에베소는 폐허가 되어 일부 철로가 통하고 있으나 몇 개의 움막만 있을 뿐 옛날의 교회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촛대를 옮긴 증거입니다. 회개는 은혜를 받는 증거입니다. 회개는 복을 받는 증거입니다. 회개는 회복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세 번 반복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처음사랑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위기에 당면하였을 때 세 번씩이나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한 것은 처음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살신성인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신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 같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처음사랑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 때문에 떨어졌는지 돌이켜 회개하여 처음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할 때에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 과실을 먹는 천국에서 영생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때의 기쁨을 기억하십니까? 형용할 수 없는 그 분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꼈던 그 아름다운 날을, 그 첫 만남, 그 첫사랑,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그 첫사랑을 잃어버린 걸까요? 미혹의 영이 눈앞을 가리는 이 땅 우리는 하루 하루의 삶에 지치고 낙심하며 때론 무덤덤하고 지루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마셔도 곧 목마를 세상의 우물물을 바라보며 주님 주시는 놀라운 생수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지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첫사랑을 회복하라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믿음을, 순진한 기쁨을, 그 뜨거운 가슴을 회복하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붙잡고 있던 허망한 굴레들을 벗어버리고 주께로 달려갑시다. 주께서 우리의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소망하면서...시작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온전한 끝이 존재할 때만이 참의미가 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삽시다.

요한복음 9장 1-11절에 보면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이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 말씀대로 따랐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난생 처음 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 기쁨 그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 눈뜬 이에게 새로운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전에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고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이 사람이 세상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질문에 “내 눈을 뜨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자 그에게는 고난과 핍박이 닥쳤습니다. 요한복음 9장 34절에 보면 그는 유대인 집단에서 출교 당하고 맙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움이 닥치면 처음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눈을 떴던 그때로 돌아갑시다. 오직 예수만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했던 그때로, 때묻지 않은 맑고 순수한 믿음을 가졌던 그때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드리던 그때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예수로 말미암아 눈뜬 사람답게 살아갑시다.

 

본문 7절 말씀에는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데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먼저 낙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몸이 강건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죽을 몸이 영생한 몸, 변화된 몸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낙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음 생명과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생명과는 보고 즐기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먹으라고 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령한 말씀을 듣는 영의 귀가 열려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는 놀라운 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뜨거움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과 함께 살며 주안에서 승리하는 생활하게 하여 주세요 그래서 비록 작지만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태완 목사(갈릴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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