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 성경본문 : | 마6:19-20 |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2013.6.30 성암교회 |
보물을 하늘에 쌓으시오
마6:19-20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치신 다음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기도문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세상사를 걱정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 중에 들어 있는 [보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물]이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구약 잠언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잠언 2:4에 보면, “네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은처럼 구하고 보물을 구한다면..”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서에도 ‘보물’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그러면 이 단어를 예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해석을 했을까요? 랍비들은 이 단어를 ‘이것은 토라의 말씀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보물’이란 다른 게 아니라 ‘말씀’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보물을 찾으려면 심연의 깊은 곳에 내려가야 한다. 이처럼 사람이 그것을 좇아가 찾는다면 그런 가운데 지혜와 이해를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했던 [보물]은 곧 [토라]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성경]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보물인 셈입니다.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물을 찾는다는 것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에서 흔히 엿볼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쉬 이야기에 따르면 길가메쉬가 생명을 재생 시킬 수 있는 풀을 심연 깊은 곳에 내려가 찾았습니다. ‘길가메쉬는 발에 돌을 묶고 잠수하여 심연 깊은 곳에서 풀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걸 신화소라고 하는데, 이런 신화소가 고대 근동 사회에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문학 작품에도 자주 나옵니다. 이렇듯 초기 유대교의 문화적인 배경에서 ‘토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곧 ‘보물’인 것입니다. 이게 복음서에 와서는 ‘예수’ 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뀌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6:35)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토라가 곧 생명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심연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토라를 열심히 그리고 정확하게 공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찾아야 하고, 초기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 지혜와 진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보물이란 다른 게 아니라 ‘예수’이며 그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이 창고에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시오’에서 하늘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천국과 보물은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복음서에 전해진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는 비유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마13:44)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자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소유주가 있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소유주가 있는 밭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밭’을 비유한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것은 잠언 6:6을 이해해야 합니다.
‘개미에게 가라, 게으름뱅이야’
랍비들은 이 구절을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은 현관과 비슷하고 심판의 세상은 연회장과 비슷하다. 만일 사람이 자기스스로 현관에서 준비하지 않으면 어떻게 연회장에 들어가겠느냐. 그걸 개미에게 배우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현관에서 토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연회장에 들어갈 준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연회장은 천국이고 현관은 이 세상입니다. 마22:1-14에도 천국을 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25:1-4엔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을 맞아 잔치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비유에서도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예복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기름이나 예복은 마치 유대인들에게 토라 공부와 같습니다.
이것을 좀 더 확인하기 위한 성경 말씀으로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마13:36-43)를 들 수 있습니다. 추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운 사람들을 비유하는 단어 아닙니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비유는 자명합니다. ‘밭’은 토라를 배우는 ‘학교’이고, 토라 공부를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문에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밭가는 일에 비유합니다.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그걸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걸 알고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그 밭의 소유주에게서 그 밭을 사서 ‘보물을 캐’서 소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보물이 있는 밭을 발견 한 다음에- 자기의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사고-그리고는 그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확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물이 밭에 숨겨 져 있으니까 얼른 재산을 몽땅 처분하여 그 밭을 산후에 밭의 보물을 캐서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끝내버립니다. 그러나 그 ‘밭’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땅이 아니고 ‘토라’거나 ‘말씀’이거나 ‘예수’일 대 그것은 팔아서 쓸 재산으로서의 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밭을 산다’는 말은 ‘훌륭한 수확을 낼 수 있는 좋은 밭을 보는 안목’과 ‘그 밭을 사서 갈고 씨를 뿌려 크게 수확하는 수고’를 비유하는 생명과 진리에 대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려면 좋은 밭을 발견하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안목이 있다는 것은 지혜와 진리지식이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지식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를 완고한 마음대로 놓아두는 자에게는 올바름이 없으며 빛의 길에서 어둠을 쳐다보는 온전한 자들의 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나쁜 밭’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호세아서 10:13절을 해석하는 건데요, “너희가 사악한 땅을 일구면 죄를 추수할 것이며 너희는 거짓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사람들더러 ‘좋은 밭’을 일구라고 모세를 통해서 토라를 주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와 그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토라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분별하는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것이 ‘좋은 흙’이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창세기를 해석했던 예수 이전의 유대공동체는 좋은 밭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봅시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든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매우 좋았다.’(창1:31)
이 본문을 제이라라는 랍비는 말했다.
‘보라, 매우 좋았다.’이것은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매우 좋았다.’이것은 지옥이다.
정녕 지옥이 좋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렇다.
이것은 농원을 가지고 있는 왕에 비유할 수 있다.
왕은 일꾼들을 농원에 데려왔다. 그는 그 입구에 보물 창고를 짓고 말았다.
‘누구든 농원의 일에 적합하면 그 보물 창고에 들어가시오. 그러나 누구든 농원 일에 적합하지 않으면 그 보물창고에 들어가지 마시오.’
이처럼 누구든 계명과 선행을 쌓지 않으면 이것은 지옥이다.
물론 농원에서 왕은 하나님을, 농원은 이 세상을, 보물창고는 에덴동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군가 하면, 계명과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이 왜 매우 좋은 것입니까? 그것은 지옥이 있어야 사람들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토라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전의 유대인 랍비들은 사람이 에덴동산에 들어가려면, 좋은 밭을 일군 의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반대는 사악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선행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리하면, ‘천국의 보물’은 토라이고,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은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이며,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토라를 통해 지혜를 얻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농원에 적합한 일꾼입니다.
이걸, 초대교회 상황과 복음서에 연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은 초대교회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를 깊이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보물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집중하여 보고 배우고 따라 살 때 하늘의 진리에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진리와 지혜를 얻는다고 그게 보물을 하늘 창고에 쌓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소유를 팔아 보물이 숨겨진 땅을 산다는 말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자신의 소유를 예수 공동체에 헌납하는 자선행위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에 집중했다는 것이고, 예수를 보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마19:21을 보십시다. 이래서 천국의 보물을 차지하는 길이 ‘자기 소유를 팔아 자선을 행하고 예수를 따르는데’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는 길이 자선을 베푸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마6:1-4).
결국 보물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는 이웃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자선을 행함으로 천국에 있는 생명의 책에 그것이 기록되어 지옥의 심판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마6:19-20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치신 다음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기도문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세상사를 걱정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 중에 들어 있는 [보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물]이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구약 잠언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잠언 2:4에 보면, “네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은처럼 구하고 보물을 구한다면..”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서에도 ‘보물’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그러면 이 단어를 예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해석을 했을까요? 랍비들은 이 단어를 ‘이것은 토라의 말씀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보물’이란 다른 게 아니라 ‘말씀’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보물을 찾으려면 심연의 깊은 곳에 내려가야 한다. 이처럼 사람이 그것을 좇아가 찾는다면 그런 가운데 지혜와 이해를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했던 [보물]은 곧 [토라]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성경]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보물인 셈입니다.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물을 찾는다는 것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에서 흔히 엿볼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쉬 이야기에 따르면 길가메쉬가 생명을 재생 시킬 수 있는 풀을 심연 깊은 곳에 내려가 찾았습니다. ‘길가메쉬는 발에 돌을 묶고 잠수하여 심연 깊은 곳에서 풀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걸 신화소라고 하는데, 이런 신화소가 고대 근동 사회에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문학 작품에도 자주 나옵니다. 이렇듯 초기 유대교의 문화적인 배경에서 ‘토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곧 ‘보물’인 것입니다. 이게 복음서에 와서는 ‘예수’ 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뀌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6:35)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토라가 곧 생명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심연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토라를 열심히 그리고 정확하게 공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찾아야 하고, 초기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 지혜와 진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보물이란 다른 게 아니라 ‘예수’이며 그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이 창고에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시오’에서 하늘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천국과 보물은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복음서에 전해진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는 비유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마13:44)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자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소유주가 있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소유주가 있는 밭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밭’을 비유한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것은 잠언 6:6을 이해해야 합니다.
‘개미에게 가라, 게으름뱅이야’
랍비들은 이 구절을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은 현관과 비슷하고 심판의 세상은 연회장과 비슷하다. 만일 사람이 자기스스로 현관에서 준비하지 않으면 어떻게 연회장에 들어가겠느냐. 그걸 개미에게 배우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현관에서 토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연회장에 들어갈 준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연회장은 천국이고 현관은 이 세상입니다. 마22:1-14에도 천국을 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25:1-4엔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을 맞아 잔치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비유에서도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예복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기름이나 예복은 마치 유대인들에게 토라 공부와 같습니다.
이것을 좀 더 확인하기 위한 성경 말씀으로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마13:36-43)를 들 수 있습니다. 추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운 사람들을 비유하는 단어 아닙니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비유는 자명합니다. ‘밭’은 토라를 배우는 ‘학교’이고, 토라 공부를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문에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밭가는 일에 비유합니다.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그걸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걸 알고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그 밭의 소유주에게서 그 밭을 사서 ‘보물을 캐’서 소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보물이 있는 밭을 발견 한 다음에- 자기의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사고-그리고는 그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확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물이 밭에 숨겨 져 있으니까 얼른 재산을 몽땅 처분하여 그 밭을 산후에 밭의 보물을 캐서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끝내버립니다. 그러나 그 ‘밭’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땅이 아니고 ‘토라’거나 ‘말씀’이거나 ‘예수’일 대 그것은 팔아서 쓸 재산으로서의 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밭을 산다’는 말은 ‘훌륭한 수확을 낼 수 있는 좋은 밭을 보는 안목’과 ‘그 밭을 사서 갈고 씨를 뿌려 크게 수확하는 수고’를 비유하는 생명과 진리에 대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려면 좋은 밭을 발견하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안목이 있다는 것은 지혜와 진리지식이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지식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를 완고한 마음대로 놓아두는 자에게는 올바름이 없으며 빛의 길에서 어둠을 쳐다보는 온전한 자들의 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나쁜 밭’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호세아서 10:13절을 해석하는 건데요, “너희가 사악한 땅을 일구면 죄를 추수할 것이며 너희는 거짓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사람들더러 ‘좋은 밭’을 일구라고 모세를 통해서 토라를 주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와 그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토라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분별하는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것이 ‘좋은 흙’이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창세기를 해석했던 예수 이전의 유대공동체는 좋은 밭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봅시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든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매우 좋았다.’(창1:31)
이 본문을 제이라라는 랍비는 말했다.
‘보라, 매우 좋았다.’이것은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매우 좋았다.’이것은 지옥이다.
정녕 지옥이 좋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렇다.
이것은 농원을 가지고 있는 왕에 비유할 수 있다.
왕은 일꾼들을 농원에 데려왔다. 그는 그 입구에 보물 창고를 짓고 말았다.
‘누구든 농원의 일에 적합하면 그 보물 창고에 들어가시오. 그러나 누구든 농원 일에 적합하지 않으면 그 보물창고에 들어가지 마시오.’
이처럼 누구든 계명과 선행을 쌓지 않으면 이것은 지옥이다.
물론 농원에서 왕은 하나님을, 농원은 이 세상을, 보물창고는 에덴동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군가 하면, 계명과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이 왜 매우 좋은 것입니까? 그것은 지옥이 있어야 사람들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토라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전의 유대인 랍비들은 사람이 에덴동산에 들어가려면, 좋은 밭을 일군 의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반대는 사악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선행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리하면, ‘천국의 보물’은 토라이고,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은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이며,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토라를 통해 지혜를 얻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농원에 적합한 일꾼입니다.
이걸, 초대교회 상황과 복음서에 연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은 초대교회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를 깊이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보물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집중하여 보고 배우고 따라 살 때 하늘의 진리에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진리와 지혜를 얻는다고 그게 보물을 하늘 창고에 쌓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소유를 팔아 보물이 숨겨진 땅을 산다는 말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자신의 소유를 예수 공동체에 헌납하는 자선행위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에 집중했다는 것이고, 예수를 보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마19:21을 보십시다. 이래서 천국의 보물을 차지하는 길이 ‘자기 소유를 팔아 자선을 행하고 예수를 따르는데’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는 길이 자선을 베푸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마6:1-4).
결국 보물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는 이웃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자선을 행함으로 천국에 있는 생명의 책에 그것이 기록되어 지옥의 심판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