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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후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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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1-17 http://www.yullin.org |
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한 뼈아픈 신앙의 실패를 경험했던,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가 성도들에게 당도했을 때는 이미 그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거나, 임박한 박해로 인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과 소망을 굳건히 하고 환난 가운데 신앙을 지키도록 강권하였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성도들을 격려하는 사도의 방식을 보십시오. 그는 제일 먼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다시 설명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어떤 것인지 상기시킴으로써 성도들이 더욱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을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이 구절은 한편으로는 교회 역사상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구절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교리를 입증하는 매우 탁월한 성경구절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화(神化)의 교리입니다.
II. 신화(神化)의 교리
A.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는 신이 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초대교부들을 비롯해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탐구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살피고자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 신화의 교리는 동방교회에서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발전해 왔습니다. 이 신화의 교리를 동방교회에서는 신성화(deification)라고 가리키고, 서방교회에서도 유사하게 신화(divin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신이라고 불렀고 오늘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의 결국이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한 구절을 토대로 이 신화의 교리를 수립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무엇일까요? 신화는 하나님 닮아감의 마지막 성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시고 창조세계의 계획이 완성되어 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게 될 때 인간이 도달하게 될 상태입니다. 즉 오늘날 개혁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영화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교부들은 신자가 세 가지 단계를 거쳐서 이 신화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정결케 되는 것(catharsis)입니다. 이 정화는 육체의 정화라기보다는 영혼과 마음의 정화입니다. 성령과 진리의 영향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깨끗이 씻겨 거룩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theoria)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구절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비한 체험 속에서 주님을 뵈옵는 다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의 머리인 지성이 온전히 순수해져서 모든 지상의 사물들로 인한 방해와 욕망으로 말미암는 억견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상태(theosis)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이 지상에서도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마지막에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교회에 관한 경륜을 성취하고 만물의 머리가 되셨을 때 그분께 연합된 인간이 도달하게 될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수립하였던 위대한 교부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적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God became man so that might become god)."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우리는 이에 대한 그릇된 이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B.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
인간과 신의 연합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행복한 상태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는 이미 그리스 철학자에 의해서도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행복이라는 말은 유다이모니아(eudaimonia)입니다. 유는 ‘좋은’이라는 의미이고, 다이모니아는 ‘신이 들려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그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잡신에 사로잡힐 때 인간이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높고 고상한 일자의 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본질이 연합된다고 하는 주장은 끈질기게 기독교의 진리 체계를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에는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단종파들이 수없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지주의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과 신의 영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인간의 영혼은 형체가 다를 뿐 신의 본질의 일부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껍질을 벗고 상승하게 될 때 인간의 영혼은 자기가 돌아온 본질적으로 같은 본향인 신에게 회귀하게 되는데 그때 인간의 영혼과 신의 영 사이에는 구별이 없는 혼연일체의 상태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커다란 바다와 다르지만 일단 하나가 되면 나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에 충만한 그 신에게로 회귀할 존재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또한 건전한 신화의 교리와는 별도로 중세 후기 신비주의로 이어지게 되고 여기서는 이것들이 아주 발달한 형태로 나타나서 결국 인간의 본질은 신이요, 인간의 육체의 껍질에 있는 동안에만 신과 구별되고 이것을 벗어난 후에는 인간의 영혼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후기 근대주의에 발견되는 인간의 신화의 교리나 혹은 뉴에이지 사상에서 말하는 인간과 신의 합치 같은 모든 사상들이 바로 이 신화의 교리가 이방의 철학의 미신들과 함께 엮어져 그릇된 형태로 발전되고,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 맞게끔 정착된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세운 이레네우스에게도 이레네우스에게 영향을 받은 아다나시우스라는 정통적인 교부에게도 이런 식의 신화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배교적이고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죄로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의 더렵혀진 영혼이 세례와 중생과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의 작용으로 깨끗하고 청결하게 되어 주님을 지성으로 보는 단계에 이를 것이며, 마지막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이 본질로서, 존재론적으로 신의 본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존재의 질적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이교적인 교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변모해도 하나님의 본질과 같아질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본질과 존재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과는 구별되는 전적인 타자라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교부들은 신화가 본질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온전한 회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신적 본질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닮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을 볼 때 마다, 그 인간의 존재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바라볼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신화의 교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 것입니다.
지금도 성화에서 이 지상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후 두 번째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완전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와 모든 정욕에 대해서 완전히 초극한 상태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 축복인 성령의 세례를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따르면 매우 고약한 교리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완전하게 되는 상태는 지상에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모든 육체가 부활하고 영혼이 완전하게 될 때에 덧입게 될 영광의 몸에서 하나님에 의해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서 말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질료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신의 성품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효과에 참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예수께서 접붙여져 있는 교회의 지체된 상태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니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던 때와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는 온전한 영적인 연합의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현저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사도 바울이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미래에 영화의 상태에 이루어질 신화에 비하면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는 이런 교리적인 사실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인간처럼 되셨으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극치는 신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C.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
아담과 하와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창조된 상태였습니다. 그의 지성은 총명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그리고 이 모든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만물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함으로 가득 했습니다. 또 의지는 올곧아서 하나님의 모든 뜻에 기쁘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속을 통해 인간을 마지막으로 신화되게 하실 때 우리가 도달할 상태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가 누리고 있었던 완전한 상태 이상인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지만 한 인격으로 사셨으니 인간이 하나님께 신화의 은혜를 입게 될 때 어떤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지를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기 때문에 구원하는 은혜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더 찬란한 영광으로 변모시킴으로서 당신의 “연합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어떤지를 구원의 경로를 통해 보이신 것입니다. 즉 창조하신 완전한 세상에 반역하고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보다 더 찬란하게 드러내심으로 구원의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창조한 이 세상에서 더 뚜렷이 보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상과 지상의 세계에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가 되실 때에 아주 특별하게 인간들의 머리가 되셔서 모든 자녀들을 영적으로 연합시키시고 성령 안에서 그들을 사랑으로 교통하게 하실 텐데 그때까지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두셔서 당신 자신이 선취적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 미래에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운 상태의 일부를 미리 앞당겨 신자가 경험하고,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상태를 미리 누리게끔 작정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특권이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회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태가 신화의 상태라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신화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방법을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I. 신화(神話)에 이르는 길
물론 이 신화는 점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한순간에 주님의 능력으로 그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영화의 상태에서 신화되게 하시는 일에서 우리가 주님께 보태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때에 이르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날 것을 소망하며 여전히 죄가 남아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존재로서 그 미래의 운명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지정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노력을 통하여 신화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영광스러운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그 소망을 바라보며 살 부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명에 참여하게 될 성도는 반드시 그렇게 살고자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A.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함
이 표현은 결국 이 세상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완전했고 이 세상은 썩고 망가지고 불완전하고 파괴되어 가는 결핍이 있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 만물들은 시간에 종속되어 원래의 완전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공간은 우리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것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썩어지는 것들의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향하여 우리가 사랑을 바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찢어져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랑의 성품은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질서대로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잠시 있다가 사라져 갈 것들을 영원히 있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게 되면 인간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내리고, 지성은 눈멀고 마음은 찢어지고 의지는 분열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우리들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할 대상들은 소멸되고 그렇게 소멸된 것들을 향한 사랑이 바로 인간의 악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이 인간들의 쓰레기 같은 삶과 거기서 비롯되는 피비린내 나는 경쟁, 물고 뜯는 아비규환의 비극은 바로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가는 인간이 빚어내는 끔찍한 광경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삶에서 돌이켜야 할 존재라는 것을 사도는 오늘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이란 의미는 결국 완전한 이 세계를 파괴한 장본인이 정욕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정욕은 자기를 중심으로 살게 하는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정욕 ‘에피듀미아‘란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집니다. 넓은 의미로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게 하는 욕망의 뿌리이며 좁은 의미로는 성적인 욕심입니다. 여기서는 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런 정욕적인 삶이 끊임없이 모든 세상의 것들을 썩게 만들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뿌리였으니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면 그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도전을 두 번 세 번 자신의 삶 속에서 되풀이 하게 만들고 이것은 집요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주인 삼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선택할 다른 삶은 없습니다. 쉽게 편안하게 세상에서도 설탕이 되고 하나님께도 빛이 되는 그런 제 3의 신앙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를 거짓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까? 왜 그분이 33년이나 결핍과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오셔서 종의 취급을 받으며 가난과 결핍 속에서 수치스러운 삶을 사셨습니까? 그리고 결국은 인간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를 그냥 버려두어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좇고 자기를 주인 삼는 정욕을 따르는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나를 주인 삼는 삶을 살게 만드는 이 근본적인 욕망의 뿌리는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뼛속 깊이 박힌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의 보좌로 향합니다. 아직 죄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견인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죄를 짓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시는데 지난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해 주시는 것과 다시 성령의 은혜로 힘을 주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가 주인 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 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타락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이 은혜의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신앙의 모든 타락과 물러감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때에 그런 영화의 상태에서 신화될 존재들이 여러분들이니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욕으로 가득한 마음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이 세상에서 단 한 달을 살아도 주님 앞에서 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그 영광스러운 다시 머리되심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7중의 덕목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B. 7중(七重)의 덕목으로 나아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이와 같이 함으로써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의 연합을 누리며 사는 존재들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C.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이 필요함
그러므로 우리가 신화의 길로 나아가기까지 이 땅에 아직 순례자로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교회의 한 지체로 남아있는 동안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목양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야 하고, 자기가 알게 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나누어주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IV. 결론: 신의 성품에 참여할 자로서 살아감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어두움이 물러나고 빛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게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화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이고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풍조가 수없이 바뀌어도 본질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썩어질 모든 것들을 좇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을 피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 날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의 순례자의 삶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들이 참 교회의 지체로 신화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바라보며 살아가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때보다는 핍박과 조롱을 받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것이 있으니 아들의 신부되신 교회를 향하여 마지막 때 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화될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종종 힘겹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며 주님과의 아름다운 연합의 관계 속에서 신화의 영광 중 일부를 미리 맛보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신의 성품을 참예할 자”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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