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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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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3-28 http://www.yullin.org |
죽음으로 용서하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I. 본문해설
사도는 1장부터 4장까지 기독교 신앙의 구원의 진리에 대해 묘사하였습니다. 특별히 3장부터 칭의의 교리를 설명한 후, 5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말합니다(롬 5:1). 그리고 이제 실제 삶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의를 어떻게 성취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낯섦과 거리감, 반감과 대적을 경험했었는데, 화해를 경험하고 주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에게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과 연단, 환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인데, 이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어진 소망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설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II.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어떤 설교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 하나를 말하기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보다 더 잘 당신의 사랑을 보이실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풀 한 포기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파생적인 것이고, 그 원천이 있습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보이는 원천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요 3:16).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어떻게 화해를 누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찬란한 복음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빛은 참으로 놀라워서 그 진리가 적용되는 수많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마다 복음의 아름다운 빛깔을 다르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로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십자가 때문에 겸손해집니다. 낙심하고 실패하여 주저앉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담대한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때에는 어떠했습니까? 그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지키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던 사람들이었고, 이방인들은 율법도 없고, 하나님 사랑도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방인이라고 하여 모두 짐승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정신의 힘으로 욕망을 따라 살기를 거절하고 참되고 영원한 것들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철학과 사상, 예술과 문학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고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참된 영원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작은 조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의 세계관 속에서 그것들을 해석하고 그것으로 다시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처럼 역투사하여 왜곡된 세계관을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엄격하게 자기를 절제하던 사람들도, 인류애를 부르짖던 평화주의자들도 하나님과 진정한 화목을 이룰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으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주셨고, 이방인들에게는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아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원래 백성들을 깨우쳐 참된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도록 하라는 소명을 받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돌판의 율법은 지켰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도록 그들을 택하신 언약은 교만의 토대가 되었고, 율법은 철저히 지키는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의 부요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모든 천사들의 경배와 찬양을 한 몸에 받으시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었습니다.
III. 사랑을 확증하신 방법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우리가 누구인지 배우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이고, 십자가를 통해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배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정수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계시던 때에 우리가 직접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보고, 그분을 만져보았다면 더 좋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은 종종 다르게 인식될 수도 있고, 쉽게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믿도록 하셨습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될 때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지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온 인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지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또한 그 교회에 지체인 내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부여 받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보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증거 받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라도 이 증언에 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쇠 같은 가슴도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사랑의 확증은 충만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날로 새로워집니다. 성령 충만하게 살수록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을까요?
A. 그리스도의 죽으심
성경은 먼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도구들이 사용되었지만 궁극적으로 예수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실 수 있었고, 또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는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했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렇게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인간의 최대 사명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 등 뒤에서 행복하려고 하는 모든 파괴적인 시도를 버리고, 순전하고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배워가는 것, 그분과의 완전한 평화 속에서 구김 없이 살아가는 참인간의 아름다운 모습, 그것이 바로 주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보고 싶으셨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월이 많이 지나면, 우리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기쁨과 슬픔, 아름다웠던 일들도 점차 잊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그 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인간 사회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랑은 이 영원에 속한 하나님의 사랑의 희미한 반영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찬란하게 뿜어낸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본보기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매우 헛되고 조잡스러운 이 세상 일에서만 하나님 사랑을 찾으려 하는 것이니, 이는 광맥을 버려두고 개천에서 금을 찾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B.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확증하셨는데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은 캄캄한 밤하늘에 불꽃처럼 빛나는 것입니다. 대낮처럼 빛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분께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던 그때조차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죄는 우리의 눈은 어둡게 하였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눈을 어둡게 하여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사람의 몸으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여인에게 태어나시어 거친 강보에 쌓여 놓이신 때는 아무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로 가득한 때였고, 지금의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한 덩어리의 인류로서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언약을 따라 구원을 얻은 우리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악을 이기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고난이 자기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보혈이 되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이 짓이겨지도록 처참하게 살을 찢기고 피 흘리시고 물을 쏟으신 것이 우리 때문이었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죄를 지은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나의 욕망에 종노릇하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통절히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었지만 십자가를 만난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복음에 감격하고 깊이 녹아내리는 마음 안에서 피 묻은 십자가 하나로 만족했던 때가 너무나 짧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께 나아오는 길도 십자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불순종해서 잠시 이 세상의 유혹으로 떨어져서 주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잃어버릴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우리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없습니다. 오직 이렇게 죄를 떠나서는 살 수 없고, 목마른 자들을 임마누엘의 샘으로 불러 그 피로 속죄함을 얻고 주님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 그래서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어두움, 마음의 굳어짐, 지성의 눈멂, 정서의 완고함이 느끼게 될 때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려진 휘장을 찢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좌에 이르도록 뿌리신 그 핏길을 걸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아버지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름난 죄인들이 모두 그 핏길을 걸어 하나님 앞으로 한걸음 씩 나아갔습니다. 주님은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아들의 피를 발라 용서하시고 다시 당신과의 화목 속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가 다시 세상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까? 그렇게 모질게 주님을 욕하던 세상의 입술에 입맞춤 할 수 있겠습니까?
C. 용서로 관계를 여심
마지막으로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증은 바로 용서로 우리와의 막힌 관계를 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용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한 가지 속성에서 빛이 뻗쳐 나가 자기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사랑의 존재가 입증됩니다. 주님이 이러한 용서를 우리에게 베푸신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으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물리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열렬함을 본받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IV. 결론
과거 조국교회를 세웠던 종말 사상이 다가올 하나님의 위대한 왕국의 승리를 예견하는 것이라면, 죽음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차례라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의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준 가족들, 교회 안에 지체들, 심지어 여러분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원수까지도 마음에서 녹여내어 용서해야 합니다. 그 용서를 뛰어넘어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예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지지 않았을 텐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슴 저미는 사랑 때문에 지지 않을 수 없는 그 짐이 있습니까? 또 그 짐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그것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시면 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마지막 까지 십자가를 지고 다 이루었다고 승리하셨습니다. 그처럼 여러분은 그 십자가를 사랑하시고 예수를 배우고 계십니까? 내가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분과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피 한 방울 까지 그분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용서받은 인간인 것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십자가의 샘에서 마음껏 갈한 목을 축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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