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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3:17-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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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3장 17절-14장 9절.
13장 17절-14장 9절: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찌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 새 특별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우리 기독자들이 말만 가지고는 투철한 신자가 못 돼요. 이게 말이 무슨 말인가 하니 요셉의 사상과 혼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구별하는데 있어서 ‘이것이 이것보다 낫고, 이것이 이것보다 이것이 더 낫고’ 하는 것을 구별해서 더 나은 것을 자꾸 자꾸 가져야 됩니다.
모세는 몸은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있으면서도 그 마음의 정신적 수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다 두었기 때문에 이 모세는 애굽 땅에서 누리지를 아니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조건이 완전히 구비돼 있었지요. 명예 영광자리가 완전히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누리지를 아니했어요.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을 만날 때마다 ‘형제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갑시다’ 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게 전도란 말이요. 그렇게 말을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 가겠다고 그런단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대한 애착심이 더 강해서 그렇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가견적인 것이 더 중요하냐, 불가견적인 것이 더 중요하냐? 임시성이 더 중요하냐, 영원성이 더 중요하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정을 붙이고 붙잡고 있는 애굽의 정을 떼려고 애굽을 통해서 환난 고통을 준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더 붙어 있으려고 그런단 말이요. 그러니 기도를 해도 애굽을 더 달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그 말이요. 참 희한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사건 환경을 들어서 애굽의 정을 자꾸 떼려고 그러는데 이스라엘은 입을 더 크게 벌려가지고 애굽을 더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바로를 들어서 탄압을 주는 것은 모세로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볼 때에 출애굽 하는 그 날 밤에 양을 잡아 피를 뿌리고 무교병을 먹지요. 이걸 통틀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이란 인간은 애굽을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아니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과 속량을 입어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원죄도 있고 자범죄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후에는 인간의 성품이 하나님의 단일의 본질과 본질성으로 돼져야 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속량이 필요한 거다 그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구속이 꼭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고만 보게 된다면 ‘그러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했겠는가’ 이렇게 들어가게 될 테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기 때문에 범죄 전 원인상태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했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 전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아담 하와가 타락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천국에 들여놓으면 그들이 천국을 누릴 수 있느냐 하면 누릴 수가 없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으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으로 돼지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지만, 설령 그런 상태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천국에 대해서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겁니다. 따라서 사죄와 칭의 만이 아니라 천국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했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만일 아담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지 않았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과 모든 계획과 구원설계가 다 없어지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일률적으로 동등적으로 만들지 아니했을까’ 하는 그 면에 대해서 여러분들 스스로 자문자답 하면서 해답을 한 번 풀어 봐요. 어디에서 그 정답을 얻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인가?
인간은 인격자요 인격의 세계에는 격차성이 있고 또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이 없다면 아마 도덕성자로 짓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요.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가 미모에 있어서 격차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거든요. 20대 아가씨들을 선발해가지고 미인대회 하는데, 미인의 기준이 누구요? 어디다 맞춘 거요? 누구 눈에 미인이란 말이요?
어쨌든 세상은 타락된 눈을 가졌지만 육모에 격차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심모에 격차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우리 기독자는 영적인 미모성이나 깨달음이라든지 영적인 면에 대한 마음에 격차성이 있다 그 말이지요. 인격의 세계에는 이렇게 격차성이 있는 세계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기존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은 인격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항의할 조건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차가 있는 세계를 육모에서 영모적으로 우리에게 계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육모는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육모로 나타내 보여준 이건 임시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이건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일반 계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영모는 네가 만들어라 그 말이지.
그러면 영모의 미인이 되려면 그 기준이 어디냐? 주님을 기준해서 주님을 닮아나가면 영모의 미인이 되는 겁니다. 주님과 마찰되는 그 부분은 모두 다 고쳐나가면 돼요. 성경을 보고 자기의 영모를 단장하는 겁니다. 세상에 육모가 다양적인 용모가 있듯이 천국도 영모의 미모성이 다양하게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영원히 가질 영모로 만들면 돼요.
육체적인 모양은 나이 들고 시간 지나고 하면 물 다 빠지고 쭈글쭈글 해지지요? ‘예쁘다. 곱다’ 하는 것도 젊었을 때 얘기지 나이 5, 60, 70 들어가면 밀대처럼 빼빼 마르는 사람이 있고, 또 뚱뚱해지는 사람이 있을 거고, 별의 별 사람이 다 있게 된다 그 말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육모 그대로를 가지고 영모로 변화돼서 천국에서도 가게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불공평이 되는 거다 그 말이요. 그런데 사람의 얼굴의 모양을 이렇게 달리 만든 뜻은 영모에 격차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다 그 말이요. 그렇게 깨달아야 된다 그 말이요.
육모의 모양들은 모두 임시적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신앙적인 면으로 볼 때에 육적으로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면 그거는 큰 손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영적인 미인이 되기를 애를 쓰십니다. 그러니까 나도 성경을 보고 깨달으면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영모의 미모성을 위해 애를 써나가면 힘을 써나가면 나도 영적인 면에 미인이 된다 그 말이지요.
천국에는 이 세상에서처럼 지능에 격차가 있고, 기능에 격차가 있고, 의욕에 격차가 있습니다. 자기가 좋은 것을 모르고 가치성을 모르면 의욕에 격차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의욕이 나올 수가 없어. 그 의욕이 있으니까 격차가 생긴다 그 말이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연적이었고, 또 인간의 특수성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감염성이 있다는 거. 1차 구속인 속죄는 동일 동등이고, 2차는 1차의 속죄를 입은 그 자가 점차적으로 신의 성품을 입어나가는 겁니다. 1차적 구속을 입지 못하면 2차의 사역이 안 나와요. 고린도서에 보면 ‘양자 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림이라’ 했지요.
그런데 나의 언행심사가 주님과 진리와 대립된 입장이라면 자기에게 신의 성품은 하나도 입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가룟유다는 제사장들의 일에 아주 협조적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구원사역에도 결과적으로 보면 협조적이었지요. 그렇지요? 즉 대립적 협조였지요.
우리 기독교에서 일 사역만을 놓고 따진다면 가룟유다에게 상을 줘야 하는 겁니다. 왜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음으로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까요. 그러나 기독교는 일 사역 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가룟유다가 심판이 되는 거요.
우리의 모든 활동의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목적은 구원이고, 이 구원을 놓고 매사를 심사하고 나가야 될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활동을 사역목적에 두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구원을 얻었으니 점차적인 성화구원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신의 성품을 입히는 데는 사건이 필요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기독자가 세상으로 붙어버리는 원인은 환난관을 모르니까 그렇게 되는 건데, 다시 말씀드리면 성화구원을 모르니까 세상에 붙는 거다 그 말이요.
그리고 기독자들이 사역에 치우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이건 자칫 잘못하면 구원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사역은 하되 하나의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가 친구들하고 모래밭에서 재미있게 놀지요?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하다가도 어머니가 시장에서 맛있는 거 사들고 와서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 그거 다 내버리고 엄마를 따라가지요? 그런 것처럼 사역보다 일보다도 더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렇지요? 이게 매력이 있다 그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만 하면 일에 대한 성공률을 목적으로 나가는 건 없게 돼요.
사실 예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잖아요.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보다 더 좋은 건 없어. 아닌 말로 자기가 예배당을 짓고 있는데 예수님이 저기서 온다고 그럴 때에 일하던 거 다 내버리고 그 예수님 맞으러 안 나가겠어요? 예수를 만나면 예수가 좋으니 물질사용에 인색이 있을 수 없고. 물질보다 더 좋은 예수가 발견이 됐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지요.
우리 인간사회도 그래요. 사람이 좋다보니 물질이 쓰여지지요? 그렇지요? 자기 집안 식구를 예를 든다면 식구를 사랑하니까 물질이 쓰여지지요. 가족이라고 해도 물질을 쓸 때 꼬치꼬치 따져 들어가면서 그거는 인간의 정이 안 들어가고 사랑이 안 가는 거지. 그건 별 수가 없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선택에서 결과적 구원까지의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만든다면 하나님의 지공성이 파괴가 된다. 그리고 파괴되기 그 이전에 하나님의 지공성이 그것을 허락치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에게 기본으로 놓여져 있는 것이 있는데, 계획이 있고 예정이 있고 설계가 있고 계약이 있고 창조가 있고 구속이 있고 중생이 있고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노력 것 실력 것 자기를 만들어 가야 된다는 것.
우리 인간은 눈만 뜨면 일이 있는데, 무슨 일이던 눈만 뜨면 일이란 말이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을 이루는 그것보다도 일을 더 잘하고 갈 수도 있지요. 일을 성공하고 갈 수도 있지요.
그런 사람을 일을 시키면 그 일을 잘 추진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구원(성화)이 없이 그 일을 잘한다면 그건 큰일이지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피아노를 사기 위해서 회의를 하고 추진을 하고 해도 그건 피아노를 사는데 있어서 일을 잘 추진해서 그 일을 성공시킨 것이지 그 자체는 구원이 아니다 그 말이요.
또 하나 예를 들면 폭풍에 예배당이 무너졌다 이랬을 때에 그 때는 기도 하나 마나 그 일을 해야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아요? 기독교는 구원을 위해서 일이 있는 것이지 일을 위해서 기독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일을 두고 설교를 하면 안 되지요.
또 일을 두고 설교를 안 하면 교인들이 일을 하지 않아서 일이 안 되고, 일을 두고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일을 해서 일이 잘 되고 이렇게 되면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건 구원이 아니란 말이요. 꼭 해야 할 일은 말을 하건 안 하건 자기가 알아서 자원적으로 해야 되는 거지.
우리가 첫째는 바른 신앙사상과 바른 믿음을 가지고, 두 번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천국은 어떤 곳이냐?’ 하는 것을 꼭 알아야 되고, 세 번째는 이스라엘 70명이 430년 동안에 애굽적으로가 아닌 이스라엘 그대로 60만 대군으로 커졌듯이 내가 그리스도로 커지는 거.
우리 속에 히브리 사상이 흐르고 있는데, 이 히브리 사상이 나로 통해서 전체 교회에 흐를 수도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 중에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지요. 그런데 오직 요게벳 속에만 히브리 사상이 흐르고 있었다 그 말이요. 딴 여자들도 다 예배의 형식을 취했지요. 하지만 생명적 계대는 없다 그 말이요. 생명적 계대가 있는 이것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야.
많은 이스라엘 여자들이 있지만 이들은 사치관 취미관 안고관 모두가 애굽성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한다면 이건 이스라엘이라고 하지만 애굽사람과 똑같은 거지 구별된 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요게벳 속에는 요셉의 사상과 혼이 들어 있었습니다.
애굽의 궁전 안에서는 애굽의 진한 것이 다 들어있지요. 그래서 모세를 왕자로 턱 만들어 놓고서 그 다음에는 애굽의 실력가들이 모두 모세에게 달라붙어가지고 모세를 어떻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요? 모세를 애굽화 시키려고 하는 거지. 모세 속에 들어있는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받은 그 사상을 애굽의 실력가들이 붙어가지고 변질을 시키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나 모세는 변질을 당하지를 아니했어요. 그게 보여져야 되는 겁니다. 그게 보여져야 돼. ‘믿음으로 걸어갔다. 자기 백성 쪽으로 선택을 했다’ 그런 정도만 보면 안 되겠지요?
애굽의 대접을 받으며 살려면 노예로 있는 히브리인으로 살지 않고 애굽족화 되면 되는 거지요. 그러면 대접을 받지. 그러나 히브리인은 어디까지나 히브리인인 고로 사실은 그렇게 해도 대우를 받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모세는 일이 되고 안 되고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렸어요. 일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건 신경 쓸 게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는 거. 하나님 방법을 기다린다는 건 자기 만들어지는 면에 실력을 쌓아나가고 자기를 고쳐나가고, 자기주의 자율주의 이건 전부 다 버려야 되는 거요.
일에 있어서 내 방법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면 일은 잘 될 런지 모르지만 무엇이 중단이 돼요? 구원이 중단이 돼버리고 만다 그 말이요.
일을 목적으로 하고서 하나님 앞에 ‘믿사오니’ 하며 해도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가견적인 일을 놓고 ‘이루어 달라’ 그러지 말란 말이요. 그건 구원이 아니란 말이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란 말이요. 그건 제 방법이지. 그런데 보는 눈이 잘못된 사람들은 그걸 신앙인 것처럼 본단 말이요. 하나님 방법대로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몇 가지를 했지요? 몇 가지를 하니까 일이 바로 되지요? 이적을 막 일으켰는데도 일이 안 됐지. 즉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데도 일이 안 돼. 그러나 일은 안 돼도 모세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했으니까 모세에게 뭐가 입혀지지요? 구원이 입혀져.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일을 놓고 말하면 안 돼요. 그건 하나님을 무능력자로 만들어 놓는 거지. 오늘날 기독교가 그 모양이 아니요? 그러니까 이건 기독교를 일반화로 봐버리는 겁니다.
일에 있어서 성패와 승패 이거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죽고 사는 문제 이거는 하나님의 예정에 맡기고 옳은 지도와 진리가 문제입니다.
바로 왕이 결국은 하나님의 재앙에 견디다 못해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가라고 그랬지요. 나가라고 그러니까 이제는 모세가 ‘그냥은 못 나간다’ 하고 배짱을 내밉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보물을 다 주면서 나가라고 밀어낸다 그 말이지요. 참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신비롭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라암셋에서 출발해서 블레셋 길로 질러서 가면 놀면서 가더라도 한 달이면 충분히 가나안에 가지요? 그런데 지름길로 가지 말고 비하히롯으로 빙 돌아가라고 그랬단 말이요.
그리로 가면 길이 없고 바다만 있다는 걸 모세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제국 대학에서 지리학 공부를 안 했습니까? 했단 말이요. 앞으로 왕이 되려면 지리에 능통해야 되거든요. 싸움 싸우러 나가고 하면 이겨야 되니까 그러려면 지리에 능통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지.
모세는 그리로 가면 길이 없는 걸 잘 안단 말이요. 그리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갈 때에 이미 경험을 했기 때문에 ‘비하히롯으로 가면 절벽이 있다. 낭떠러지다. 그 밑에는 홍해바다가 놓였다. 거기엔 길이 없다’ 하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바벨론으로 이렇게 갔다 왔다 하며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블레셋 을 통해서 가면 길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러니까 비하히롯으로 가면 길이 없는 걸 모세가 빤히 안단 말이요.
비하히롯으로 둘러서 가면 길이 없어 죽는다는 것은 건 다 알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군대들이 자신들을 추격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킴대로, 또는 모세의 비하히롯으로 돌아서 가자고 하는 그 말에 고분고분 따라오겠느냐? 그렇지 않아요? 우리도 그 때 태어났다면 아마 모세의 그 말을 안 받아들였을 거야. 나부터 모세에게 반기를 들고 나왔을 것 같아. ‘그리로 가면 길이 없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애굽을 탈출하고 보니 앞이 막막해. 막다른 골목이 돼버렸어. 그렇지요? 우리가 그 때 상황으로 돌아가서 ‘투표해서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을 할까요? ‘홍해바다가 없는 쉬운 지름길인 블레셋 길로 가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대로 홍해바다를 빙 돌아서 가겠느냐’ 할 때에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선택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손을 많이 들고 투표가 많이 될까요?
그 때에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모세가 길을 전혀 모른다면 그것도 별 문제가 되겠는데 모세는 길이 없는 걸 빤히 알고 있고, 또 백성들도 ‘그리로 가면 길이 없다. 투표로 결정합시다’ 라고 한다면 많은 백성들이 지름길로 가는 것에 찬성이 될 텐데, 이 때 모세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 말이요.
우리들을 모세 같은 그 자리에 앉혀놓으면 굉장히 갈팡질팡 하거나, 아니면 다수결을 따라서 행동을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앞서서 백성들을 인도해서 나갔는데 만일 이제 투료를 해서 다수결을 따라 가게 된다고 하면 그 때는 모세는 뒤쳐져서 백성들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자율을 미디안 광야에서 다 회개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처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예수 믿으면서 혹 그런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일은 없습니까? 자기 혼자라면 하나님의 인도라 그렇게 믿을 수가 있겠는데, 홍해가 나오면 헤엄을 쳐서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간다고 하는 그런 결심이 있을 수 있겠는데 60만 장정에다 어린아이 여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근 200만이 되는 큰 대군을 이끌고 가는 마당에서 그들의 소리를 안 들어줄 수가 없지 않겠느냐? 그들의 소리를 들어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안 그래요? 오늘날 교회는 안 그렇습니까? 교인들이 자기 소리 안 들어준다고 교회도 안 나오고 그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길이 없더라도 모세의 인도대로 가면 분명히 하나님의 어떤 인도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요.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지요. 그런 사람은 블레셋 길로 안 가겠다는 투표를 할 테지. 믿어지니까.
우리가 그 때 사건으로 돌아가서 그 사건을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그와 같은 장면이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처음 믿고 그날부터 불이 붙었는데, 예수 믿다가 목사 되고 말고 이건 계획에도 없고 생각도 없는 거고, 어쨌든 나는 ‘예수 믿다가 거지가 돼서 길바닥에 나 앉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 믿고 간다’ 이 결심으로 이때까지 나오는 거거든.
오늘날까지 60몇 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나오게 된 건데, 나는 목회는 꿈도 안 꿨고, 목사라는 그거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옳은 스승을 만나놓고 보니까 나는 내 손으로 돈 벌어가면서 전도해가면서 가르치기도 해가면서 예수 믿고 그랬거든.
옳은 스승을 만나서도 ‘나는 목사 된다’ 하는 그거는 없었어. 신학교 가서도 그거는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알아야 된다. 성경은 알고 내가 이걸 증거를 해야 되겠다’ 그 결심이 대단했지요.
그래, 우리 유전도사님, 대야미교회가 현재적으로 부흥이 돼 있다면 뭔가가 좋은 어떤 희망성이라도 가질 수가 있겠는데 대야미교회가 우선 이렇거든. 우선 나부터 이렇거든. ‘이렇게 가다가 이제 목사는 다 해 먹었다. 큰일 났구나’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우리 김전도사님은 어떤 생각이 들어요? ‘이거 내가 대야미교회로 잘못 왔다. 충성교회로 돌아가나?’ 그런 마음 없어요? 그래서 충성교회 김목사님한테 미안하다고 그러고 온 사람도 있고. 앞으로 걱정 안 돼요?
여러분들, 앞으로 사역적으로 얼마나 크게 하다가 갈 런지는 모르겠고, 또 주님이 그 동안에 올는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나 현재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 깨달음에 대한 실력은 잘 사나 못 나나, 일이 있으나 없으나 이거는 우리가 할 수가 있다. 이걸 하고 가자. 부지런히 하고 가자.
그런데 뭐라고 그럴까요? 좋은 면으로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말씀에 대한 마음이 불이 타가지고 실력이 그만큼 닦여서 다른 사람에게 이 성경의 진리를 힘 있게 가르쳐 나간다면 좋은 거지요. 제가 아무리 봐도 앞으로 성경실력밖에 없어요. 실력이 그 사람을 높여주고 그 사람을 알아주고.
제가 알기로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목사간판이 있다고 해도 안 알아줘요. 내가 볼 때는 그거 값없어요. 목사간판 달았어도 그건 값없어요. 시대적으로 보니 성경실력 이거밖에 없어요.
엊그제 저녁에도 영동에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 이OO집사님이 ‘참과 거짓’이라는 전도지를 보냈나 봐요. 그분이 그걸 읽고 은혜가 된다고 그러면서 전화가 왔어요. 그러니까 딴 교역자들이 하는 거와는 다르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그 분에게 ‘성경 많이 보고 이치를 찾아라’ 그런 얘기를 했지요. 한 번 온다고 그랬지만 와봐야 오는 거고.
어쨌든 오늘날 기독교가 거의가 일반화로 돌아가 버렸어요. 기독교 사상을 그렇게 갖고 있어요. 일반사상을 가진 채 성경을 보니 계시사상은 안 나오고 자동적으로 종교적 사역이 나올 수밖에 없지. 그러니 기독교가 오늘날 이 짝이 나지 않아요? 바로 서기 힘들어요. 완전히 기독교가 똥 된 겁니다. 발에 밟혀지고 똥 된 거요.
주님 오실 날이 언제일 런지 모르겠지만 나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진리의 사역을 할 기회를 주실 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우리는 성경실력을 닦는 수밖에 없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의 노선으로 단일성으로 나갈 수 있는 큰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기독교 세계가 물질적 타락이 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오늘날 기독교 운동이 일반적 개념 하에서 일반적 도덕성 운동을 하는 것을 저희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성경을 통해서 깨닫기로는 기독교는 일은 사역을 위한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그 일 때문에, 이 구원이라고 하는 이 일 때문에 기독교가 있는 것인 줄 분명히 압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제 저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서 저희들이 먼저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본질적 본성적인 면에 단일성으로 잘 맞추어지고 만들어지고, 또한 하나님의 의사성이 내 속에서 곧 나의 의사성으로 되어져서 모든 생활면에나 물질이나 존재나 어떤 사건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의사성대로 그 믿음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요 또 원하심이 계실진대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만들어지면서 또 이 좋은 것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 역사를 우리 주님께서 하시옵고 저희들은 오직 말씀 깨달음에 순종으로만 나가는 복된 귀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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