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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5:4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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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3.4.21주일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10) 존경받는 사람 아리마대 요셉
막15:42-47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목사님이 계셨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다니셨답니다. 부모님이 같은 교회에 다니면 목사님들은 설교하는데 상당히 부담이 되지요. 부친이 예배 시간만 되면 맨 앞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만 되면 꾸벅꾸벅 졸았답니다. 목사님은 교인들 보기에 민망하여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어느 날 묘안을 낸 목사님은 어린 아들에게 부탁을 하였답니다. "할아버지 옆에 있다가 할아버지가 조시면 쿡쿡 찔러서 깨워드려라. 그러면 내가 1불씩을 주마." 목사님의 아들은 1불을 받는 다는 조건으로 아버지와 약속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부터 1불씩 받는 기쁨에 할아버지 옆에 앉아 졸 때마다 열심히 깨워드렸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자 아버지가 또 꾸벅꾸벅 졸고 아들이 그 옆에 앉아 있는데도 깨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은 어린 아들에게 가서 물었답니다. "1불씩 준다는데도 왜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니?" 그러자 어린 아들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안 깨우면 2불 준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사람과 만나서 살 때 무엇인가 늘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예로 든 아이처럼 “아버지와 한 번 약속을 하였는데 아버지와의 약속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할아버지가 2불을 준다고 했는데 아버지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할아버지의 말을 따를 것인가?”라는 선택의 순간 앞에서 매사 어떤 것을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만남의 수준이 달라지고 인간관계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가지려면 만남에서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하려면 동조가 아니라 옳음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정치 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역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처형을 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유대 백성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평가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다 그것에 동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빨간 물속에 살면 빨간 물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파란 물속에 살면 파란 물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 명이 지지하는 의견을 반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압력을 받아 대부분 다수에 동조합니다. 심리학자 애쉬(Asch)는 이것에 대하여 실험했습니다. 실험실에 여섯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딱 하나 남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실험자는 기준으로 선을 보여 주고 다른 선이 이 기준선보다 큰가, 작은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피험자들은 순서대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피험자들이 맞는 답을 동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실험에서 처음 대답하는 사람이 틀린 답을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 선이 분명 기준보다 큰데 작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똑같이 틀린 대답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대답을 했겠습니까? 다섯 명은 이미 실험하기 전에 공모하고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 번 반복실험을 한 결과 40%가 분명 잘못되었는데도 앞 사람의 의견을 따랐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나 같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줏대 없이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틀린 대답에 한 번도 편승하지 않은 피험자들은 전체 피험자들 중 25%뿐이었고, 나머지 75%는 두 번 중 한 번, 또는 항상 틀린 대답에 따랐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동조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 또는 기대에 일치하도록 자신의 행동을 바꾸거나 또는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왕따 당하는 것보다 대세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을 달랐습니다. 4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도망가는데, 심지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부인하고 저주하며 외면했는데 그는 최고의 권력자 빌라도에게 당돌히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당돌히”라는 말은 “담대히, 용감하게”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담대하게 먹었다”는 말입니다. 잘 못된 세상에서 옳음을 들어내려면 용기가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특별한 사연이 많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혈육관계도 아니고, 같은 고향도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아 살아 계실 동안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그의 담대한 행동을 통해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대단한 위험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분을 보십시오. 그는 부자입니다(마27:57). 존귀한 공회원입니다(막15:43). 70명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 동조했다가는 출교가 될 수 있고, 그의 재산을 다 빼앗길 수도 있으며, 그의 공회원 자격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43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임과 동시에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 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 질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진정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십자가 사건을 통해 감동과 변화와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고통 가운데 함께 매달린 강도 중의 한 사람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듣고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켜보는 백부장조차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는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는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기준이 분명해 진 것입니다. 기준이 달라지니까 수준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의 부도 자신의 권력도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태양 앞에서 촛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를 보면 기준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도취되어 세상 기준으로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면 삶의 기준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주님 언젠가는 오십니다. 우리 영원히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다 놓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이 엄숙한 진리 앞에 우리의 기준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믿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7)"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옳음을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럴 대 좀 더 수준 높은 만남,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다 주님께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의 카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교수는 개인의 의견이 집단의 지배적인 의견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동조에 의해 옳은 의견이 차단되면 집단은 개인들로부터 더 이상 지식과 지혜를 배울 수 없게 됩니다. 소수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군중들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라고 외쳤습니다. 신앙인은 비록 홀로 일지라도 진리 앞에 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 대부분의 백성들이 바알신을 숭배했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을 섬기며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음 앞에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24:15)"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는 수에 의해, 지지도에 의해 변경되지 않습니다. 남편일지라도 아내일지라도 옳지 않으면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간 지나면 지날수록 수준 높은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하려면 숨김이 아니라 드러냄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신문을 보면 수준 낮은 만남, 수준 낮은 인간관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불륜 기사가 거의 빠지지 않고 실려 있습니다. 불륜의 특징 하나만 말하라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숨기는 관계입니다. 떳떳하게 드러내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준 낮은 만남, 수준 낮은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숨기는 것입니다. 수준 낮은 종교 생활을 하는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극정을 부리는 신 천지 이단을 보십시오. 교회에 숨기고 위장교인으로 등록을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모략이라고 말합니다. 사기, 거짓말을 그럴듯한 성경적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속여서 성경 공부를 시켜 결국 교주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가정을 파탄 나게 하고, 거짓을 종교적 소명으로 정당화시켜 인성을 말살 시켜 버립니다. 좋지 않는 만남, 좋지 않는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특징이 속이는 것입니다. 숨기는 것입니다. 드러내 놓지 않고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드러내 놓지 않는 것은 높은 수준의 만남이 아닌 것입니다. 드러내 놓고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 책임과 의무가 포함된 높은 수준의 만남, 높은 수준의 인간관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축구 선수 박주영 씨를 보십시오. 그는 골을 집어넣고 기도하는 골 세러머니를 합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면 자신에게 불리하고 불편함이 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내 놓지 않아도 축구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줄 때 “지저스 이즈 크라이스트(Jesus is Christ)”라는 문구를 덧붙인다고 합니다. 한번은 기자가 “골 세러머니를 다른 것으로 바꿀 의향은 없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바꿀 의향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내게 큰 재능을 준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기도하는 골 세러머니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축구를 하는 주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때문에 한 사람이 기독교에 귀의한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이 없습니다. 은퇴한 뒤에도 선교활동을 하며 축구도 가르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공개적인 신앙태도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입니까?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 전에는 전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을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도 숨기고 살았습니까? “유대인이 두려워”라고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혔을 때 받을 불이익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하고 이제 과감하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은밀히 만나다가 공식적으로 결혼을 하면 이제 숨어서 교제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수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수준 높은 관계를 가지려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숨기지 말고 어디에서든 어떤 때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빌라도 앞에서도, 직장 사장 앞에서도, 불이익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극단적으로 총칼 앞에서도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10:32-33) 다니엘을 보십시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공개적으로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권은 바뀌고 시대는 바뀌어도 인정을 받습니다. 남자는 군대에 가면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낼 것인가 숨길 것인가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내부반에 들어갔는데 신병 환영 회식이 열렸습니다. 의례 술이 나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으니 술을 먹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거절하였습니다. 대위가 술을 권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거절을 하였습니다. 노래를 시켰습니다. 복음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날 저녁 고참들로부터 엄청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쫄다구가 겁대가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계속 제가 신앙인인 것을 공개하며 군생활을 하였는데 나중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습니다. 숨기면 동조하면 호탕하고 멋진 신앙이라고 앞에서는 말하지만 뒤에서는 나일론 신자라고 욕합니다. 요셉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요19: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신앙인임을 숨기고 살았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게 됩니다. 만남에서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수준 높은 관계를 가지려면 자신을 너무 은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교회에 모여 마음 모임을 갖고 소그룹 모임, 구역 모임을 갖습니다. 내 삶을 드러내야 좋은 관계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능지수나 학교시절의 성적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예언하는 정도는 20%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Gibbs).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생활하면서 매순간 희로애락을 경험하는데 대인관계 지능이 인생의 행복과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숨기고 위장해서는 절대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드러냄의 수준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인간관계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여 15년 동안 목회를 하였답니다. 교인이 한 백여 명이 되어 아주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교인들이 야유회를 갔답니다. 목사님 아들이 17살이었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니까 라이터를 주어 주머니에 넣고 갔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불고기를 하는데 담당 집사님께서 깜박 잊고 성냥을 가지고 오지 않았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보니까 아무도 성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하여도 담배 피운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내어놓지 않았겠지요. 당황해 있는데 목사님 아들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주었답니다. 아주 맛있게 불고기를 해서 먹고 은혜롭게 야유회를 마치고 왔는데 저녁에 잘 때 라이터를 받은 남편이 아내에게 "목사님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왜 그러냐"고 하니 남편이 "라이터가 있는 것 보니 뻔하지 않아 담배 피우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이 집사님은 다음 날 친한 집사님에게 전화해서 "우리 목사님 아들이 담배를 못 끊어서 피고 있는데 집사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기도 부탁을 했답니다.
소문은 이렇게 퍼져가기 시작을 했는데 한 달 후에는 목사님 아들이 마리화나를 피운다는 것으로 변질이 되었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 목사님 아들 머리 염색하고 청바지 찢어 입고 다니는 것을 보니 역시 뭔가 이상했다"고 말했답니다. 교인들에게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는데 목사님 가족만 이 사실을 몰랐답니다. 목사님이 여름휴가를 갔다 왔는데 당회가 열렸답니다. 당회원들이 모여 목사님 아들을 불러 놓고 심문을 했답니다. 목사님 아들은 사정 이야기를 다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답니다. 장로님들은 이미 기정사실화해 버린 것입니다. 당회를 마치고 목사님의 아들은 홧김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갔답니다. 그 날 차 사고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났고 너무나 상처받은 그 목사님은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으며, 이 사실이 논란이 되면서 교인들은 흩어져 버렸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관계는 자꾸 숨기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하려면 자기 이익 아니라 자기 헌신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수준 낮은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준이 높아지면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하게 됩니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면 수준이 높아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상대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에게 유익을 주려고 행동을 합니다. 좋은 만남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빌라도를 찾아가 시체를 달라고 해서 무엇을 합니까? 46절을 보십시오.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둡니다.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입니까?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보면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무덤입니다. 아직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무덤입니다. 당시 평민들은 누군가가 사용한 무덤을 다시 잘 정리해서 사용함이 보편적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구약에서 강조하는 제물 드림의 정신은 언제나 첫 번째 것, 새 것 그리고 흠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드림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저 이름 없는 무덤이었을 이곳이 인류 구속의 찬란한 부활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자신이 사용했다면 그저 이름 없은 무덤에 불과한 것이 구속사에 빛나는 부활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한 현장이 된 것입니다. 아리 마대 요셉에 의하여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죽음)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이 사건이 있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의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수준 낮은 만남은 기생적 만남입니다. 조금 발전된 만남은 공생적 만남입니다. 수준 높은 만남은 서로 희생적 만남입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저도 저를 위해 희생해 주신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은퇴할 때쯤에서 제가 목회하면서 만난 좋은 사람들 101명만 선정해서 글을 써 책을 남겼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는데 참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례비를 전혀 받지 못하고 살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쌀을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집사님께서 쌀 한 가마니를 보내왔습니다. 지금도 그 집사님이 저희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그 때 일을 잊지 않고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이웃 사랑 바자회를 했는데 여러 성도님들이 열심히 헌신해 주었습니다. 다 끝마치고 마지막까지 박집사님 남아 저와 함께 정리하였는데 아침 6시에 교회에 저와 함께 김장 김치를 씻었습니다. 오늘 그 김장 김치 값싸게 사셔서 잡수시는 분 저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집사님께서 직장 정년퇴직하시고 감사하여 기념으로 바자회 때 쓰라고 천막 여섯 동을 사 놓으셨는데 마지막 끝나고 저에게 설렁탕을 먹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별로 밥 생각이 없었지만 집사님의 성의에 거절할 수 없어 설렁탕을 먹고 오면서 예날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했던 김정문 알로에 회장 김정문 집사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의 열린교회가 있기까지는 김집사님의 헌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봄 가을에 대형 차 2대를 빌려 교인들 관광을 시켜 주었습니다. 모든 경비를 다 혼자 부담하면서 열심히 섬겼던 모습이 선합니다. 천국 가셨지만 지금도 제가 가끔 무덤에 가서 기도하곤 합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 살 때 서로에게 유익을 줄려는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을 높이면 높일수록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기준을 정하셨습니다.
러시아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이름의 유대인 출신 의사가 있었답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스탈린도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의사였지만 난치 환자를 치료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답니다. 생명이 고귀하여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병을 핑계로 일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도록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답니다. 그러니 의사로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치료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성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느끼고 절망하던 어느 날 동료 죄수에게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답니다. 수용소 내에 신앙 공동체가 있음을 알았고 그들의 기도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주님과 이웃에게 빚진 인생임을 알고 환자를 대하는 기준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생명을 고귀하게 알고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치료했답니다. 한번은 그가 장암에 걸린 환자를 진료하게 됩니다. 수용소 병원의 기준에 의하면 그를 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자를 살려 발각되면 그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기준은 달라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치료하여 그를 살려 낸 것입니다.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하느냐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질문했답니다. 그 때 보리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 "도대체 그가 누구냐?"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답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공개 처형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그가 처형되던 순간 보리스에게 생명을 받고 복음을 받은 환자는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그 환자가 바로 노벨상을 수상 받은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라고 합니다.
우리는 한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삽니다. 좀 더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기준이 수준을 만듭니다. 1부터 10까지라고 하면 어느 기준입니까?
동조와 옳음의 기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숨김과 드러냄의 기준이 몇 점대에 놓여 있습니까?
자기 이익과 자기 헌신 중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울려 있습니까?
좀 더 기준을 옳음과 드러냄과 헌신으로 옮기면 수준 높은 인간관계의 축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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