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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http://blog.daum.net/kjeddh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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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훈련 개괄
1. 기독교 영성에 관한 관심
왜 기독교에 영성의 바람이 부는 것일까? 긍정과 부정의 면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현재의 교회의 삶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어떤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자신을 보던지, 불신자가 교회를 보던지 간에 교회의 진정한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 스스로도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와도 친하지 않는 갈등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삶이 닮은꼴이라는데도 충격을 느낀다. 사역자 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보다는 그 짐들로 힘겨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본질적 갈망 때문이다. 성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기독교의 풍성한 생명력을 말하기는 역부족이다. 이제 새롭고 더 절실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모로 실감하는 중이다.
2. 영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靈이 있으며 영적인 존재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에는 본질상 영성이 내포된다(요 3장). 사람의 내면에는 마음, 영혼, 사고, 감정, 의지가 있다. 이것은 인격의 참된 특성을 이룬다. 인격의 보이지 않는 차원 그리고 그 의식 가운데 인간의 심령(spirit)이 있다. 그 인간의 숨은 내면 내지 영적인 면(생각과 감정, 마음과 뜻, 의향과 선택을 포함)을 영혼이라 한다. 인간의 심령은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창조적인 요소,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심령을 의지, 선택과 결단의 역량,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이라고 일컫는다. 우리 생명의 근본적인 수원 또는 근원인 것이다.
영이란 몸이 아닌 인격적인 실체이며(인격체) 힘이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다(요 4:24). 하나님이 인격적인 힘의 전형인 것이다. 이 힘은 사고와 선택과 평가를 통해 작용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그 삶이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에 유효하게 통합되고 지배받는 정도만큼 영적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영을 영원히 조건 짓는 것이 몸의 이력이다. 또한 실제 삶이 하나님과 상호작용하는 만큼 영적인 사람이다. 영성이란 그런 특유의 삶의 질이다. 영성개발의 과정에 진도가 더 나가 있을수록 그 사람의 영성은 그 만큼 크고 삶 전체에 배어있다. 그 목표는 내면이 그리스도께 일치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3. 성경적 영성이란 무엇인가?
성경적 영성이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과 직결된다. 순종하려는 의지는 그리스도 안의 영성이라는 가치를 끄는 기관차이다. 특히 기독교의 영성을 말할 때는 ‘순종’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과 직결하는 것이며(마 28:18-20), 거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기독교 고유의 영성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영성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의 문제는 영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이 초자연적이고 위에서 난 생명의 능력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므로 기독교의 영성은 초자연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해서 움직이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이기 때문에,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실체를 받아서 그것으로 살아가는 문제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견고하고 건강한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은 어떻게 자아의 이 모든 숨은 차원들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느냐에 달려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 말이다(마7:17). 가장 위대한 계명도 무엇을 행해야 하기보다 무엇을 가꾸어 영혼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눅 10:27). 하나님 차원의 사랑인 아가페에 흠뻑 젖은 인격만이 높은 소명과 희생적인 봉사까지 가능하다(고전 13장). 속사람(고후 4:6), 혹은 숨은 사람(벧전 3:4)이 활발해야, 자기 안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야(요 4:4) 생수의 강이 흘러서 목마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요 7:38). 주님이 계획하신 미래는 그분의 은혜로 빚어내는 성품의 강도 위에 서 있다. 성령의 열매가 끊임없이 맺히도록 의도하고 필요한 것을 장만해 두셨다(갈 5:22,23). 그분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 영혼의 관리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며, 영적인 열매가 풍성히 맺히고, 육체의 비참한 목록에서 건짐을 받는다(갈 5;19-2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분의 은혜의 방편에 주의를 쏟아야 하는데, 이를 영성개발, 혹은 영성훈련이라고 한다.
4. 영적 훈련 또는 영성개발이란 무엇인가?
영성생활이란 사람들이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로부터 나오는 영적 질서와 협력하여 상호작용하는 활동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결과 새 능력들에 상응하고 새롭고 전면적인 특성을 지닌 인간 실존이 된다.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통합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신령한 사람이 된다. 영성이란 영의 지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영성은 우리의 인격과 전존재를 신적 질서에 효과적으로 연합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신과 몸을 연마하는 활동인 영성훈련으로 가능하다. 훈련을 통해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능력, 영적 영역에서 파생되어 나온 능력 안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
훈련이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꾸준한 활동들로서, 우리의 직접적인 노력으로 안 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을 빚어서 명확한 성품을 부여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께 맞추어 형성해 간다는 뜻이다. 인간의 심령 내지 의지가 어떤 확실한 형태 또는 성격을 입는 것이므로, 기독교 영성개발이란 인간의 내면세계가 형성되되, 그리스도 자신의 내적 성품을 입는 구속(救贖)의 과정이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만 개인의 외적인 삶은 예수의 성품과 가르침의 자연스러운 표현 내지 표출이 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까지”(갈 4:19), 혹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가 기독교 영성개발의 그 표어이다.
영성개발의 초점은 우리 영(의지, 마음)의 개발이다. 개인의 내면 가장 깊은 존재(마음, 의지, 영)가 예수 자신의 특질 내지 성품을 입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함께 변화되는 삶 전체의 과정인 것이다. 인격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망라하여 통전적으로 말이다. 심령(마음, 의지)을 거쳐 생각(사고와 감정)을 넘어 몸, 그리고 사회적인 관계, 그리고 영혼까지를 포함한다.
영성개발은 자아의 모든 면을 새로 고치는 문제이다. 개인화나 율법화가 아니다. 영성개발의 목표는 자아의 변화이며, 그것은 사고와 감정의 변화, 사회적 관계의 변화, 몸의 변화, 영혼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면 심령(마음, 의지)의 변화는 거의 저절로 이루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 속에 성육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 부요를 누리는 것이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행동)이 아니고 공로(태도)이다. 영성개발에서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받쳐야만 한다. 은혜의 사람이 되려면 제자들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성령세례와 영적 체험과 고양된 예배의 행위 등의 체험은 성품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체험이 자신에게 의미는 있지만, 성품을 변화시켜주는 것은 체험이 아니다. 성품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협력하여 행동하기를 배우는데서 오며, 여기에는 훈련이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로 들어서는 것, 즉 그분께 순종할 작정으로, 그분께 순종하기 위해 내가 배워야 할 것이라면 배울 작정을 하는 것이 영성개발 내지 영적인 변화의 참 길이다. 우리를 변화시켜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는 의지이며, 그 순종은 부활하신 그 분의 실체와 날마다 하나가 되는 삶에서 비롯된다(골 3:1-10). 인간 자아의 이러한 다양한 면들이 변화되면 우리의 능력 전반이 영향을 입는다(시 16:8).
인격과 마음이 성령의 벼락같은 역사로 단번에 변화될 것이라는 것은 최대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잘못된 수동성). 영성개발은 전인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과정이며, 영성개발 작업에 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해야한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영성개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영성 개발의 중요한 요소
(1)갈망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서는(벧후 1:4) 제자들의 갈망, 즉 내적 순결의 갈망, 온전함에 대한 갈망, 전심으로 사랑하고픈 갈망, 선해지고 싶은 갈망, 능력으로 섬기고 싶은 갈망 등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목마른 만큼 그리스도를 찾으며 순종할 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2)내면 상태의 파악
이런 마음이 시행되려면 학습, 묵상, 기도, 조언 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과 내면의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내면의 옳지 못한 것들을 변화시켜가야 한다. 우리 안에서와 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행동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의 행동을 그분의 행동에 맞추는 것이다. 사려 깊고 단호하게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공예배, 개인기도, 성경공부, 헌금, 봉사 등이 실천되어야 하며, 그 외에도 고독, 침묵, 금식, 경청기도, 성경암송, 검소한 삶, 고백, 일기쓰기, 복종하는 일, 신앙지도 등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 생활의 기초가 된다.
2)영성훈련의 세 요소
특정한 활동들을 영적인 과업 내지 연습으로 보고, 그런 특별한 영적활동들을 수련하는 것만으로 그치거나, 또는 인간의 내면생활, 심령, 영적인 면을 형성하려는 것, 혹은 개인의 마음 내지 의지(자아)를 개발하려 한다거나, 그리고 형성의 주체가 심령 내지 영적인 차원 그리고 성령과 기타 영적 매개물을 강조할 때는 영성훈련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영성훈련의 한 부분으로 흐를 뿐이다.
진정한 영성훈련은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먼저는 행동적인 면이다. 그리스도 안의 영성 개발은 그리스도께 명백히 순종하는 삶을 지향한다. 목표와 직무 내역은 제자들을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마 28:18-20). 물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요 14:21). 실천만 치중하면 산상수훈처럼(마 5:26) 율법주의와 실패와 죽음으로 끝난다. 주의 계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빚어서 인격 전체가(영혼, 생각, 몸, 환경까지) 자아의 창조적인 요소이자 의지라고도 하는 새 마음 내지 심령과 한편이 되도록 전인격을 훈련해야 한다. 의지는 불가피하며(롬 8:17 ‘원함), 인격은 행동해야 하며, 행동에는 의지 이상이 있다. 심령 혹은 마음은 간절히 원할 수 있으나(마 26:41) 인격 전체의 화신인 육신이 훈련되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이 시작되는 것은 심령 내지 의지와 위에서 난 새 생명이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까지는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엡 4장; 골 3장). 이 일은 냉철한 사고와 불요불굴의 참여를 요하는 능동적 과정이다. 이를 재형성하도록 협력하는 것이, 즉 중생한 마음이, 그 인격이 다시 빚어지면 전 존재가 그 중생한 새 마음의 움직임을 따르게 된다.
다음이 내적인 면이다. 이 매체물은 성령 안의 삶을 위한 훈련으로서 고독, 침묵, 기도, 금식, 예배, 학습, 교제, 고백 등이 있다. 이런 훈련에 힘입어 심령 또는 의지는 몸을 경험의 정황들 속으로 데려 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아 전체는 심령의 열망을 따라가도록 속에서 부터 다시 빚어져 점점 더 온전한 순종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영성 개발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복음에, 그의 인격과 임재와 불가분의 관계인 그 분의 명령에, 푹 적셔지고 그것을 끊임없이 적용하는데서 온다(요 8:31;15:7).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성령으로 이 영의 말씀을 갖고 우리 영을 빚으신다.
중생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품고, 그에 따라 충분한 노선의 영적 훈련으로 그 목표를 이룰 현실적인 계획을 세울 때, 그리스도 안의 영성 개발은 이루어지고 지상명령은 성취된다. 인간의 핵에 의지, 심령, 마음이 있다. 이 핵은 다시 빚어지고, 그것이 다시 확장되어 삶 전체가 다시 빚어진다. 그것은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라 공로이다.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노력이 올 때 돕는 자가 따라온다(요 14:15-17). 은혜 아래서 자아 전체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며,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살려는 목표는 의지에서 행위로 전환될 수 있다.
5. 영성훈련에서의 몸
영성개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성품을 입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분이 그들의 자리에서 계신다면 사실 법한 삶을 점점 살게 되는 것이다. 갈수록 그분의 비전과 사랑과 소망과 감정과 습관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된다는 표현으로 해도 좋다. 이 과정을 떠 받쳐주는 것이 은혜이다. 우리 쪽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 행동에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특히 영적인 삶에서 몸이 차지하는 역할은 중요하다. 몸의 끊임없는 아우성과 육체의 소욕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참히 짓밟는다(갈 5:17). 마음과 몸이 따로 논다(마 26:41). 다행히 몸(육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절망적이지 않다. 마음과 육체는 공히 하나님을 찾는 기관이다(시 63:1;84:2;145:21). 성령이 부어지는 기관이기도 하다(욜 2:28,29). 성령의 전이다(고전 6). 주님이 위하시는 곳이며 주님을 위하는 곳이기도 하다(고전 6:13).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그리스도가 사는 곳이요(갈 2:20), 위에서 난 새 생명을 주시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곳이며(고전 6:2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이다(롬 12:1).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죄의 행동들이 습관이 되고 점차 성품으로 바뀐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한 쪽으로 빚어진 인간의 몸으로서의 육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삶의 정황(가정에서 학교까지)에서 형성되어 편만한 악의 구조를 이룬다. 그래서 욕망은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는 죄의 정욕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이룰 때 몸과 일그러진 욕망체계는 자동으로 그리스도 편으로 넘어오지 않고 계속 그분께 대항한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약 1:14,15). 따라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하고(벧전 2:11),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며(롬 8:13),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전 9:27). 땅에 있는 지체 곧 육체를 죽이기 위한 금욕의 계획이 필요한 것이다(골 3:5). 사람이 몸과 그 요구에 종노릇하면서 동시에 그 분의 훈련 과정에 성공할 수는 없다(마 10:39;16:26, 자아부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갈 5:24).
이러한 욕망의 고질화된 습관들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새로운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몸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때 가능하다. 몸의 지체들을 하나님의 선한 일들 쪽으로 옮기고, 몸의 낡은 세력들은 본연의 자리인 삶의 후면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영으로서 가능하다. 타고난 욕망과 몸 자체가 상전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 의지의 종으로 남아서 그분을 섬기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일관된 믿음과 소망 외에도, 몸을 목적에 맞게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곧 몸을 재훈련하고, 우리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동작들을 그리스도안의 동작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방식이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몸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롬 6:13).
그러나 잘못된 일이 몸 안에 대기 상태로 있기 때문에 의도(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의도와 노력은 연단을 통해 실행에 옮겨야한다. 연단된 몸은 상황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처럼 행동할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이런 연단은 성령 안의 삶을 위한 훈련에서 온다. 훈련은 막강한 합리화를 낳는 몸에 밴 습관을 물리 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려는 일이 좋은 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그리고 주어진 삶속에서 몸을 재배치하고 재교육한다. 적절한 다른 행동을 선택하고, 삶 속에 자리를 내서(조건을 갖추어서) 그것들을 실천하고, 하나님이 포함된 새로운 행동의 공간에서 상황을 다시 본다. 몸의 용도를 바꾸는 것과 상황을 대하는 내면의 자세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고, 생각과 태도에 순결한 습관을 기르면 고칠 수 있다. 몸의 사용과 연단은 그리스도와 일치되기 위해 믿음과 은혜가 만나는 장이다. 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와 개발의 장으로 맡겨주신 작은 전원함이다. 우리 삶은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관리하는데 달려 있다. 악이 세상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때는 생각이 필요 없지만, 옳은 일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생각과 계획과 연습이 필요하고, 거기에 은혜까지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새 생명을 대항하던 자리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자리로 데려오는 법을 일러주신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몸으로 적극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몸의 노력은 몸의 지체들이 거룩함에 익숙해지는 기초를 다져주며, 반대로 죄에 익숙해 있던 습성은 점점 없애준다. 이제 몸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 간다(빌 1: 20,21).
6. 굳이 훈련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다. 중요한 일치고 훈련이 없이 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살면서 개발해 나가는 중요한 것은 하나같이 훈련의 결과이다. 자진해서 어떤 활동을 선택하고 계획한 결과이다. 인간이 정말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본인만이 선택하여 자신에게 시킬 수 있는 훈련에서 비롯된다. 훈련 없이는 우리가 삶의 만족감과 품위의 질을 전혀 얻을 수가 없다. 모든 교회에서 거의 모든 불상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은혜와 훈련이 함께 있을 때 원하는 결실이 맺힌다. 사고와 감정과 성품의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려면,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이중성을 벗고 놀라운 단순성 내지는 투명성을 입기 위해 善을 행동에서 찾는 바리새적인 혹은 율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끄는 인간 성품의 숨은 혹은 은밀한 차원인 몸과 영의 심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성품들이 점차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안에 배어들어 내면의 성품에서 사랑의 행위들이 자연히, 그러나 초자연적으로, 그리고 투명하게 흘러나오게 해야한다. 예수와의 끊임없는 사귐을 통하여 속속들이 그분의 지배를 받으려면, 그래서 자신을 능가하는 그분의 능력을 확실하게 구사하려면, 이 땅의 실존을 괴롭히는 문제들과 악에 대처하려면, 훈련 말고 다른 것으로는 대처할 수가 없다.
훈련에 힘입어 더 큰 믿음으로 행할 수 있다. 훈련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단순한 길이다.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비밀의 훈련’이다. 기도, 금식, 구제 등 모든 훈련을 가능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한 중에 해야 한다, 할 것을 잘 하되 그것을 알려지지 않도록, 속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알려지지 않게 조치해야 한다. 훈련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훈련이란 다른 사람이나 나에 관해 범할 수 있는 실수를 견디는 연습이고 오해받는 연습이다. 사람의 시선을 인간에게서 떼어 내어 그리스도께 돌려주어야 한다. 반드시 필요한 훈련을 피하면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잃는다. 훈련만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통찰력과 능력을 구비할 수 있으며, 주님이 행하시고 가르친 대로 살수가 있다.
7. 영성훈련을 위한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언제라도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 오랜 습관을 통해 우리 몸의 지체들에 들러붙어 있는데, 그것이 주님과 함께하는 훈련을 통해서 점차 벗겨지되 그 벗겨짐의 정도가 날로 더해갈 수 있다. 우리 육신은 갈수록 더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의 성령의 편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긴다. 영적인 삶을 위한 훈련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중요한 정보, 곧 내면형성(in-formation)의 핵심부분이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믿으면, 그분의 모든 방식들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기이한 실체가 순간순간 그리고 영원히 자신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엡 5:1), 즉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롬 13:14)은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고, 예수의 정신과 행동이 자신들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할 수 있다. ‘나무’가 좋아져서 ‘열매’가 좋아지게 하는 것이다(마 12:33).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에는 목표와 방법이 다 들어 있다.
하늘의 통치 아래 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할 자유와 능력이 생긴다. 예수의 삶을 떠받친 것도 하늘 통치의 실체였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사셨다(마 5:46,47;눅 6:35). 이를 위한 영적인 황금삼각형, 혹은 영성 훈련을 위한 삼위일체가 있다.
첫째는, 일상의 문제들을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련을 인내로 견딜 때, 하늘의 충만한 통치가 우리의 삶 속에 임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있다(약 1:2,3;롬 5:3-5). 일상의 자질구레한 실존 속에서 인내심이 최고조에 이를 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진다(약 1:4). 예수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정과 마을과 실존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보호로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두 번째는, 우리 안과 주변에서 성령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 수 있다(갈 5:25). 전능하시고 창의적인 인격체, 능력주시기로 약속하신 분, 그 보혜사 성령이 우리 위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활동하시면 예수께서 되실 법한 모습과 하실 법한 행동으로 이끄신다(요 10:7-15). 예수께서 아셨던 생명의 멋과 능력,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우리 내면을 채우는 것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은사(특정한 기능을 행할 능력)와 열매(변화된 성품의 표시)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열매는 우리의 가장 깊은 태도와 성향이 예수와 같아질 때, 그것은 우리가 배워서 기회를 드린 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분의 삶을 키우신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시면(갈 2:20) 성령의 열매를 맺힌다. 그리스도를 닮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나누는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상호작용이다(고후3:18).
그 세 번째는, 영적훈련으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도 행하신 특별한 활동들로서, 우리 삶의 순전히 세상적인 면을 죽이거나 거기에 공급을 끊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성경의 명령을(골3:9,10;엡 4:22-24) 따르기 위해서 수행하는 방법이다. 은혜 없이는 할 수 없다. 더욱 힘쓰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벧후 1:5). 소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리 영혼 안에 부추기는 것과 방해하는 것들을 알아내고, 방해거리들을 최대한 제거하고 그리스도를 닮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점검할 수 있다. 예수께서 사역이나 설교 중이 아닌 때 하신 일들을 잘 보고 따라하면 우리도 그분이 접한 상황에서 행동하신 대로 행동할 인도와 능력을 얻게된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타당성 있는 영적 성장의 대책들이다.
이 세 가지는 영적인 변화에 서로 맞물려 있으며, 셋 중 어느 하나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빌 2:12-15). 순간순간의 사건과 환난들을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장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우리 삶 속에 활동하시기를 인내로 고대하신다. 소망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내적인 자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을 입을 수 있는 길을 최선을 다해 찾아내고 그대로 이행한다. 근본적인 변화의 길이다
8. 훈련에 앞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제자도를 나의 삶으로 여길때 가능하다. 그러면 무엇을 이루든, 무엇을 하든 그것이 곧 훈련의 동기가 되고, 모두가 매일 매일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장이 된다. 훈련을 실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의 문제이며, 동기는 비전에서 오고, 비전이 생기려면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인생을 살려는 제자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훈련된 삶에 들어가려면 장시간 혼자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깊어가는 이해를 이 땅에서 자기 삶의 모든 면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관찰, 학습, 순종, 모방의 태도로 그분과 함께 다닌다는 뜻이었다(막 10:28). 오늘도 제자도에 들어서는 길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필요하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눅 14:26,33)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다. 제자도에 들어서는 길은 이 길 뿐이다. 제자란 그리스도처럼 되겠다는 의지와 그래서 그분의 믿음과 실천 안에 거하겠다는 의지를 품고서, 자신의 일상사를 그 목표에 맞추어 체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재조정하는 사람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예수의 도제로 살겠다는 근본적인 선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법을 항상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영성훈련은 제자도의 영역에 들어가는 일이며, 제자도가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든, 제자훈련이든, 영성훈련이든 제자도의 신앙이 빠지면 안 된다. 제자도가 항상 선점해야 한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세상이든 할 것 없이 변화하려면 필요한 것은 제자도가 전부이다. 개인들이 제자도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에 비할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주님의 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우리 삶의 방식으로 채택하겠다는 다짐이 영성훈련을 가능하게 하고, 영성훈련은 곧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훈련을 돕는다.
예수를 스승으로 따를 의향이 없고서야 그분을 믿는다는 우리의 주장은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니고는 인간 영혼이나 세상의 필요를 족히 채워줄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사실 그대로 필수 일뿐 아니라, 인간의 지고한 가능성의 실현이다, 그리고 지고한 차원의 삶으로 보는 것이 바른 시각이다. 제자도가 그분이 나라면 사실 그 삶을 영위하는 법을 점차 배워가면서, 그분의 부활하신 임재와 상호작용하며 사는 것일진대, 제자도를 잃어버리는 것은 스승인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 속에 실현하시는 차원의 삶을 전부로 알고, 처음 제자들처럼 인간 실존의 구석구석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법을 그분께 일관되게 배우는 제자도가 생명처럼 살아야 한다. 지상명령을 위해 제자도를 가는 것, 이것 외에 우리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요 과정이요 전략이란 걸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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