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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kjeddh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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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의 기초로서의 예수 이해
요한복음에 나타난 생명의 예수
-제자훈련과 영성훈련의 근원으로서의 예수-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비롯하여 제자훈련과 영성훈련의 바탕에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를 보내신 영이신 하나님이 계시며(요 4:24), 그의 다른 보혜사 성령이 계신다(요 14;26). 이를 가장 잘 특색 있게 증거 해 주는 책이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생명, 혹은 영생으로 일관한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주시는 생명력 넘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를 닮아가는 훈련을 하고, 생명 있는 삶을 살아가는 수원이요 연원이 된다는 주장이기도하다.
기독교적 영성, 혹은 신앙의 훈련은 의지적 결단이나 지속적인 반복을 통하여 이루어지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고질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다해도(가끔씩 소수의 사람에게는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내면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율법적 행위로 흐를 가능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 같은 생활과 훈련을 할 수 있고, 하게하고, 하는 것이 기쁠 수 있는 생명, 혹은 능력의 바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생명의 힘, 또는 영생의 능력이라고 해두자. 건강한 능력은 힘을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는 그러한 생명과 능력의 자체로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사는 모범을 보이셨다. 물론 그러한 것이 다른 죄인들보다 심난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연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셔야 했다(히 5:8.). 예수는 자신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힘으로 스스로를 충분히 능력 있는 인간성으로 갈고 닦았고 형성했으며, 그 살아 있는 능력 자체요 부활의 실체로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으로부터 오랫동안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힘의 실체로 역사하신다. 그(삼위 일체 하나님의 생명)가 있어 불가능해 보이는 제자의 길, 경건에 이르는 훈련,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과 함께(벧전 1:9) 몸의 구속까지 이루는(살전 5:23;빌 2:12) 그 힘을 믿기 때문이다. 새의 날개가 새에게 부담되지 않듯이, 이 힘은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루어야할 육체를 죽이고, 죄악을 벗고,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이루는 힘찬 날개 되어 준다. 몸으로 이루어야 할 삶의 구원을 위한 복음인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런 면에서 아주 시원하게 그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고 신선한 바람이 흐르는 수원지 같은 곳이다. 이를 만나고 마시고 느껴보는 경험으로, 기화요초 만발한 영성의 꽃밭을 거닐게 된다. 1장 4절은 예수 그분 안에 생명(zoe)이 있음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좋은 생명, 혹은 영생을 가진 분이시다. 그 생명이 빛이 된다, 참 빛 말이다(1:9). 영혼의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이 살아나게 하던 빛의 근원이시다. 그러니 그와 접촉하는 사람은 거짓과 어둠의 그늘에서 빛 자체와 생명을 받아 새 사람으로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자신과 갈 길을 보게 된다. 더더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받는다(1:12). 한번 됨으로 영원히 본성적 자녀(teknon)가 되는 것이니, 하나님 자녀로서 합법적 권리를 가지고(exousia) 행동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생명의 빛을 영접한 사람들의 확연히 달라진 실체가 그렇다.
14절의 성육신 기사는 이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광은 순전히 은혜와 진리로서 나타났다. 그의 충만한데 받으면 은혜 위에 은혜가 되었다. 넘쳐서 흐르는 풍성함의 원천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는 방법이었다(1:18). 하나님의 영광뿐만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은혜 위에 은혜를 주시는 분에게 뿌리를 내리는 한, 가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33절로 오면 예수의 새로운 역할이 소개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자신의 다른 옷을 입은 또 다른 예수이시다. 그러니 자신의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자신 속에 푹 담가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신령한 새 사람을 만드는 일을 하신다. 창조주요 창조의 영이신 그가 사람 속에 침투하시어 근본부터 손을 대신다. 죽은 영은 살리고, 얽히고설킨 생각과 감정들은 질서 속으로 끌어오고, 병들고 더럽혀진 육체 덩어리는 구속을 입는다. 그와 성부께서 보내시는 성령이 그러하시고, 자신의 역할이 그러하시다. 그러니 이 예수의 능력이 접촉되면 전기에 감전되듯 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2장에 들어서서 만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사거리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통하여 인간과 그 삶에 주는 신적인 변화를 고지하신다. 실로 그의 말 한마디면 변화의 표지(seneion)란 식은 죽 먹기 일 수 있는 것임을 호방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내 속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허락하는 한 나는 얼마나 큰 변화의 틀 속에 들어갈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3장의 기사는 니고데모와 만나는 예수의 이야기이다. 늙다리 종교인이요 관원으로서 사회 밥을 그렇게 먹고도 영의 일에는 캄캄한 이 양반과 나누는 대화의 절정은 성령을 통한 거듭남, 위로부터 오는 새 생명의 충만함이다. 두꺼비 등가죽 같은 인생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사람에게 조차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할은 그야말로 새로운 아이로 태어나 살게 하는 생명의 역동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 일이며 영생을 얻는 것이다(3:15,16) 이러한 생명의 숭고하고도 차원 높은 역할이 예수의 영이신 성령에서 나온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분이시기도하다(3:34). 이가 내 속에 들어와 내 속살까지 뒤집어 놓도록 허락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놀라울 뿐이다.
4장에 들어서면 목마른 대지위에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단비가 연상된다. 주절주절 여섯 남자 곁을 맴돌면서 살아보겠다고 버티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딱하다 못해 비굴하고 비참해 보입니다. 몸과 영혼 목이 타오르고 심령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상처투성이 입니다. 여섯 남자의 곁에 까지 오는 동안 겪었을 심적 고통은 말도 못합니다. 몸을 파는 사람으로 길거리에 나앉지 않으려고, 어쩌면 그럴 능력이나 건강도 나아보이지 않을 만큼 많이도 상해 있습니다. 그저 숨 쉬고 있으니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그가 예수를 통해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십니다. 그의 가슴 속에서 터진 생수는 그녀를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만듭니다.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그녀를 살려냈습니다(4:14). 그녀를 자제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생수를 주시는 분이 그녀의 생수의 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4장에서 유의해야 할 예수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사실은, 그분이 육신의 양식을 먹지 않고도 배부르게 사는 비결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4:34).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그분의 양식이었다. 양식이란 입으로 먹어 배가 부르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제자들이나 우리에게 충격적인 장면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마 4:4).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양식일 수 있다. 아니 예수에게는 배불리 한 상 잘 먹은 것 이상의 양식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예수의 양식이 내 배속에 차고 넘칠 수 있다는 것은 신비하지만 실재적인 기대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실제로 다른 빵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그분 예수의 생명의 힘은 말 한마디로 신하의 아들을 죽을병에서 고쳐준 것으로도 나타난다(4:49,50). 가까이 갈 것도 없었다. 그 힘이면 멀리서도, 그리고 손댈 것도 없었다. 말 한마디면 천지가 창조되었듯이 금새 회복되었다. 강한 예수의 생명의 능력이 약한 생명을 덮자 햇빛 앞에 어둠이 물러가듯 낮고 약한 생명들은 사라졌다. 이것은 실재하는 예수의 생명이다. 그것은 일도 아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눈만 껌벅이며 요행만 바라던 병자를 일으킨 사건은 그의 생명의 능력을 더 실감하게 한다(5:1-8). 38년 동안이나 누워있었다. 옆에서 물이 움직여도 달려갈 힘이 없을 만큼의 만성적이고 절망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두 마디 묻고 처리하신다. 정말 낫고 싶은지, 그렇다면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가라고. 그의 생명의 힘이 이 정도이다. 그러니 그가 내 속에 와서 상대한다면 그깟 병이야 걱정거리도 아니다.
예수의 생명의 능력의 잔치는 오병이어에서 꽃을 피운다(6장). 눈앞에서 뻔히 일어나는 일인데도 믿지 못할 만큼의 기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으니 12제자들이 꿈꾸는 듯해서 정신을 못 차렸던 것도 이해가 간다. 이해하고 느끼고 수용하기에는 너무도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이다. 정말로 그랬다. 그의 능력이 만들어 낸 일이다. 그의 손끝에서 태초의 창조의 실력이 나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도 잘 모르겠거늘, 그는 한 차원 높여 말씀하신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 치신 자라고(27).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29). 자신이 생명의 떡이요 산 떡이니 자신을 먹고 마시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다고(35). 그를 믿는 것이 그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그를 믿는 것이 그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그를 믿는 것이 목마르지도 주리지도 않는단다.” 그가 생명의 힘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63).
7장에 이르러 초막절 행사는 그 생명의 물줄기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그 명절 매일 아침마다 제사장들은 7일간 금항아리에 실로암 물을 퍼다가 군중들의 노래(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에 맞추어 단 서편에 물을 부었다. 반석에서 물을 내주신 고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출 17:6;민 20:10). 명절 끝날 그 축하의 절정인 8일째,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는 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날, 드디어 그 생수의 의미를 새롭게 알리셨다. 예수 자신을 믿으면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고 말이다(37-39). 광야를 지나는 40년 간 그들의 목을 축여주었던 생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이제는 예수를 의지하는 사람들의 뱃속에서 강을 이룰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렇다. 예수는 생수의 태평양이다. 그러니 그를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하여 생수의 강을 만난다. 강이니 먹고 마시고 헤엄치고 별짓을 다 해도 한도 끝도 없는 양이다. 이젠 결코 영혼이나 인생의 생수가 없어 목마르지 않다. 예수가, 그가 주는 성령, 그가 주는 생수가 없을 뿐이다.
이 생명이요 능력은 간음의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고, 그녀에게 돌을 던져 치려던 군중들을 새롭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났다(8장). 그리고 그만이 줄 수 있는 용서와 자유가 선포되었다(31,32). 예수의 말씀에 거하면 그 진리가 자유케 하는 능력의 자유 말이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참 자유하는 자유인 것이다(34,36). 거짓의 아비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자유인 것이다(44). 그 말씀은 지상에서의 자유를 넘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 지경으로 까지 확장된다(51). 잘못 들으면 미쳤다고 할 만한 능력이다(52). 이 능력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확 뜨게 함으로 또 다시 확인되었다(9장). 눈 뜨고도 못 보는 자나 눈 감았지만 보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나타나는 능력이다(39).
10장은 이 생명이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대로와 같다. 양의 문으로서의 예수는 자신을 통해 나오고 들어가는 자들마다 ‘구원과 꼴’을 얻게 하시는 분이시다(9). 구원받은 양들이 토실토실 살찌도록 하신다. 거기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잔치를 만난다(10). 겨우 구원이나 받고 살다가 천국이나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그 생명의 질을 누린다. 그 풍성함의 속성을 기쁨으로, 평안으로, 건강으로, 능력으로, 곧게 살므로 실컷 느낀다.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는 자기를 스스로 버림으로 양들인 우리로 하여금 목숨, 생명을 얻도록 결정적으로 희생하신다(11-15). 자신을 줌으로 얻은 양의 생명을 자신을 드러냄으로 그 극치에 이르게 한다. 그가 주는 영생은 ‘영원히 멸망치 않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보호 속에서 지켜진다(28-29). 구원의 안전성은 그렇게 확인된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이다(30). 그가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인 예수는 생명의 질과 양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11장은 그 생명이 생명을 드러냄으로 명확하게 증거되는 대목이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한 마디 말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말이다. 거기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명제는 그 사건 이상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5,26). 다 죽어 썩어가던 사람 버젓이 하나 살려놓으시고는 보란 듯이 증명하셨다. 자기 스스로가 부활이라 그래서 죽어도 부활하신다. 그를 믿는 자를 부활시킨다. 자신이 생명이라서 죽어도 다시 산다. 죽음 속에도 그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믿는 자는 그래서 생명을 갖게 한다. 그러니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씀이 맞아 떨어진다. 그의 생명이, 그의 부활이, 그의 능력이 맞닿으면 나사로가 살듯 죽은 자가 다시 살고,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이 생명을 낳는 일이 벌어진다. 생명이 생명에게 주는 생명의 기이함이다. 이어지는 12장은 똑같지는 않지만 그런 역설이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산다는(24), 자기 생명을 잃어야 얻는다는(25), 그래서 예수 자신이 그렇게 했듯이 그렇게 해서 생명을 얻어 보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생명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주인으로서 종을,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섬기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넘치는 자애와 섬김과 온유는 그의 사랑의 흘러넘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13장). 그래서 진정으로 섬김과 희생이 힘겹지 않게 나타나고, 그로서 참다운 리더십이나 영향력이 흘러넘치게 된다. 이런 사람 사랑의 힘은 바로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주님이 주시는 표지이다(25). 주님의 생명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되심으로 또한 계속된다(14:1-6). 믿음의 종국으로서의 아버지 집은 그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심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땅에 살아 남아있는 동안 그보다 더 큰 일을 행하는 능력으로 나타날 것의 기대도 이 차원에서 이해 될 수 있다(12,13).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물로서의 성령은 더더욱 기대되는 일이다(16). 이제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계명을 충분히 지키게 된다(21). 예수는 성령과 함께 일하시면서 가르치고 평강을 준다(26,27). 그 생명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결과를 낳는다(15:5,26).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쁨을 충분히 경험하면서 말이다(9,11,16:13). 요한복음의 여기까지는 생명의 예수가 주셨던 생명의 현상들이었다. 그것이 제자들의 삶에서 넘쳐나는 현장은 사도행전에서 밝혀진다.
생명이신 예수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 속에서 일하실 분으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실 분으로, 우리를 도우실 분으로 예수면 충분하다. 이분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실 것이다. 이분과 협력하면 영성훈련은 하나도 버거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쉬운 멍에(마 11:29)를 지고 하나씩 밞아 나가면 된다. 머잖아 알게 될 것이다. 그에게 얹혀서 가는 기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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