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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이세요?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184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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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8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하나님이 보이세요?

2009년 11월 7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8

  여러분들과 함께 계속해서 팔복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팔복 중에서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정말 아름답고 황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둘로 나누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이 둘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일 겁니다.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이 있습니다. 왤까요?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에 관심이 많을까요? 안보이거든요. 못 보거든요. 안보이니까 더 보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2000년도 중국엘 갔었습니다. 청년들과 함께 단기선교를 갔었는데, 그때 백두산엘 갔어요. 우리나라 산을 중국 쪽에 돈 내고 올라가야 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두산을 보고 싶었습니다. 올라갔는데 뿌연 안개가 자욱합니다. 천지는커녕 백두산의 형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내려갔을까요? 안보이니까 이내 단념하고 내려갔을까요? 제한된 시간 동안 관광을 할 수 있는데 그 시간 다 갈 때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안개가 걷혀서 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실제로 백두산에 갔다가 천지를 제대로 보고 오는 경우가 절반도 안된다고 합니다.

  저의 일행은 천지를 봤을까요, 못 봤을까요? 봤습니다. 올라갔을 때는 안개가 자욱했어요. 한치 앞이 안보일 정도였지요. 안보이까 우리 마음 가운데 더 간절함이 생기는 겁니다. 우린 단순히 관광 간 것이 아니었거든요. 백두산을 보고 북녘 땅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서 올라간 겁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안개를 거둬주십시오. 북녘 땅 보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짓말처럼,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자욱하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혔어요. 그래서 무엇을 했을까요? 사진 찍었죠.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 찍었어요. 우리 일행 모두 찍을 동안 안개가 걷혀있었어요. 그리곤 다시 안개가 끼는데 순식간이었습니다.

안보였을 때는 그렇게 답답하고 보고 싶어 애가 탔는데 보고나니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겁니다. 미치겠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 공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여섯 명이 둥글게 손을 잡고 통성으로 북한 땅을 위해, 우리 조국을 위해 기도를 했어요. 그러면 단속하거든요.

  이것은 한 예인데, 안보이면 더 보고 싶어집니다. 안보이니까 답답해집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는 데에 관심이 많냐? 안보이거든. 안보이니까 답답하고 방황하고 더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그러다가 누가 하나님을 봤다, 하나님을 보여주겠다,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다 하면 혹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봤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얼토당토않은 말들을 해댑니다. 그럼 사람들은 그에 혹합니다. 진짜 같거든요. 예언한다고 하면서 병 고친다고 하면서 허튼 짓을 하는데 그것에 미혹당합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보여주겠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드는 겁니다. 가짜를 만들어 놓고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정작 참된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드는 겁니다. 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엉터리가 많아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여기서 하나님을 봤다, 하나님의 음성을 받았다, 직통 계시를 받았다, 능력이 나타난다 할 때 분별력 없이 달려가고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러다 낭패를 보는 겁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 모릅니까? 못 보거든. 보지 못하니까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혹하고 그러니까 미혹 당하고 그러다가 낭패를 보는 겁니다.

  보지 못한다, 결국 무엇의 문제이냐 하면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못 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상태니까 못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준수와 정결예법을 상당히 중요시 했던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율법의 조항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정결법을 잘 지킬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했어요. 그래서 여러 랍비들이 이에 대해 해석하고 그러면서 율법 조항과 정결법을 철저히 지키는 데 열심을 냈습니다. 이런 태도는 한편으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본질을 잃어버린데 있다는 겁니다. 외적인 율법이나 정결법의 준수를 통해서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속이 바뀌지 않는다면 외적인 거룩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은 탐욕과 거짓과 음란과 미움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외적으로 아무리 율법과 정결법을 철저히 지킨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걸 지적하신 겁니다. 거룩의 문제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 즉 마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 근처나 쿰란, 맛사다 등 모든 유대인들의 유적지에 가면 정결예식을 하는 미크베라고 하는 욕조가 있는데, 예배나 기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최소한 예배에 대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준비 없이 아무렇게나 드리는 것보다 백배 났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외적인 미크베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의 습관이고 외식일 뿐입니다. 미크베에 수천 수만 번을 들어가도 그 사람은 정결해지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미크베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마음이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먼저 씻겨져야 몸을 씻는 외적인 정결의식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초점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고, 내 마음이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을 볼래야 볼 수 없는 겁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봐야 합니다. 내 마음은 청결한가, 아니면 무언가 더러운 것들도 차있거나 가려져 있어서 혼탁한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하셔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지금 제가 비닐 들고 있습니다. 제가 보입니까? 한 장 더. 자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보입니까? 잘 안보입니다. 점점 뿌옇게 됩니다. 이것이 많아지면 아예 안보이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답답해지지요. 안보이니까 답답하죠. 그러니까 딴 것 보고, 딴 짓하고, 더 어두워지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리우는 것들이 있어요. 우리의 마음의 눈을 가리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단순히 이렇게 비닐 한두 장 덮이는 수준이 아닙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마치 두꺼운 종이가 덮여 버리는 것과 같아요. 이런 것이 눈앞에 가려지면 안보여요. 하나도 안보여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보이기는 커녕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사건입니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던 남자들은 궁궐을 지키는 수비대와 몇 명의 신하들을 빼놓고는 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궁에 남아있었어요. 늘 전쟁터에 선봉에 서서 나갔던 사람이 그날은 나가지 않았어요. 혼자 있을 때, 해야 할 일 안할 때 위험한 겁니다.

  그날 저녁에 왕궁 옥상을 거니는데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것을 봤어요. 예루살렘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면 당연히 왕궁 옥상에서는 다 보입니다. 처음에 우연히 봤어요.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계속 봤어요. 그러자 무슨 마음이 생겼어요? 저 여자를 품고 싶다는 욕정이 생겼어요. 음욕이 생겼어요. 음란이 마음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간통을 했어요.

자, 지금 다윗에게는 죄가 들어왔어요. 그러자 그 죄가 다윗의 마음을 단숨에 덮어버립니다. 그러자 무슨 짓을 합니까? 밧세바가 덜컥 임신을 했어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런 저런 꼼수를 씁니다. 그게 안되니까 나중에는 밧세바의 남편, 자신에 충성을 다하는 충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래서 죽여요.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윗과 요압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완전범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그 마음에 정결함이 있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가 죄가 들어가니까 어떻게 되요. 이런 추접한 짓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왜요? 안보이거든. 죄가 눈을 가렸거든요.

  이사야 59:1-2에서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잘 보세요. 내 안에 죄가 들어오고 내가 죄를 범하면 그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가린다는 겁니다. 내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리개처럼 쳐져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겁니다. 치명적인 겁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해야 합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어요.

  다윗이 회개하면서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나중에 이 죄를 회개하고 쓴 시편 51:10절에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잘 보세요. 어떤 마음을 달라는 겁니까?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을 구합니다. 즉 다윗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알았어요. 자신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안에 죄가 들어오니까 정한 마음, 즉 정결한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결한 마음이 사라지니 뭔 짓을 못합니까? 안보이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안보이면 딴 짓하게 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죄의 문제를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불순종의 문제를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영적 게으름의 문제를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 자기합리화에 익숙합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죄의 문제, 자꾸만 불순종의 길을 걷는 내 마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뒤로 미루고 하지 않는 영적 게으름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자기 합리화하거나 변명하거나 타협하지 마세요.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다 말입니다. 그 죄가 내 눈을 가리고 하나님의 눈을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구하여도 내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듣지 않으시게 됩니다. 내 죄가 하나님이 듣지 못하시게 하는 가리개가 된다는 겁니다. 차단막이 된다는 겁니다. 분리장벽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구하여도 듣지 않으시는 인생, 이런 인생 되고 싶으세요?

  자신의 죄의 문제, 불순종의 문제, 영적 게으름의 문제에 대해 관대하지 마세요. 그 죄를 찍어 내십시오. 철저하게 회개하고 찍어 내세요. 그 죄 또 주워 먹지 말라는 겁니다. 다 토해내고 또 그거 먹어요. 그런 짓 이제는 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뿐입니까? 내 안에 탐욕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죄악입니다. 내 안에 우상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보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러고 산단 말이죠. 그러고도 하나님 믿는다고 합니다.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어요.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움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미움을 그대로 두면 그것이 내 마음의 눈을 가려버려요. 그럼 하나님이 잘 안보여요.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그 하나님이 잘 보이겠어요. 하나님도 안보이고 사람도 안보이게 되요. 우리의 마음에서 미움의 장막을 걷어 내버려야 합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문제가 있어요. 염려꺼리는 누구나 있어요. 언제든지 생길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염려가 실제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뿌옇게 됩니다. 그러면 더 안보이니까 더 염려하게 되요. 그럼 염려에 붙들려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 염려의 장막을 걷어내야 합니다.

  거짓과 교만, 위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 거짓에 익숙해요. 거짓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직하질 못해요. 그리고 참 교만해요. 겸손보다는 교만이 우리와 더 가까워요. 위선이요, 늘 우리 곁에 있어요. 언제든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어요. 이러한 것을 경계하고 들어왔다 싶으면 지체 없이 걷어 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제대로 안보입니다. 하나님이 안보이면 형제자매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럼 누구만 보이느냐? 나만 보여요. 그러니까 나만 잘난 것 같고 나만 괜찮은 것 같고 나만 의로운 것 같고 나만 힘든 것 같고 나만 고생하고 나만 일하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러니까 더 힘들고 더 짜증나고 더 불평불만이 생기고 더 염려걱정에 사로잡히고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보이면 딴 것을 보게 되요. 당연하지요. 하나님이 안보이까 답답하니까 딴 것을 찾게 되고 딴 것을 보게 되고 이리 저리 기웃 거리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보이니 딴 것이 보여요. 내가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세상이 보입니다. 그러니 힘들어지고 답답해지고 사람들 눈치보고 세상 두려워하고 기웃거리고 미혹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사람이 두렵습니까? 하나님?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는 사람 아닙니까? 영국인지 어느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어느 기자가 사회 저명인사 열 명 인가에게 똑같은 편지를 보냈다죠. “모든 것이 발각되었으니 도망가라.” 그 다음날 저명인사들의 집에 갔더니 어쨌다? 다 도망가고 없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말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사람의 눈이 더 무섭고 세상의 평가가 더 무서운 것 아닙니까? 왜요? 하나님이 제대로 안보이거든. 하나님이 제대로 보이면 뭐 사람의 눈이 무섭습니까? 뭐 세상의 평가가 무서워요?

하나님이 보이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애 쓰고 씨름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길을 걷고 있다면 사람들의 눈과 평가나 목소리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어차피 사람들은 세상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고 자신들의 추악한 욕심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들의 눈과 목소리는 뻔한 겁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사는 사람은 결국에서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아요. 설사 배척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그건 망한 것 아니에요. 팔복 중 마지막 복처럼 그건 복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을 제대로 못 보는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평가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 천만 배 더 중요합니다. 직장에서의 실적, 중요합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믿음의 실적이 어떤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직장은 몇 십 년 다니면 끝입니다. 언제 명퇴 당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는 반드시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의 실적이 어떤지 평가된단 말이죠. 뭐가 더 중요합니까?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 공부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가 어떤 학교에 갔느냐 못 갔느냐, 혹은 어떤 직장에 들어갔느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내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만번 더 중요합니다.

좀 공부 못해도, 좋은 대학 못가도, 좀 부모의 양에 차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 자녀가 하나님 눈에 들면 되는 겁니다. 내 자녀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럼 내 자녀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내 자녀의 인생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주시고 그 인생 하나님께서 들어 쓰십니다. 부모님들 이것 믿으세요? 이것 못 믿으면 자녀 못 키웁니다.

  다윗을 보세요. 사무엘이 사울 대신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울 사람을 찾으러 갔을 때의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란 아이는 사람들의 눈에는 별 것 아니었어요. 심지어 부모의 눈에도 다윗은 별 것 아니었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까지 그랬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의 형들이 훨씬 나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뭐라십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 뭘 보셨어요. 다윗의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에 있는 것을 보셨어요.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단 말이죠. 그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대한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이 있었어요.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정말 정성껏 돌봤어요.

이걸 보신 겁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자라면 나의 백성을 맡길 수 있다 라는 것이지요.

  우리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 자녀들의 외모,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생겼나, 공부를 잘 하나, 어떤 대학을 갔나, 이런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셔요. 그 중심에 있는 무엇이 있나?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나 없나 이것 보시는 겁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마음이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지 이런 것을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그걸 보셨어요.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별 것 아니었지만,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을 보시고는 다윗을 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정말 성공한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 안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도 명심하고 들으세요.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에요. 내 안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겉으로 보이기에는 많은 것들이 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할지라도 정작 내 안에 하나님의 것이 없으면 난 아무 것도 아니에요. 빈껍데기일 뿐이에요.

내 안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내 안에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의미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죄성을 따르고 세상의 본성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해 집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청결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가 בר인데, 이 단어는 ברר에서 나왔습니다.

ברר는 어떤 뜻이냐 하면 '불순물이 섞이거나 합금된 것이 아닌 순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에 무언가 불순물이 섞이거나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들과 합금이 되어 버리면 그건 청결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죄의 문제라고 할 때는 이 죄라는 불순물을 빼내야 합니다. 불순종이란 이물질을 빼내야 합니다. 미움이라는 불순물, 게으름이라는 불순물, 교만이라는 불순물, 거짓이라는 불순물, 이런 불순물들을 빼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이 합금처럼 섞여있는데 이것도 빼내야 합니다. 탐욕이라는 우상, 돈이라는 우상, 나라는 우상,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사상들, 다른 이단적인 신앙들,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 우상숭배와 같은 것들 다 빼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뒤섞여 있어요. 마치 합금처럼 섞여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싹 빼내야 합니다.

  어떻게요? 녹여야죠. 용광로 아시죠? 용광로 안에 넣어서 녹여버려야 합니다. 녹여서 불순물들을 다 걸러내고, 합금처럼 섞여있던 그 쓰레기 같은 것들 다 걸러내야 합니다.

그 용광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용광로 안에 푹 잠겨야 다 녹아지고 걸러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푹 잠겨야 합니다.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보혈에 푹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불순물들이 빠지고 엉켜 붙은 것들이 녹아 없어집니다.

나의 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들어가십시오. 내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아가십시오. 낱낱이 고백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와 영적인 불순물과 엉켜 붙어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녹여달라고 빼달라고 구하십시오. 이것 없이는 안 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고 그 마음에 하나님을 가려버리는 것들이 없겠습니까? 안 생기겠어요. 똑 같아요. 다를 것 하나도 없어요. 목사인 나 역시 생활의 염려가 찾아올 때도 있고요, 미움이 생길 때도 있고 불순종과 게으름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생각이 있을 때도 있고 그런 삶을 살 때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감사하게도 성령님께서 제 마음이 힘들게 하십니다. 내 안에 무언가 가려지는 것이 생겼을 때 마음이 힘들게 하십니다. 불편하게 만드십니다. 너 이것 해결하라는 겁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을 주셔요. 그래서 저는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생활의 염려가 찾아올 때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내 마음에 사람으로 인해 어려운 마음, 서운한 마음, 미움의 마음이 찾아올 때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나 역시 연약한 인간이라 불순종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난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겨달라고 구합니다. 내 안에 있는 이 불순물들, 이 더러운 찌꺼기들을 다 녹여달라고 다 빼달라고 구합니다.

그럴 때 제 안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는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씻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 인간적인 눈이 멀게 됩니다. 그리고 대신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내 눈에 예수님의 피가 묻어야 합니다. 내 인간적인 눈에도, 내 지성적인 눈에도, 내 마음의 눈에도, 내 영적인 눈에도 예수님의 피가 묻어야 합니다. 발라져야 한다. 흠뻑 발라지고 젖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이 열립니다. 그래야 눈이 밝아져요.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세요. 누누이 말하지만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세요. 제발 좀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흐릿하고 어두운 눈으로 계속 살 것입니까? 지금 내 영적인 시력이 엉망인데 계속 그렇게 살 겁니까?

  공기가 더러워지면 공기 청정기를 사용하고, 물이 오염되면 정수기를 써서 걸러내는데 왜 나의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은 그대로 놔둡니까? 공기와 물의 오염에 대해서는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나의 영혼과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에는 너무나 소홀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정결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여러분의 마음의 밭을 기경하십시오. 호세아 10:12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내리시니라"

또한 디모데전서 4:5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냥 놔두면 굳어지게 됩니다. 마치 밭과 같아요. 그냥 놔두면 굳어지게 됩니다. 타성에 젖게 되고 습관처럼 되어 버리고 무덤덤해지고 굳어지고 딱딱해집니다. 그 안에 돌멩이들이 있는데 그 돌멩이들을 품은채로 굳어져버려요. 아주 위험해지는 겁니다.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갈아엎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여러분들의 마음의 밭을 날마다 기경하셔야 합니다. 갈아야 합니다. 뒤집어야 합니다. 때로는 힘들 수 있어요. 아플 수 있어요. 왜요? 그 안에 돌멩이들이 걸리거든요. 깊은 쓴 뿌리들이 걸리거든요. 그럼 아파요. 힘들어요. 그래서 안하고 싶어요. 그냥 놔두고 싶어요.

그러나 그럼 안돼요. 아파도 힘들어도 그 돌멩이들, 쓴 뿌리들 뽑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그대로 내 마음 가운데 남아있으면 하나님 제대로 안보입니다. 그것 그냥 가지고 있다가 굳어져버리면 정말 위험한 사람 됩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여러분들의 마음의 밭을 기경하십시오. 깊이 집어내서 끄집어내세요. 굳어진 마음 갈아엎으세요. 그래서 부들부들한 밭으로 만드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공의를 비처럼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굳은 땅은 비가 오면 그 비를 흡수하질 못해요.

그러나 뒤집어엎은 땅은 비가 오면 그 비를 다 흡수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새로운 열매들이 자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가 맺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또한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 이런 사람을 청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보고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순전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약 1:8). 그들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습니다(마 6:24).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키에르 케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Purity of Heart is to will one thing",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one thing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one thing입니다. 내 구주 예수만을 사랑하고 내 구주 예수만을 바라보고 내 구주 예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나의 one thing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을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때 우리가 누구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최고의 복 아닙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반드시 죽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인데, 이러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이 복을 못 받았다,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 복을 받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복을 다 받읍시다. 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 보면서, 또 우리 서로 보면서 즐거워하고 또 즐거워합시다.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이 복은 현세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보면 죽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마음을 볼 수 있으면 그 사람을 보는 겁니다. 아무리 얼굴을 봐도 도대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 마음을 볼 수 없으면 그 사람을 봐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지면 무엇이 보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거나 혹은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 느껴집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할 때 이 '본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안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본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무리 보면 뭐합니까? 모르는데. 알아야 보는 겁니다. 아는 것이 곧 보는 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청결하다는 뜻이 히브리어 단어 ברר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밝히 드러내신다, 밝히 보여주신다는 뜻이 있어요. 사무엘하 22:27 상반절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라는 말씀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알게 해주십니다.  이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은 그가 하나님께 택함받아 쓰임받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청결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 ברר는 '청결하다, 드러내다'라는 뜻 외에 '선택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실제로 역대상 7:40이나 9:22에 보면 이 단어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 사용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해 택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혼탁한 사람,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택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데 택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께 택함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면 그것만큼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또한 이사야 49:2에는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히브리어 ברר에 '갈고 닦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누가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요? 하나님이. 갈고 닦은 화살 무엇에 쓰게? 적을 일시에 꿰뚫을 수 있는 무기입니다.

화살이 녹슬어버리면 쏴도 별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갈고 닦은 화살은 단숨에 적을 꿰뚫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와 같다는 겁니다.

늘 나를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고 유혹하려고 하는 적을, 마귀 사탄의 계략을 단숨에 꿰뚫어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이런 힘이 있지 혼탁한 사람, 두 마음을 품은 마음은 오히려 마귀가 쏘는 불화살에 맞아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갈고 닦으셔서 적들을 단숨에 꿰뚫을 수 있는 화살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러한 복들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을 볼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도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께 택함받아 쓰임받는 이 놀라운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 다 되시길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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