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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카드를 보여주세요.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860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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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3-16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ID 카드를 보여주세요.
2009년 12월 5일 대림절 둘째 주,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5:13-16

  이스라엘에서 웬만큼 생활하다가 한국에 가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것이 몇 있습니다. 첫째, 참 복잡하고 사람 많고 바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점들이 정말 많고 먹을 것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상점이나 관공서를 가면 참 친절하다는 것이고, 넷째는 극장이나 학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도 아무런 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방을 메고 들어가는데도 검사를 안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들이 당연한 것인데 이스라엘에서 살다가 한국에 방문하면 조금 놀라게 되고 어쩔 때는 이래도 돼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살다보면 I. D. 카드를 보여줄 일이 많습니다. 히브리어로 ‘테우다 제훗’(תעודה זהות), 우리말로는 신분증을 보자고 하거나 보여주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워낙 테러에 대한 위험이 많다보니 그리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분이 확실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신분이 불확실하면 의심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ID 카드와 같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그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ID 카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ID 카드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ID 카드를 보고 내 이름이 무엇이며 언제 태어났으며, 사는 곳이 어디이며, 출신지가 어디라는 것을 알 수 있고 ID 넘버를 조회하면 나의 대한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ID 카드라고 한다면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두 가지가 우리의 I.D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 유명한 말씀이어서 왠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서 아는 것과 그렇게 삶으로서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것은 그렇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감으로서 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이 진정으로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ID 카드와 같은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참 알쏭달쏭했습니다. 알듯 모를 듯한 말씀이었습니다. 말이 어려운 것은 아닌데 그 의미가 쉽게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화학적 분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소금은 화학적으로 보면 NaCl, 즉 염화나트륨인데 이걸 분해하면 그렇게 되나? 그런데 분해하면 이미 소금이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가 먹는 소금은 염화나트륨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염화나트륨이 96%를 차지하고 나머지 4%는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 미네랄들이 함유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요즘 우리가 슈퍼에서 사 먹는 소금은 99%가 모두  염화나트륨인데, 이것은 정제한 소금이고, 원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소금에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Crystal salt이고 다른 하나는 Rock Salt, 우리가 보통 암염이라고 부르는 소금입니다. 크리스탈 소금은 왕의 소금이라고 불렸는데, 그 안에 불순물이 거의 섞여있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이 소금은 왕이나 높은 계급의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민은 락 솔트, 즉 암염을 구해서 사용했는데, 암염에는 진흙이나 다른 물질도 섞여있어 순도가 크리스탈 소금만큼 높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경우 사해가 있는데, 원래 이름은 염해, 소금 바다 아닙니까? 소금 농도가 일반 바다보다 일곱 배 이상 높습니다. 그리고 이 소금 바다가 건기가 되면 증발이 되어서 소금 결정체들이 생깁니다. 사해 인근의 물이 증발한 웅덩이나 사해 주변에 만들어진 소금 덩어리를 채취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해 주변에는 암염들이 있어서 이런 암염들도 채취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그 소금 덩어리는 순수한 소금 결정체가 아니라 다른 이물질, 즉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 또 석회, 또는 머드나 풀 찌꺼기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적당한 습기를 더해서 녹여서 이물질을 걸러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염화나트륨을 제거하고 남은 찌꺼기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찌꺼기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들을 곧장 버리지 않고 갈무리해 두었다가 예루살렘 성전에 따로 모아 놓았고, 그래서 겨울이 되어 비가 내려 뜰의 대리석이 미끄러워지면 미끄럼 방지를 위해서 맛을 잃은 소금, 즉 염화나트륨을 걸러낸 찌꺼기들을 뿌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이고, 이렇게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들은 바닥에 뿌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그렇게 해서 소금을 얻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된 겁니다.

  그리고 제가 가졌던 또 하나의 궁금증은 빛이었습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라고 하셨는데, 왜 산위에 동네가 있냐는 것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에 산동네들이 많았어요. 흔히 달동네라고 불렀는데, 산 위에 있다 보니 정말 달이 잘 보입니다. 왜 산에 집이 많았습니까? 집이 없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배산임수라는 말에서 잘 보여주는 것처럼 산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산 아래에 집을 짓습니다. 먹고 살겠다고 서울에 왔는데, 산 아래에는 집을 구할 수가 없어요. 비싸거든.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산위에다가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지요. 돈이 없으니 제대로 건축 재료를 쓰지 못하고 판자 같은 것을 많이 이용해서 지었어요. 그래서 판잣집이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달동네라는 말에는 가난했던 시절의 애환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산동네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니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되게 가난했구나. 그래서 산 아래에 집을 짓지 못하고 산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구나.'

  맞습니까? 아니지요. 그건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본 잘못된 해석이고,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상황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텔아비브처럼 평야지대에 있는 곳은 그냥 평지에 집을 짓지만 산이 있는 지역에서는 집을 산위에 짓습니다. 지금도 보면 대개의 경우 산위에 집들이 있습니다. 티베리아의 경우 산 아래보다 산 위에 고급 주택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더운 여름이 길기 때문에 산 위가 시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 해안평야가 아니라 중앙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점령했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중앙산악지대, 사마리아 산지와 유다산지를 포함하는 지역인데 산악지역이기 때문에 산이 있고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해안평야 지대로 가면 블레셋이라고 하는 강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혔던 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위가 방어하기 쉬울까요 산 아래가 좋을까요? 당연히 산 위입니다. 그래서 산악지대의 모든 중요 요새나 성읍들은 모두 산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쉐펠라 같은 평지에서도 언덕 위에 성읍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우기 때 비가 오면 중앙산악지대는 그 기반암이 석회암이고 나무가 그리 많지 않아 많은 비가 오면 금방 홍수가 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가끔 저지대가 홍수로 인해 침수되는 보도를 접하게 됩니다. 산 위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에서 홍수가 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산이지만 저지대, 즉 골짜기에는 홍수가 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산위에 집을 짓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적인 상황으로 인해 산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인데,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잘 보일까요 안보일까요? 잘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앙산악 지대는 그리 나무도 많지 않아서 잘 보입니다. 이제 저녁이 되어 집집마다 등불이 켜집니다. 잘 보일까요 안보일까요? 당연히 잘 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런 의미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해 되시지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어렸을 때 이해가 안되었던 것은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었어요. 우리말에는 말이 참 많아요. 말하는 말, 달리는 말, 바다에서 자라는 말, 가리는 말... 여기서 말씀하신 말이 무엇일까요?

  곡식을 된다는 말 들어보셨습니다. 된다는 말은 측정한다, 측량한다는 뜻 아닙니까? 곡식을 될 때, 측량할 때 쓰는 단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말입니다. 한 말, 두 말, 할 때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됫박입니다. 곡식의 양을 측정할 때 쓰는 통을 말합니다.

  등경은 무엇인지 아시지요? 등잔을 놓는 스탠드입니다. 쉬운 말로는 등잔대라고 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의 서민 가정에는 벽에 돌출된 등경, 등잔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위에 올려놓아야 빛이 멀리 갈 수 있었고 골고루 비출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요?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놓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슨 야간 민방위훈련도 아니고... 그럴 이유가 없지요. 등불은 주위를 비추기 위해 켜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잘 비출 수 있도록 등잔대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좀 길고 자세하게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했는데, 이 설명을 잘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 맛을 잃은 소금, 그래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힌다는 것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고, 등불을 켜는 이유는 됫박으로 덮어두기 위함이 아니라 등잔대 위에 두어서 집안을 환하게 밝히기 위함이다라는 의미를 이제 이해했는데,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3절 처음에 나오는 단어인 '너희는'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앞의 팔복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너희는'이란 의미입니다.

  지난 아홉 번에 걸쳐 말씀을 나누었던 것처럼 팔복은 예수님을 믿는 천국 백성들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인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말씀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팔복의 말씀처럼 그런 마음의 태도, 삶의 태도, 삶의 방향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소금인데 맛을 잃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마음의 태도, 삶의 태도, 삶의 방향을 잃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믿는다고 하는데,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심령이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도 없어요. 자신의 죄와 무능함과 연약함에 대해 애통해 함도 없어요. 다른 이들을 보면서 애통해 하며 중보 기도하는 눈물도 없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조절할 줄 아는 온유함도 없어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닮아가는 노력도 없어요.

하나님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함도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도 않아요. 긍휼, 어미의 자궁과 같은 의미인데,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맛본 자임에도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삶도 없어요. 그 마음에 이런 저런 것들로 가려져있고 섞여있어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세상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어요. 그 안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샬롬이 없기에 세상에 대해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감으로써 얻는 고난과 박해인데 그렇질 못해요.

  그렇다고 했을 때 과연 소금다운 소금이 될 수 있겠냐는 겁니다. 빛다운 빛이 될 수 있겠냐는 겁니다. 결국 이 말씀은 앞의 팔복의 말씀과 연결되는 겁니다. 우리가 팔복과 같은 마음의 태도, 삶의 태도, 삶의 방향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소금으로써 세상에 대해 맛을 내고, 진정한 빛으로써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소금이 소금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화학적으로 염화나트륨이라고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인데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빛이 빛이 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소금이십니다. 소금이 썩는 것을 방지하고 더러운 것들을 정화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9)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어둠을 쫒아냅니다. 빛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내 안에 있는 어둠이 밝혀지고 내 안에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 없이 생명 없고 예수 없이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살아계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세상의 소금다운 소금, 빛다운 빛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 혹은 소금이 되어라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건 선언입니다. 어법적으로는 직설법이면서 동시에 명령법입니다. 선언은 직설법입니다. 될꺼야, 될지도 몰라..라는 식의 애매한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명령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그러니 소금으로서의 맛을 내라. 빛으로써 빛을 비추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된 겁니다. 즉 나의 ID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각인시켜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명령하시기를 소금으로서의 맛을 잃지 않도록 하라,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지 말고 그 빛으로 사람들에게 비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어떤 예수를 믿고 있으며, 내 안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무엇입니까?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분. 맞습니다. 이것이 출발이고 기본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예수입니까? 나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분, 그리고 나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까? 맞습니다. 또 어떤 예수입니까?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그저 나를 잘 살게 해주시고 성공하게 해주시고 출세하게 해주시고 내게 복주시고 나의 안녕과 평안을 주시는 분으로만 끝난다면 나는 결코 세상의 소금다운 소금, 빛다운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예수님의 전부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 온전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무엇입니까? 예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 예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철저한 자기 부인입니다. 철저한 순종과 낮아짐입니다. 희생과 섬김과 사랑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림절인데, 예수님의 탄생을 성육신,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피조물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부인과 순종, 희생과 사랑, 그리고 낮아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성육신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할 때 십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만 십자가를 뒤로 제쳐 놓으려고 합니다. 왜요? 불편하거든요. 부담스럽거든요. 왠지 손해 보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아십니까? 십자가 없이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십자가가 없다? 그건 예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든 어떤 신을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신은 나의 안녕과 축복과 성공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 믿음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죄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믿는데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기초이고 출발점이지만,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신앙과 인격과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있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방향과 반대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자기가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거기에는 양심도 윤리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 그렇게 큰 문제 아닙니다. 남을 이용하고 속이고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세상의 가치이고 흐름입니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모습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낮아지는 겁니다. 스스로 낮아지는 겁니다. 섬기는 자가 되는 겁니다. 거꾸로 가는 겁니다. 이 말은 나의 사회적인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내 지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유명해 질 수도 있습니다. 힘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내가 취해야할 태도는 낮아지는 겁니다. 섬기는 겁니다. 즉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아지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지위가 높아질 때, 내가 유명해질 때, 내게 힘이 주어졌을 때 더욱 더 낮아져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내 지위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어진 힘이 불법을 행하고 부정을 자행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가난한 이들을 돌아봐야 하고, 내게 힘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힘에 의해 고통당하는 이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낮추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높이신다, 섬기는 자가 되라 그리하면 섬김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삶입니다.

  세상은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누어주는 겁니다. 자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청빈을 택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겁니다.

  자족이 무엇입니까? 물질에 대한 태도입니다. 나의 의식주가 해결된다면 거기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겁니다. 설사 충족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자족입니다. 이 자족은 청빈과 연결됩니다. 청빈이 무엇입니까? 한자로는 깨끗한 가난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다. 다 나누어주고 가난하게 살라는 겁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겠지만 그것까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불편하게 살라는 겁니다.

  즉 나의 월 소득이 4백만 원이다 하고 하면, 그 4백만 원 가지고 살면 편해지는데, 얼마만큼 불편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족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나의 소득을 가지고 다른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돕고, 다른 지체들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는 일에 사용하라는 겁니다. 나누라는 겁니다.

  그랬을 때 사실 나는 그만큼 불편해지는 겁니다. 50만원을 그렇게 썼다고 하면 50만원만큼 불편해지는 것이고, 백만 원을 그렇게 썼다고 하면 그만큼 불편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청빈입니다. 그런데 그 불편을 불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곧 자족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무엇입니까? 나누어주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모든 것 주신 것 아닙니까? 세상은 더 가지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삶처럼 덜 갖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주라는 겁니다.

  움켜지면 늘 모자랍니다. 4백만 원 가지고 다 쓰면 늘 부족합니다. 그 이상을 원하거든요. 늘 모자랍니다. 그러기에 인색해지고 더 욕심을 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이, 물질이 어느새 나의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그럼 십자가가 보이겠어요? 안보이죠. 그러니까 늘 기도가 뭡니까? 오늘의 20평이 내일의 30평 되게 해주고 오늘의 이백만 원이 내일의 오백만원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 기도 속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습니다. 아파트만 있고 돈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이런 기도 그만 하자는 겁니다.

  저는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물질을 잘 관리하는 사람, 내가 번 돈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는 사람, 그래서 그만큼 불편하지만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물질을 맡기신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은 은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축복으로 생각하는데 물질은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실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겁니다. 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좀 물질로 인해 쪼들려도 은사니까 주눅들 것 없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 자족하고 감사하고 조금이라도 쪼개서 남을 돕는 데 사용하면 됩니다. 부자여도 마음이 높아지지 않고 인색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의 삶, 청빈과 자족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만큼 불편해지는 건데 우리는 한층 여유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마음의 부자가 됩니다. 그러면 물질로 인해 이상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여러분의 소득보다 조금 더 불편해지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당연히 하시고 이웃 사랑하는데 사용하십시오. 주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세상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입니다. 미움과 복수의 반복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 믿는다고 할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들은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면, 세상은 늘 일등을 이야기 합니다. 일등만 기억하고 일등만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성공지상주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흐름에 거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오늘날 세상은 경쟁사회입니다. 치열한 경쟁이 있습니다. 이 경쟁에서 지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오늘의 친구는 내일의 적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기술문명은 발달하는데 점점 더 각박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공지상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경쟁사회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쟁이 목적이 되고 성공이 목적이 되면 그 안에서 윤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사라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늘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성공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경쟁이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일등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이등이 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꼴찌가 되는 훈련도 해봐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꼴찌가 되는 연습도 시켜 봐야 합니다. 늘 일등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마세요. 세상은 부끄러운 일등을 만듭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일등을 만듭니다. 세상은 일등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떳떳한 이등, 깨끗한 이등, 당당한 꼴찌들이 많아야 세상이 밝아지는 겁니다.

  이것 아십니까? 하나님은 이등이 되어보고 꼴찌가 되어본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모세가 일등이었을 때 쓰시지 않았어요. 꼴찌가 되었을 때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성공지상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성공은 우리가 예수 제대로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이 우상이 되어 버려서 그것이 하나님이 됩니다. 그럼 십자가 안보입니다. 이것 버려야 합니다. 그냥 예수 제대로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 영향력 있고 소금과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성공을 만들어주십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은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나의 삶을 통해, 나의 신앙과 인격과 삶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보는 겁니다. 세상이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금의 영향을 받아 그만큼 깨끗해지고 덜 부패해지는 겁니다.

  세상이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는 겁니다. 세상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창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창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제대로 보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과 거꾸로 가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흐름에 역행해야 합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도들이 왜 세상을 향해 소금과 빛을 역할을 잘 못합니까? 교회도, 예수 믿는 성도들도 똑 같이 세상을 쫓아가고 있거든요. 예수 믿는 것은 세상을 역행하는 것인데 그대로 따라가고 있거든요. 세상과 똑같이 갈 때 교회와 성도들은 절대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합니다. 소금이고 빛인건 맞는데,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여주는 창문이 되어야 하는데 그 창문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막고 있으니 빛이 나가질 않아요. 교회는 많아지는데 밝아지질 않아요.

  교회가 다시 사는 방법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성공지상주의라는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엘리트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축복이라는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고 성도가 성도다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을 따르고 쫒아가는 것들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친히 보여주신 자기부인, 낮아짐, 사랑과 섬김, 희생과 순종으로 다시금 채워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소금임에도 불구하고 맛을 낼 수 없어요.

내 안에 예수의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됫박으로 덮여 있어서 내 창문으로 빛이 나가질 않아요. 교회 안에 예수의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임에도 불구하고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빛을 내보내지 못하는 창문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겁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겁니다. 소금과 빛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어린아이들도 압니다. 내가 그런 소중한 존재,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과 같은 소중한 존재, 중요한 존재라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없이는, 우리가 없이는 세상은 망합니다. 세상은 더욱 더 부패하고 썩어집니다. 세상은 더 어둠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그런 세상을 덜 부패하게 만들고 나아가 깨끗하게 만들어서 살 맛 나게 만들기 위해 소금과 같은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온갖 어둠의 일을 자행하는 세상을 밝혀서 좀 부끄럽게 만들고 그래서 좀 더 밝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빛과 같은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특히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너무나도 소중한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지 마십시오. 빛은 됫박으로 덮어두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등잔대 위로 올리세요. 그래서 비추십시오. 소금의 맛을 회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 믿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로 꽉꽉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채워지고, 예수님의 보혈로 채워져서 예수님의 인격과 삶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엄청 중요한 존재입니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소금의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고 빛을 보여주는 창문이 깨끗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 ID입니다. 이 ID를 보여주십시오. 우리를 통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금의 맛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빛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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