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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이 다르다!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898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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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7-20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수준이 다르다!
2009년 12월 12일(토) 대강절 셋째 주,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5:17-20

  지난주에 소금과 빛의 의미를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었는데,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착한 행실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즉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이냐, 팔복의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인 17절부터 산상수훈이 끝나는 7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팔복의 삶을 사는 천국 백성으로서, 또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착한 행실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율법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하고 계신 겁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분위기를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후 문맥을 보면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우리와 같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미 율법에 대한 배경,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 천국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이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특히 팔복에 대해서? ‘어? 우와!’였을 겁니다. 처음에는 ‘어?’ 했을 겁니다. 왤까요?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율법의 조항을 철저하게 지켜야 천국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엄청나게 많고 어려운 조항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철저하게 지켜야 천국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린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배워왔고 들어왔고 보아왔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너무나 다른데 그 말씀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감동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다른데 정말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들으면 주눅이 들고 무겁게만 느껴졌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천국이 가깝게 느껴지고 천국이 분명하게 보여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탄사는 ‘어?’에서 ‘우와!’로 바뀐 겁니다. 그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럼 율법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그 많은 율법의 조항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데 그럼 율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신가? 이젠 그 무겁고 힘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젠 율법을 무시하고 살아도 천국에 가까워질 수 있다며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정말 율법은 의미가 없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사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이해와 천국에 대한 이해가 분명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새롭고 감동을 주는 말씀이었지만 동시에 의문을 갖게 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그리고 ‘우와!’ 그리고 ‘음... 그럼 뭐지?!’라는 느낌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마도 그들 안에서 웅성웅성하는 속삭임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다시 ‘어?’가 되었을 겁니다. ‘어? 우와! 그럼 어떻게?’에서 다시 ‘어?’가 된 것이지요. 그러한 분위기를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긴 의구심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참된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팔복의 삶과 율법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소금과 빛의 삶이 율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먼저 질문해 봅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율법을 무시하거나 준수하지 않고 혹은 폐하려 했던 분일까요, 아니면 율법을 중요시하고 준수하셨던 분이실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지키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시고 저주까지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려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4개의 유대교 종파가 있었는데,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유력한 것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그리고 이 둘 가운데서 보다 백성들의 신앙과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이들은 바리새파입니다.

  유대인, 유대교라는 말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생겨난 용어입니다.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이주정책에 따라 혼혈이 되었고,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끌려가고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남왕국 유다사람들이 주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후에 이스라엘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라는 말이 지파의 개념에서, 그리고 남왕국의 이름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더불어 이때 성전이 파괴되고 국가가 멸망당하는 와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의 존립자체가 위태해지는 상황까지 갔다는 것이지요. 포로 상황이었고, 포로에서 돌아와 보니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혼혈이 되었고, 남아 있던 많은 이들이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고 그들의 풍습을 따라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금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유대교의 태동이 된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과정을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요는 이겁니다.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다른 이방국가와 민족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시키고 하나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역사와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라는 의식이 강화되고,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된 풍속이 보다 강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할례, 안식일, 그리고 부정과 정결에 대한 계명, 우리가 아는 정결법, 코셔입니다.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이러한 풍습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방민족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율법의 조항들이 더욱 더 강조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명하신 본래의 의미보다는 구별을 위한 강조가 더 되어졌고 외적인 경건으로 치닫게 된 것이지요. 유대교가 생긴 이후부터 이러한 위험성이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유대교가 생겨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은 율법 조항의 준수에 맞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것, 할례와 안식일, 정결법, 그 중에서 특히 안식일과 정결법에 대해서는 보다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지키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에 대한 해석을 하게 되고, 이후 예수님 때까지 5세기 동안 많은 유대교 지도자, 우리가 보통 말하는 랍비들에 의해 율법 조항에 대한 해석과 추가적인 조항들이 덧붙여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율법에 대한 해석과 추가적인 조항들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두 종류의 토라를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즉 책으로 받은 성문서인 토라와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토라이며 둘 다 같은 권위가 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토라뿐 아니라 랍비들이 가르치는 토라의 해석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대교의 특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에 나오는‘장로들의 유전’이고 이후 200년이 더 지나 주후 220년경에 미쉬나로 완성되게 됩니다. 그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역시 안식일을 포함한 절기 규정, 정결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고 반대하신 것은 율법,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모세오경, 그리고 넓게는 구약성경에 대한 반대도 아니고 성경에 있는 율법의 조항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고 반대하신 것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타난 외적인 경건으로 굳어진 율법 준수, 즉 장로들의 유전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참다운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의 외식적인 경건을 책망하시고 반대하신 것입니다.

  19절이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위해 해석하고 추가적인 조항을 넣는 과정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계명의 등급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식의 등급입니다. 이러한 율법 조항에 대한 등급은 보통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 일반 윤리적인 조항들보다 앞섭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좀 덜 중요한 것은 조금 등한시하는 이른바 상황윤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조항을 지키기 위해 덜 중요한 것들이 실제적으로 무시되거나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죠? 그때 율법사가 분명히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시험했습니까?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무엇을 보여줍니까? 율법의 엄격한 준수가 결국에는 율법 조항, 계명의 중요성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상황윤리가 되고 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덜 중요한 것들이 무시되고 무관심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어라 답하십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율법사는 흡족했을 겁니다. 자신들의 분류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초점은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입니다. 단순히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면 바리새인들처럼 계명의 등급을 매기는 것이 될 것인데, 둘째도 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와 같다, 무엇과 같다는 겁니까? 첫째 되는 계명과 같다는 겁니다. 즉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으신 겁니다.

“너희는 계명의 등급을 매기면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도 하면서 정작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등한시하고 무시하고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 다 지켜야 하는 계명이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다. 모든 계명은 동일하게 중요하다.” 이 뜻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19절의 말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율법 조항의 엄격한 준수라는 이유로 계명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러면서 덜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핑계와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면서 무시하고 무관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명하시고 모세오경에서 명하신 것임으로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계명이다 라고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면서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지금 병든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고침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는 이 중요한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고 공격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역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우선순위로 두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등급을 매기면서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러면서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무시하거나 소홀하거나 상황윤리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우상숭배 금지,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은 다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돕는 것, 일주일간의 삶 가운데서 정직을 행하고 옳은 삶을 사는 것,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상황윤리가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상황윤리가 무엇입니까?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합리화입니다. 타협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자주 발생합니까?

내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섬기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세상에서 정직하고 구별되게 살고 신앙양심에 따라 사는 것 역시 그것만큼 중요합니다. 그 중요성이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을 위한 계명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똑 같이 중요성을 갖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내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6일간의 삶을 예배와 같은 삶으로 살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버는 것도 그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또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내가 내 상황에 따라 중요도를 매기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요약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동일한 우선순위를 두고 순종하고 실천해야만 우리는 상황윤리라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리 예배를 거룩하게 드렸어도 삶에서 예배와 같은 순종이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실천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건 바리새인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계하고 또 경계하시고 주의하시고 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는 한결같은 순종입니다. 내 마음대로 우선순위 정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대로 취사선택하지 마세요. 나의 상황윤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앞 절에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라고 다 이루리라”하신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폐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러실 수 없는 겁니다. 율법의 준수라는 미명아래 율법을 주신 참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이들을 책망하신 것이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려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17절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과 선지자는 율법의 계명을 포함하는 것으로 요즘 말로 하면 구약성경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이 분이 도대체 누구시길래 율법을 완성하고 성경을 완성하신다는 것일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선지자는 선지서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 안에는 많은 예언, 특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그것에 대한 성취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맞습니다. 구약의 모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단지 그것일까요?

  율법과 선지자는 모세 오경과 선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둘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율법의 계명들, 그리고 그 율법의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율법의 계명들은 단순히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법은 사람들에게 늘 부담스럽습니다. 무겁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계명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무거운 짐들을 주고는 나의 노예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의 계명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한 삶을 살라고 주신 겁니다.

  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기도 하지만 그래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진정한 나의 왕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손해배상에 대한 계명을 주셨습니까? 정직하라는 겁니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겁니다. 실수로 남에게 해를 끼쳤을 때에는 갑절로 갚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 믿는 백성의 삶이라는 겁니다.

  왜 음란을 멀리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삶을 살라는 겁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귀한 삶이기 때문이고 사람을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탐욕을 위해서 이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선대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왜 추수할 때 밭의 네 모퉁이를 남겨두라는 명령을 하십니까? 그것을 통해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의 계명들이 동일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귀한 삶을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라는 이유에서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러한 율법의 본래의 정신과 목적이 사라졌어요. 엄격한 율법의 조항만 있을 뿐이지 그 가운데 율법의 본래의 정신과 목적은 사라졌어요. 본래의 정신과 목적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은 자기 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정죄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율법의 조항을 지켜도 하나님과 가까워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지도 못합니다. 그저 나는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나는 구별되었다, 나는 거룩하다라는 자기 의만 남게 됩니다. 내가 한 겁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못마땅합니다.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러면서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무섭도록 책망하시고 저주하신 외식적인 경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행위적인 경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목적을 가르쳐주시고 율법의 참 정신을 깨닫게 해주시고 해석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정신으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잃어버리고 왜곡된 율법의 정신과 목적을 깨우쳐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신 것이 율법의 회복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율법을 완전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부터 잘 들으십시오. 유대교의 해석에 보면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냐는 질문에 대한 재미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일곱 가지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토라입니다. 토라는 단순히 모세 오경이나 법조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 계시를 말합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누구의 조언을 듣고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면 바로 토라의 조언을 듣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라는 단순한 법조항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에 보면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 바로 토라입니다. 사도 요한이 유대교의 그러한 해석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즉 태초에 토라가 계셨고, 이 토라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토라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창조되었는데, 토라이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메시아, 곧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훨씬 더 잘 이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왜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분이신가의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토라이십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십니다. 완전하신 말씀이십니다. 완전하신 토라이십니다. 완전하신 말씀, 완전하신 토라이신 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요? 율법, 토라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말은 율법의 의미와 정신, 목적을 회복시키는 차원을 뛰어넘어 율법이 완전해지는 차원까지 가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의 참 의미와 정신을 깨닫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예수님으로 내 안이 가득 채워지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 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입니다. 컵 안에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내가 가득 차 있으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토라이신 예수님이 들어와서 계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랬을 때 내가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렵습니다. 설령 내가 말씀의 계명들을 지켰다할지라도 그것은 조항을 지킨 것이지 그 정신에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안에 내가 빠져나가고 혹은 예수님 아닌 다른 것들이 빠져나가고 예수님으로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내 안은 말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완전한 토라,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냐? 말씀이 분명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겁니다.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아지고 그 말씀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킬 때, 순종할 때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말씀을 깨닫고 지킬 때마다 나는 더욱 더 말씀이신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닮아간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나타나는 의를 말하는 겁니다. 윤리적인 의를 말하는 겁니다. 순종의 의를 말하는 겁니다. 신앙양심의 의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비교대상이 누구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최고라고 자부했던 사람들과 비교하시면서 그들의 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으응?!’ 놀랬을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만 보면 괜히 주눅이 들고 죄인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보다, 그들의 수준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의의 수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어지는 21절부터의 말씀입니다. 그것 하나 하나를 보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의미에서 의의 수준을 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의가 세상 사람들의 윤리적인 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뛰어넘는 의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무시를 당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의의 수준이 사회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인격과 삶과 윤리도덕의 수준이 사회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를 게 없습니다. 달라야 하는데 다르지 못하다, 거기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기대하며 영적, 도덕적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수준이 세상의 수준을 뛰어넘을 때, 그것이 곧 세상을 밝게 하고 고치고 치료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을 때, 그것이 곧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람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영향력이 되고 진정한 리더십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세상이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의의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인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너무 버겁습니까? 부담되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셨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순종하지 못하느냐? 왜 내게 순종의 삶이 없는가, 왜 내게 순종의 능력이 없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왭니까? 내 안에 내가 가득 차 있거든요. 혹은 내가 너무 많아. 그러니까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인격적인 주님께서는 나를 억지로 밀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인격적이다 그것은 나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내가 참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래서 내 마음과 삶의 한 가운데로 초청하고, 내가 주인 된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나로 가득차고 예수님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 찬 내 마음을 비워낼 때, 그 때 예수님으로 내가 채워지고, 그럴 때 말씀이 깨달아지고,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 말씀을 행할 것인지도 알게 되는 겁니다.

  왜요? 완전하신 토라, 완전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내 안이 채워지는데 당연히 그렇게 되지요. 그렇게 예수님으로 채워지면 말씀을 행할 힘도, 순종의 능력도 주어지고 되고, 그럴 때 나의 인격과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어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의가 나타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고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내 안을 채우는 겁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세요. 자꾸만 주인 되려고 하는 나를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세요. 내가 주인 되려고 한다, 다른 것 아니에요. 말씀 앞에서 내 맘대로 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 욕심대로 하려고 하는 겁니다. 말씀보다 내 고집, 내 경험,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나를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예수님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들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탐심이에요. 우상숭배에요. 돈에 대한 탐심이에요. 회개하지 않은 죄입니다. 음란입니다. 불순종입니다. 자기 합리화이고 타협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미신적인 생각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몰아내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순종하세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런 것들을 다 십자가 위에 못 박으세요.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채워지면, 말씀이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내 안에서 말씀이 완전해지는 겁니다. 내 인격과 삶에서 말씀이 점점 더 완전해 지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내 심령을 채우고 내 인격과 삶을 채우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으로, 또한 그분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내가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내가 살아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요청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완전하신 토라,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을 뛰어넘는 의, 세상 사람들을 뛰어넘는 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채워질 때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온전해 지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오늘 말씀처럼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열망들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나를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채우길 원하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내 인격과 삶으로 살아내기를 열망하는 뜨거운 소원을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부어 주시길 축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이요 신앙생활과 삶의 목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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