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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kjeddh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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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지키게 하는 비결
-지상명령에서 영성훈련이 갖는 중요성-
지상명령의 과정과 방법은 최선의 교육(훈련) 체계를 담고 있다. 최선의 스승이신 예수께서 선생으로서 보이시고 남기신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가장 중요한 일의 가장 중요한 수행 방법이다. 그는 ‘가서’ 복음을 전하여 위로부터 오는 새 생명을 갖게 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 들어가는 세례(침례)를 주도록 하며, 주님이 친히 가르치신 모든 말씀들을 가르쳐서 삶의 실존 속에서 온전히 지키며 살게 하는 훈련을 과정으로, 방법으로 주셨다. 따라서 지상명령은 이러한 것들을 자신의 삶의 체계와 실존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제자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먼저 수행될 수 있다. 사실, 제자도가 없는, 예수를 자신의 선생으로 믿고 자신을 그의 도제로 인정하여 예수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일은 부담스러운 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훈련(영성훈련, 혹은 경건훈련)이라는 쉽고 가벼운 멍에(마 11:27)를 선택하여 강하고 확고한 계획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화를 위한 비전을 이루게 하셨다. 이것이 신앙인 누구나가 (제자가)되어야 하고 (제자가)되도록 해야 하는 필수와 필요의 명제이건만 이젠 소수의 선택으로 남겨진 느낌이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주님의 육성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인생 꿈이라는 걸 알텐데 말이다. 그러니 나부터 제자도를 가지고 제자가 되고 제자를 삼는 일에 뛰어들어 살다가 그대로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내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주야로 묵상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의식화될 때까지, 혹은 말씀의 양식이 무의식을 점령하여 무심코 있을 때 조차도 나를 형성하도록 빠져들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실체가 가만히 있어도 느껴질 때까지 전인을 다하여 변화(갱신)시킬 수 있도록 사람의 전 인격구조를 내면에서 부터 물들여 가는 과정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내면의 성품과 우선순위를 바꾸어 주시는 마음의 변화에서 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한 번에 한걸음씩 성실하게 수행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희망적이다. 물론 진심으로 노력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과 실체가 주는 능력이 이를 충분히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율법적이 되거나 고되고 지치게 만들지 않는다는 데서 즐거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차츰 익혀 가다보면 비가 줄기차게 오는 날 강가에서 수영하며 마셔보던 빗물보다 더 거세게 몰아쳐 오는 내외적인 생명수 샘물의 진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보통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는 적어도 마음(심령 spirit, 의지 will), 정신 mind(사고, 감정), 몸(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는 힘), 사회적 관계(타인과 관계를 맺도록 구성된 요소), 영혼(나머지 전 요소를 통합하는 요소)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은 중앙에서 삶을 좌우하는 지휘관으로서 결정을 내리는 요소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선택한다. 정신은 사고하고 상상도하고 이해도하며 느끼는 부분이다. ‘몸’은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고 주위환경으로 부터 자극과 영향을 받는 감각을 지닌다. ‘몸’은 마음의 선택을 따른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다(고전 6:19,20). ‘사회적 관계’는 타인과 맺는 사랑의 삶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회적 관계의 질은 나머지 영역(선택, 내적 사고와 감정, 몸에 대한 감정, 심지어 행동까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영혼’은 전 인격이다. 이것은 나머지 모든 요소(마음, 정신, 몸, 사회적 관계)를 하나로 연결해서 개인의 삶을 완성한다. 휴대폰의 칩을 마음이라 하고, 회로를 정신이라 하고, 케이스를 몸이라 하면 사회적 관계는 통신 가능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다른 요소들처럼 변화되어야 하는데, 영혼을 변화할 힘은 마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의도할 때는 이 모든 요소가 하나님과 한 방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떠나 사는 삶에서 이미 만연된 제 각각의 방향과 혼란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죄인의 삶은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내고(롬 1:19,20), 스스로 주인 되려 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정신은 고장이 나있고 마음과 정신은 기가 막힌 방법으로 사람이 신이라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었다. 타고난 교만과 자기중심성은 자아를 우상으로 만들었다. 감정은 파괴되어 갈등과 싸움이 스스로의 속에서 부터 흘러나온다. 이젠 보이는 몸을 숭배하거나, 몸의 감각을 최우선시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하나님을 낯설게 느끼고 자기 숭배에 빠진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분리로 끝났다(롬 1:28-32).
그러니 선한 의지만으로도 변화를 말하기 어렵고, 마음이 있지만 육신이 약하기도 한 것이다. 마음의 지휘권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에 의해서 새로운 구조의 변경이 일어나며, 방향이 재구성된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도록 정신과 몸과 사회적 관계와 영혼이 변화된다. 이러한 변화의 시도를 영성개발이라 하고, 이것을 통하여 인간의 다섯 가지 요소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걸음이 자기부인이다. 자아의 부인처럼 가장 생산적이고 진실한 삶의 양식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비전을 갖는 것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려는 뜻을 세우는 것, 그리고 비전을 성취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주신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1. 변화의 좌소인 마음 먼저 바꾸기
마음(heart)은 생명의 근원이다(잠 4:23). 마음먹기에 따라 생사가 좌우된다. 그만큼 마음은 바로 그 사람의 본질의 모습이다. 마음은 내가 내린 결정과 경험으로 만들어져 간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은 나를 만들어가고, 세상을 만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나의 모습이나 나의 인생이나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하고 마음먹은 내 마음의 결과이다. 마음이 중요하기에 주님도 사람을 대하실 때 마음을 먼저 다루셨다. 그분의 작전 지휘본부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즉, 마음의 신념과 가치관, 믿음, 생각, 감정, 습관들을 먼저 다루시는 마음 공사의 전문가셨다. 마음의 혁신과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신 것이다. ‘회개하라’, ‘믿음을 가지라’ 는 말씀이나, 영적 생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거나,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나, 좋은 나무여야 좋은 열매가 맺는 다는 것들이 모두 그런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명이 자리하도록 예수를 신뢰하고 그를 중심에 모시는 일이 급선무이며,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영원한 그리스도 패션(행동)을 걸치고(롬 13:14), 삶이나 인격의 요소요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갈 4:19) 이미 존재하는 그를 통한 새 생명이 주도하는 은혜의 떠받침을 받아, 성령의 치밀한 관리와 수술로 자아의 내면을 구성하는 성품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정체성의 변화는 살면서 만나는 난관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그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천지만물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면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순복’이다. 머리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자아의 중심인 마음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희망이나 열정이 거의 거의 없더라도 해야 하는 과정이다. 세 번째는 ‘위탁’이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선한 계획을 이루실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복하는 것이다. 이때는 자주 그분의 은혜를 반복해서 간절히 구해야 한다. 네 번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탁한 결과로 주어지는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 인생의 몫을 인정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영이 고르게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렘 29:11). 그리고 마지막은 만족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게 된다. 이젠 아무리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서 조차 초월적인 힘을 발휘해서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갈 2:20).
이때 필요한 마음의 훈련이 곧 영성훈련의 일반적인 내용이다. 말씀과 성령이 마음을 사로잡게 하여,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에 쌓였던 파괴적인 감정들이 사라지고, 의지를 지배하여 생각을 고쳐나간다. 이것들을 질서화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고독 및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단둘이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서서히 자신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지를 혁신시키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음식을 끊고 하나님 앞에 있으면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면서 ‘경배’를 드린다. 하나님 속에 빠져 보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재능과 자원과 시간을 드리는 사심 없는 시간을 가지면서 교만과 질투와 분노들이 사라지고 자족과 기쁨과 만족한 영으로 새로워지는 ‘봉사’에 자신을 드린다.
2. 사고(생각)를 바꾸기
하나님을 떠나려는 최초의 시도는 사고에서 시작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노력도 사고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신이 머물 곳을 선택할 자유와 힘이 우리에게 있으며, 복음의 목적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10:4,5). 성숙의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영역도 바로 사고의 영역이다(롬 15:5,6).
마음을 움직이는 사고는 네 가지 유기적인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곧 관념, 이미지, 정보, 지성이다. 개인들이 갖고 있는 ‘관념체계’는 어릴 때부터 개인의 경험, 타인의 가르침, 가족과 공동체의 행동을 보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형성된다. 그 사고, 즉 관념체계를 발견하여 악한 것은 선한(주님의 것)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지’란 추상적인 관념과 달리 항상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관념 체계는 이미지 또는 영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관념과 이미지는 하나님의 목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탄의 노력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념과 이미지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정보’란 생각에 힘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정보는 영혼을 살리며 생명력을 넘치게 한다. 주님의 복음이 바로 그랬다. 그리고 ‘지성’이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힘으로서 작용한다. 성경과 순수한 이성이 확신을 주는, 그래서 양심이 살아있게 하는 진리에의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조건 사랑받고 있다는 관념, 하나님의 사랑의 이미지로서의 십자가, 영이요 생명인 참된 진리의 정보로서의 성경, 그리고 그 정보가 사고력의 원천이 되어 완전한 선을 향해 나가도록 하는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사물에 관한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생각으로서의 관념, 관념을 전달하는 말과 그림이나 노래로서의 이미지,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서의 정보, 그리고 관념과 이미지와 정보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지성이 사고를 변화시키는 영역에서 만난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영성 훈련이 성경암송이다. 성경 암송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로 결심하고 실행하여 삶의 기반을 그곳에 올려놓으면 생각의 혁신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학습활동을 좀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지성적인 성경공부 방법을 시도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이콘과 음악을 경건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모든 곳곳에 아이콘을 성경적인 것(그림, 격언, 바탕그림, 이미지)으로 바꾸고, 사고력을 높일 수 있는 음악과 노랫말을 생각에 담아 진리와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건전한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것이 유익하다. 설교나 성경말씀을 녹음에 담아 듣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이다. 분별력 있게 듣고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멘토를 두고 만나 인생과 영성의 동반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자서전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삶을 그대로 경험하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렉치오 디비나).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3. 감정 바꾸기
뻔뻔한 본성 때문에 감정은 영성개발의 핵심이다. 파괴된 감정의 영향력은 죽고, 건강한 감정은 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정욕과 욕망이 함께 죽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소망의 메시지를 준다(갈 5:24). 삶의 필수요소로서의 감정을 좋은 삶의 필수요소로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감정, 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감정을 갖기 위하여 훈련이 필요하다. 감정은 결코 순식간에 변화되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와 가치관이 안정되고 하나님의 질서를 찾을 때라야 가능해지는 노력의 산물이다.
감정(분노, 공포, 식욕, 성적 충동, 미모에 대한 욕망, 상처에 대한 반응 등)에 지배 받고 있는 사람은 감정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감정에는 저항하고 어떤 감정에는 완전히 몸을 맡긴다. 그런가하면 파괴적인 감정을 부정하거나 타인에게 퍼뜨리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모두 무익한 감정 처리이다. 그러나 어떤 감정의 결과를 피하려하기 보다 그 근원(죄)을 멀리 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대책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파괴적이거나 잘못된 감정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 지금은 느낄 수 없더라도 건설적이거나 선한 감정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는 일로 발전해야 한다. 그곳에서 부터 감정의 근원이 조성되어 감정의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실제로 잘못된 감정의 원인을 제거하면 건강한 감정이 살아난다. 죄의 상태를 경건한 생활과 건강한 감정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여기 있다. 만일 평화를 느끼고 싶다면 내면의 깊은 곳에 평화의 근원을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감정의 혁신성과이다.
성경에서 배우는 건강하고 건설적인 감정을 낳는 주요한 조건은 믿음, 소망, 사랑, 기쁨, 화평이다(갈 5;22;고전 13:13). ‘믿음’은 실재에 뿌리는 내리는 자신감이다(고전 3:11). 그리스도인의 실재인 그리스도에게 인격과 삶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 대한 기대이다(히 11:1). 이것은 약속에 근거한 실제적 실존을 미리 적용시키는 것이지만, 현재에 그대로 적용된다(롬 5:2-5). 그리스도와 말씀에 두는 든든한 믿음과 희망찬 소망의 감정은 아름답게 피어오를 수 있다. ‘사랑’은 타인을 위해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요일 14:17). 최고의 계명은 거기서 시작되었고,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내면에 그 삶의 감정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그 곳엔 두려움이 없다(요일 4:18). ‘기쁨’은 안녕에 대한 깊은 확신에서 온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실제 속에서 사셨다(요 15:11). 바울도 그 실체는 환경과 무관하게 경험하였다(빌 4:11). 환경을 모두 걷어내고 기뻐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작용한 것이다. ‘화평’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다. 이는 문제를 주인이신 하나님께 내려놓고 더 이상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을 때 흘러나오는 샘물 같은 것이다. 염려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하는 사람, 화평 자체이신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의 사람이 경험하는 특권의 산물이다(빌 4:6,7;롬 5:1,2;15:13).
인격의 내면과 생활 속에서 사랑, 기쁨, 화평 등이 흐르는 감정의 혁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살고자 하는 뜻과 의지가 일상에 촉촉이 스며들어야 한다. 그것은 파괴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근원과 조건을 철거하고 그곳에 이러한 좋은 감정들을 재건하면 된다. 먼저는 파괴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내면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음 깊이 품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 그 파괴적인 감정들에(이름) 대해서 분석하고 그 영향력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나타난다. 그 감정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찾아 묵상하면서 영혼 속에 박히도록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다(사랑-롬 8:29-39/기쁨-요 15:9-17/화평-빌 4:4-9). 그러면서 서서히 변화되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일기로 쓰면서 파괴적인 감정이 뿌리내리고 있는 관념, 이미지, 과거의 사건 등이 떠오르면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는 시간을 갖는다. 이제는 그 근원의 조건을 사랑과 기쁨과 화평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관계나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그런 감정들을 살려나가면 내 안에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가 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성령께서 내면 중심에서 그런 감정들로 넘쳐나게 하실 것이다.
4. 몸 바꾸기
예수를 닮으려면 몸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여기는 일이 중요하다. 몸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며, 소중하게 여기고 적절하게 보살펴야 한다. 선하게 창조하신 우리의 몸에 성령을 보내시어 영적인 성육신을 이루도록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말이다(롬 8:11). 우리의 마음, 사고와 감정뿐만 아니라 몸도 하나님께 헌신하여 그를 닮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에 속한 삶은 몸을 가지고 스스로의 왕국을 세우려한다. 온갖 유혹(혀의 오용, 신체적 학대, 탐식 및 거식, 불규칙한 생활, 섹 스 등)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자기 몸을 기쁨의 원천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육체적 욕망은 타인에게 까지 확장되어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 자신의 욕망이 충돌하여 파괴적인 감정으로 표출되게 된다. 결국 사회악을 조장하는 것으로 파급된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육체를 성령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데서 출발한다.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고전 6:16-20).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고후 6:14). 그리스도의 뜻과 타인의 뜻이 충돌할 때에 전자를 택한다(수 24:5). 결국 건설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그의 몸짓이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를 낳는 주요 힘이 된다. 그러다보니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몸을 존중하게 된다.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이 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몸이 되는 것이다(고전 6:20). 그렇게 사는 사람의 몸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된다(롬 12:1).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몸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 마음으로도 그 비전을 좆겠다는 뜻을 세우고 몸에 여전히 살아 붙어있는 죄를 떼 내는 일을 직시해야 한다(롬 7:23). 죄의 뿌리가 박혀 있는 육신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몸을 숭배하는데서 벗어나야 한다. 몸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데서 손을 떼고 하나님의 목적과 타인을 섬기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오용을 피하는 것이다. 육욕의 만족을 위하여 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며,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몸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섹시하게 보이고, 몸을 자랑하는). 과로는 신종 마약과 같이 취급된다. 지나친 승부근성과 경쟁심의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다.(시 127:2).
몸을 관리하는 일 중의 또 하나는 몸을 적절하게 존중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고전6:12-20을 읽고 몸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의 의미를 찾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짐으로 진정한 안식의 시간을 몸에게 준다. 이를 위해서 중요한 영성훈련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하여 몸과 반대방향으로 나갈 수가 있다. 휴식과 수면은 좋은 침묵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첫 걸음이다. 이렇게 속사람을 단장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잘 관리하는 일이다(벧전 3:3,4). 몸을 숭배하거나 오용하지 않고 그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보살피는 것은 몸에 대한 적절한 예의요 바른 길이다.
그리고 몸을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스스로 조용한 시간을 찾아 몸과 관련된 문제들을 점검하고, 몸과 관련된 구절을 묵상하고(롬 6-8장; 고전 6:12-20), 자신의 몸의 각 기관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우고, 그 목적에 따라 사용해 달라고 간청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목적에 적극적으로 헌신한다(롬 6장).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찬양하고(시 14-150편을 즐겁게 낭송하거나 관련 찬송을 온몸을 다해 드린다),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 지체와 이 사실을 나눈다. 이러한 일들을 정기적으로 하기 위하여 매주 혹은 매월 피정을 떠나보는 것도 아주 실속이 있는 관리가 된다.
5. 사회관계의 변화
삶에 관한 것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을 생각할 때 반드시 타인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인관계의 질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일이 잘되고 있는데 대인관계가 엉망이라면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사회적 관계 안에 두신 사람과는 상호 불가분리적 관계를 맺고 살게 되어있다. 서로의 삶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의 유익을 위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다. 어느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의 Unbutu는 ‘우리가 존재하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 즉 영혼은 타인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한 위격, 한 본질이다(요 17:20-2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또한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창 1:26,27). 독립된 개별적인 존재인 동시에 타인에 의해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사회적 차원-가 형성되는 존재인 것이다.
대부분 대인관계를 파괴하는 행동은 ‘폭력’과 ‘단절’이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가하거나, 대인관계를 단절하고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타인의 행복을 해치는 행동으로서의 ‘폭력’과 타인의 행복과 안녕에 무관심 또는 경멸로서의 ‘단절’의 악한 힘을 단절하려면 영성개발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적)죄의 힘을 극복하고 풍성한 공동체를 누리도록 그리스도께서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 알아보고 고쳐나가야 한다. 사실, 모든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유일하게 스스로 충족한 참된 사회인 성부, 성자, 성령과 연결되지 않으면 파괴될 운명에 처해있다. 모든 깨진 관계는 삼위일체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그(삼위일체) 안에 뿌리를 내려야만 각자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온전케 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귀면서 성장하고 정체성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서히 마음, 사고, 감정, 몸의 혁신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다시 대인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인격의 혁신과 관계의 혁신은 상호의존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경험하시는 사랑과 일치가 이제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넘쳐 대인관계까지 흘러 들어간다. 이렇게 우리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요일 4:15,16). 우리 공동체의 질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공동체(성부, 성자, 성령)와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시작은 가족이다. 가족들과의 폭력과 단절의 악한 성향을 끊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권능에 의지하여 새로운 관계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골 3:3), 그리스도의 새로운 정체성을 입고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것과,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매일 되새기면서 자신에게 경험된 잘못된 대인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삶은 온전하고 복되다고 선포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을 치장하려는 가면을 벗어 던지는 일이다. 정직한 자세를 추구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멀리해야 한다. 자기 합리화나 기만 또는 방어나 조작들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인정받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삶을 낭비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예’와 ‘아니오’로 대답하는 단순성과 정직성을 보일 결심을 해야 한다(엡 4:15). 그 다음 행해야하는 것이 참 사랑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 속에서 가식이 사라진다는 말이다(롬 12:9-21).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자신을 담그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것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자기 방어와 자기 보호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삶을 바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타인을 섬길 축복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참 사랑이 다스리는 가족이 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나는 거짓 없는 사랑을 베푼다. 온 힘을 다 하여 악을 멀리하고 선을 굳게 잡는다. 깊이 사랑하는 친구가 된다. 시련이 올 때 포기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기도한다. 궁핍한 그리스도인을 돕는다. 창의적으로 사람들을 환대한다.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한다.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한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운다. 서로 한 마음으로 지낸다. 비천한 사람과 친구가 된다. 잘난 체하지 않는다. 반격하지 않는다. 사람의 장점을 주목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롬 12:9-11’).
6. 영혼 변화시키기
영혼은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영혼 안에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삶 속에 실재하는 힘인 영혼에 의해 사람의 각 요소는 결성된다. 삶을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영속적이고 비물질적인 중추로서의 영혼이 인정되어야 활력과 자의식을 주는 자아를 초월하는 힘이 솟아나고 살맛이 난다. 시편 1편의 사람처럼 영혼의 책을 읽고 존재의 방향을 이끄는 북극성인 말씀을 따라 산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맛과 멋을 느끼며 잘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영혼을 부정하는 사람은 로마서 1장의 사람과 같다. 영혼은 미친 듯 날뛰고 삶은 혼란에 빠진다. 육체의 습관과 소욕에 자신을 맡기고 산다. 영혼이 자아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몸부림 속에 갇혀 있다.
영혼은 여러 가지 파일을 갖고 있다. 사고 파일은 삶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으며, 감정 파일은 삶에 대한 느낌을 담고 있고, 신체 파일은 행실에 대한 내용을, 마음 파일은 선택에 대한 내용을, 관계 파일은 대인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혼의 임무는 이 정보를 가지고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문제는 각 파일 내용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성장하고 협력하지 못하면 영혼은 삶의 균형을 잃는다. 그러나 변화된 영혼은 이런 요소의 불일치 또는 부조화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율법 아래서 정연하다. 그것은 자아의 다양한 차원(마음, 사고, 감정, 몸, 사회적 관계)을 밀접하게 결합시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헌신하는 온전한 삶을 형성한다.
이제 그 변화를 위하여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바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혼에 대한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다(시 42:1,2). 영혼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중심이다. 나아가 영혼을 돌보는 책임을 진다. 가능하면 선생을 만나서 배우는 것이 좋다. 거기에 기꺼이 그리스도의 쉬운 멍에를 메는 것이다(마 11:28-30). 이것은 결코 지루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힘과 우리의 힘을 합치는 일로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벧전 5:6,7).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문을 작성해서 읽어보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평안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 열심히 노력하되 결과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실 때 그분의 품속에서 쉬기만 하면 된다. 영혼이 모든 염려에서 벗어난 깊은 안식을 누린다(빌 4:6,7).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공부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을 해야 한다(시 119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행사와 책임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얻고, 생기를 받으며, 방향을 알고 인도된다. 기꺼이 순종함으로 실천할 때 영혼의 안식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닮는 영성을 개발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전인격은 우리와 성령님의 협력 아래서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발전하고 변화되어 간다. 비로소 마음과 사고와 감정과 몸과 사회적 관계와 영혼이 옳고 질서 있고 활기차고 평화로운 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인적인 구조와 체제가 영성훈련을 통하여 만들어져 가는 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된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란 제자도를 가장 중요한 삶의 심장으로 여기고, 자신이 먼저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가르침을 받고 삶에 실천하는 영성훈련을 철저히 행해나가면서, 가서 세례를 주고 지키게 하라는 말씀 그대로 또 다른 사람을 찾아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지상명령의 순종을 위해서는 영성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영성훈련이 있어야 지상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는 일까지 가능하게 된다. 이 두 요소는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로서 하나는 지상명령의 장을 마련해주고, 하나는 지상명령의 방법을 가능하게 해준다.
제자훈련의 과정 중에 반드시 있어야 할 커리큘럼에 고독, 침묵, 금식, 예배(경배), 봉사, 성경공부, 암송, 말씀듣기, 찬양, 신성한 독서(렉치오 디비나), 믿음, 소망, 사랑, 기쁨, 화평, 몸의 재배치, 은밀성, 단순성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재미난 영적인 일을 누가 마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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