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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출1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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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태환 목사 |
| 참고 : | 2003.13.2006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http://web.firstkoreanchurch.org/ |
출11장 1-10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출11장 1-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2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 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6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사를 더하리라 하셨고 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사를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바로가 모세에게 마지막 한 말은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이었습니다. 가끔 속된 말이지만 우리도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그 말은 대부분의 경우 사실이 아닙니다. 그냥 상대방이 미우니까 과장해서 해 본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는 애굽에서 신적인 존재입니다. 바로가 마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모세 하나 죽이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모세는 힘이 넘치는 젊은이도 아니고 80 살이나 된 노인입니다. 이런 힘 없는 노인 하나 쯤 바로는 손 끝 하나 대지 않고 죽일 수 있습니다. 40년 전에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모세는 바로의 눈을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그 때도 바로는 모세를 죽이겠다고 찾았습니다. NLT 성경에는 바로와 모세의 마지막 대화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ever let me see you again! The day you do, you will die!" "Very well, I will never see you again."
모세의 이런 담대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자기를 죽이겠다는 바로 앞에서 모세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담대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저는 바로 앞에서의 모세의 여유를 “사명자의 여유”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모세는 이미 내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정말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지금까지 9번의 재앙을 통해서 생생하게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애굽에 내린 이 재앙들이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아, 그렇다면, 내게 주신 사명을 모두 성취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보호하시겠구나!” 모세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명자의 여유 아닙니까? 모세의 담대함은 이 사명자의 여유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성경에서 온 것임을 압니다. 복음서를 주의해서 읽어 본 사람들은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한복음 7:30).”이런 말씀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들 일어나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쫓아 냈습니다. 이들은 마을이 세워진 언덕의 벼랑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밑으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갈 길을 가셨습니다(누가복음 4:29-30).” 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칠 수가 없었습니까? 아직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모두 성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사람이 자기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1절)” 자, 이 말씀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항상 똑 같은 패턴으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나 여호와가 이 모든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을 심어 주었고,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바로에게 내릴 “한 가지 재앙(just one more di saster)”이 더 남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재앙이 내린 후에 바로는 이스라엘 벡성들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 마지막 남은 한가지 재앙이 엄청난 재앙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한가지 재앙이 바로와 애굽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재앙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마지막 한 가지 재앙 앞에서 고집 센 바로는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지막 한 가지 재앙은 4-5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이 마지막 한가지 재앙은 신기하게도 장자들만 골라서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무슨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닙니다. 전염병이라면 어떻게 장자들만, 맏아들에게만 골라서 병이 들겠습니까? 그리고 가축에게도 똑 같은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마지막 재앙 앞에서는 지위 고하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바로의 장자에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장자만 죽게 하셨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장자는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출애굽기 13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2절).”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실 때도 처음 난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출애굽기 34:19)”
장자는 대표성을 띤 것입니다. 장자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은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처음 난 것들을 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 헌금도 그렇습니다. 10개 중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은 나머지 아홉도 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 고쳐야 합니다. 결국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십일조 헌금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나의 것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도 해당되고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장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입기 위하여 바쳐진 장자인 것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진노를 위하여 바쳐진 장자입니다. 여기에도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은 장차 하나님께 은혜의 부르심을 입을 모든 나라들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애굽은 하나님의 진노를 위하여 바쳐진 나라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면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표성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알아야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3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는 규례를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 새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代贖)하나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13-16절).”
이 말씀에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속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애굽의 장자들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살았거든요?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체험했던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굽 사람들의 집에서 통곡소리가 납니다. 장자들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집에서는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집에도 장자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그 시간에 장자를 품에 꼭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 눈을 바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애야, 이 통곡소리가 들리느냐? 이날 밤에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치셨단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한 거야!” 그래서 하나님은 해마다 무교절이 되면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장자를 위한 대속을 하게 하셨습니다. 장자의 생명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장자를 대신해서 다른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분들에게는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이스라엘에게 주신 대속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 참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살고, 그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 때에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구별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6-7절에 있습니다.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처음 난 것들이 죽은 애굽 사람들의 마을에서는 큰 곡성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에서는 개 한 마리 짖는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을 이렇게 철저하게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 말씀에서 보십니까?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진 장자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대속하신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그 말씀이 고린도전서 6:19-20에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 밤에 생명을 구했던 이스라엘의 장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해마다 장자를 대속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가 어떻든지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여러분의 생애 위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지 않습니까? 이 한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지 않습니까?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이 한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당당한 기품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베드로전서 2:9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status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아시겠습니까?
학자들은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때를 A.D. 64 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의 로마 영토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낯선 타문화권 속에 들어와서 생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보낸 편지를 그들은 돌려 읽었습니다. 이 편지 속에 이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구별하여 세우신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은 하나님께 인도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 이 말씀이 쉬운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좋아하게 만드셨습니다. 파 라오의 신하들과 이집트 백성들은 이미 모세를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NLT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the LORD had caused the Egyptians to look favorably on the people of I srael, and Moses was considered a very great man in the land of Egypt. He was respected by Pharaoh's officials and the Egyptian people alike.” 모세가 애굽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람으로 심히 크게 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모세에게서 하나님을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빼고 모세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는 단지 힘없는 80세 된 노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을 때, 모세는 위대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능력을 드러낼 도구로 사용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크고 위대한 사람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높아지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 힘쓴 결과 마침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고,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명성을 얻게 해 주시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세 이야기이고, 이제는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하나님을 뺀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아야 합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빼고 나서도 많은 것이 남는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그들에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말씀이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의 임무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이 말씀을 깨닫도록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서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 중심으로 중심을 이동하게 되면,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 받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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