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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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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4-18 http://www.yullin.org |
기도하려면 용서하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11:25).
I. 본문해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에 관해 가르쳐주시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에서 먼저 믿음이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꾸짖으심으로 말라버린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기이히 여기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만약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리라 하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1:23). 그 후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기도에서 믿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기도의 이런 놀라운 영적 특성들은 기도의 성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입니다.
II. 영적 교통과 기도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 세계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자연과 우주 속에 수많은 사물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데, 이러한 모든 힘의 작용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 세계의 어떤 사물과 섞여 존재하실 수 없지만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으니,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 스스로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결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볼 때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인간의 영혼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시는 훌륭한 방편을 두 가지 주셨습니다. 바로 ‘진리의 말씀’과 ‘기도의 교통’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객관적인 지식과 사실들을 가르쳐주지만, 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성령의 훌륭한 도구입니다. 곧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영혼과 전 인격 안에서 경험하도록 만들어주고, 나의 삶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석하게 해 주는 훌륭한 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차라리 지식이 많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조금 배운 것을 붙잡고 많이 기도하는 사림이 기독교의 참된 본질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지식, 의지, 감정 한 곳에 있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앎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같이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특성이 무시되는 때는 더욱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실체인 경건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감각으로 확신하게 될 때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심해도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교통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게 하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 주시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게 되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의 교통 속에서 경험하고 그 앞에 깨뜨려 질수록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남아 있으나 전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은 마치 김장철에 절이지 않은 배추와 같이 됩니다. 기도를 통해 은혜의 물에 지식이 잠길 때라야 하나님이 그 지식을 쓰실 수 있고, 그것이 이웃과 지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봉사할 수 있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 지식이 참된 진가를 발휘하고 그 지식 때문에 여러분 삶이 빛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 신앙의 경건의 능력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명심할 것은 항상 우리의 기준은 세상의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상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뜻과 반대를 향하여 갑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밤중에도 돛을 높이 올리고 노를 젓는 뱃사공은 출렁거리는 물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별자리를 보고 나아가는 법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시대를 바라볼 때 그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함께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께서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 마음속에 각인시켜 주시기를 구해야만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는 죽었다고 말해도 기도하는 사람은 매일 기도를 통해 그분을 만나기 때문에 그런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비평주의자가 세상에 가득해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을 배우고 기쁨을 누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아버지의 음성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통하여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고, 자신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 두 손을 높이 들고 복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은 고통 받고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기도를 하지 못하는 영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기도의 세계가 막혀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쌍한 사람입니다.
III. 기도가 막힐 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이 기도가 막히는 특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서하지 않을 때입니다.
A. 사랑과 기도
그런데 이것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과 기도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랑은 원래 그 자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면 사랑이 없을 때 무관심하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이미 맺은 관계들은 더욱 풍성하게 하고자 하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은 선한 목적을 위해 관계를 맺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게 사랑의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이 사랑의 기원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랑의 원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라고는 몰랐던 인간이 어느 날 자기만 사랑하던 추루한 상황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하려고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구원의 길을 여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곧 궁극적으로 우리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편에서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그 끝이 아니라, 그 용서를 징검다리 삼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그 사랑의 반응으로 나를 그렇게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존귀하신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게 된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깊고 진실하게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자연의 세계까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자기 혼자인줄 알다가 자기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용서 받았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 깊은 용서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각 사람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지체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랑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영혼에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의 이루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떨려서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그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또한 예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핏기 없는 얼굴들이 서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사랑의 통로를 통해 물질도, 진리도, 재능도 자기가 최종적인 수여자가 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뜻이고, 이 흐름들이 차고 넘쳐서 불신자들이 있는 이 세상까지 흘러들어가게 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넘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입니다.
결국 사랑의 통로 됨과 기도의 통로 됨은 일치를 이룹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시간이 많았을 때 기도가 잘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작은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순수하게 가득 차 있을 때 가장 기도가 풍부했습니다. 곧 사랑이 가득 찰 때 우리의 마음은 수많은 기도의 언어를 만들어 내었고, 모든 삶 속에서 즉각적인 기도에 준비된 마음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많을 때 우리는 지체의 아픔에 눈물 흘릴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어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체들을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바로 그 흐름을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B. 용서 : 관계가 새롭게 됨
기도는 하면서 그 사랑의 흐름을 끊어 놓으니, 용서하는 마음에 끊어진 교통의 줄은 기도를 고사시킵니다. 그래서 기도보다 용서가 먼저입니다. 본문 말씀의 “혐의가 있거든”은 “자기와 지체 사이에 막힌 것이 생각이 나거든”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비밀이 바로 사랑과 기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중요한 사실에 대해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고, 원망을 하는 것은 대단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기도의 교통이 뚤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막혀도 모르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삶이 변하지 않으면 이 설교가 여러분을 책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아무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요.”라고 불러주어도 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담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입은 겉옷이고, 우리의 정체는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라.” 죄가 들어온 이래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용서라고 하는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랑의 분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깊이에 정확히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가 그 사람 안에 사랑을 넘어설 수도 없고, 사랑이 용서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우리가 지체들과 맺는 관계는 바로 구원받을 백성들을 모두 한몸으로 만들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일의 예고편입니다. 보십시오. 진심으로 용서하면 잘못된 관계는 언제나 새롭게 태어납니다. 누가 누군가를 진실히 사랑할 때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벽을 뛰어 넘어 그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가운데 진정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바로 그 관계를 하나님과 함께 누리고 지체들과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분복인 것입니다.
IV.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살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기도가 헛바퀴를 돌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하지 않은 지체가 있습니까? 용서를 빌 지체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충심으로 사과하고 이해를 구하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얽히고설킨 줄들을 모두 끊을 때 우리의 기도가 피어오르게 됩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어디서나 기도로 섬긴다면 그 기도는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장 신령한 일들도 가장 세속적인 일로 바꿀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살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려면 마음에 거리끼는 그림자 없이 지체를 충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신 것처럼 진실한 사랑으로 매달리며 믿음의 삶을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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