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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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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6-13 http://www.yullin.org |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심을 고백한 시인은 2절부터 신앙의 경험 속에서 얻은 그 확신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은 그 이유를 깊은 영적인 관계에서 찾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여기서 소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하야’인데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이유는 자신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 시인의 영혼이 죽은 자와 같았던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의 영혼을 살리셨고, 그것이 시인에게 크나큰 감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온 땅과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이 된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가 자기 밖의 사물들을 향하여 반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신진대사를 멈출 때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은 절대로 파멸되지 않고, 죽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파멸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영혼이 그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죽어있다고 말합니다. 즉 영혼의 활기와 원기 생명력이 현저히 감퇴하고, 영혼이 선한 기능을 발휘에서 육체를 장악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육체를 끌고 가지 못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영혼의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전달되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인은 그의 영혼이 이런 침체 상태에 있다가 회복되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양떼이며 목양의 관계 속에 있음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특히 시편은 영혼의 침체의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이유를 모르고 당하는 끊임없는 고통입니다. 둘째는 무지이고, 셋째는 죄 때문입니다. 첫째 고통은 시인에게 영적인 침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둘째 무지는 죄에 가깝기는 하지만 죄 자체인가 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보다 더한 영적침체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방해물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찬란하게 당신의 계시의 빛을 비추어주셔도 인간의 죄악이 먹구름처럼 드리우면 그는 어둠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캄캄한 어둠속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는 영혼을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는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자기의 죄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그리 큰 죄가 있나요? 저는 법도 잘 지키고 양심에 거리낄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선과 가식이 자기의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위선과 가식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에게 있었지, 창기나 세리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또렷이 아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분명히 경중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질 자체는 모두 똑같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신의 행복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죄를 단번에 지었든지, 조금씩 쌓았든지 마지막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져오는 결과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우리를 영적인 죽음의 상태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죄 때문에 생생한 기도의 은혜, 언제든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첫사랑의 때처럼 마음이 부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향연이 올라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의 연조는 깊어지고, 성경자체에 대해 아는 것들과 교리적인 지식은 증진되었지만 맨 처음 회심할 때처럼 성경을 펼치면 어디를 읽어도 우리의 마음을 녹이면서 산제사를 드리게 하는 그 달콤한 성경의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무겁게 느껴지고 주님을 섬기면서도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나와 교통하신다는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모든 어려움들을 생활의 곤궁, 바쁜 일상 혹은 육체의 피곤함이나, 가정의 어려움 등의 환경 탓으로 돌릴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마음을 힘들게 하고 분명히 방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영적인 무기력의 중심자리에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께 대적하는 것,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지 않는 거만함,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집요한 미움과 불신앙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죄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있는 영적 관계를 가로막아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구약에서 보기 드물게 순결한 신앙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타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이며 높은 진리의 세계를 깨달은 거룩한 철학자임에 분명했지만, 우리와 똑같이 죄의 뿌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구조사와 밧세바를 간음하는 커다란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시인은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의 기쁨을 거두시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밤마다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는 회개 속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자신을 성찰하고 말씀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이 필요합니다. 죄가 영혼의 침체를 가져온다면 죄를 치우는 유일한 방법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용서를 베푸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비롯한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언약의 유익 두 가지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한없는 용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게 될 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죄를 해결할 길을 제공 받습니다.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께 진심으로 뉘우치고 이어서 드리는 그 희생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금 그들을 사랑하시는 놀라운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 백성이 언제든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주홍과 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하시는데, 그렇게 다시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는데도 죄를 회개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으로는 주를 예배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나 마음으로는 주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영혼에는 깊은 어두움과 갈등이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참회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뉘우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그분의 사랑을 죄로 갚았다는 가책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남몰래 흘린 적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이 벌레 같은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그 사랑을 모질게도 반역하고 악을 행하고 주님의 마음에 칼을 찌르듯이 죄를 지은 것 때문에 자신이 미워서 참회한 적이 언제입니까?
수많은 죄를 물먹듯이 먹으면서도 그것을 쏟아낼 참회의 시간이 없습니까? 그 때문에 영혼은 죽은 자처럼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중생의 생명은 사위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있으나 교회다운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있으나 예수는 그 마음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티끌 같은 자신의 존재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고 그분을 섬기기 위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조차도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종교의 위안을 삼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당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천국에서 볼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어둡고 횃불처럼 빛나야 할 교회는 마치 불이 꺼진 등대처럼 혹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그 영혼이 깊은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어둠이나 세상의 어둠이나 일반인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던 시인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가혹할 만큼 긴 세월동안 어둠속에서 지냈습니다. 맨 처음에 그는 자신이 죄를 제물로 해결해 보려 시도했습니다. 많은 소를 잡아 죽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죄를 지었다면 먼저 진실해 지십시오. 하나님 앞에 홀로 무릎을 꿇고 말씀 속에 자신을 비추면서 주님의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거짓투성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거짓된 여러분의 마음에 충실해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시인은 주님이 베풀어주신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으나 그 모든 죄를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또한 범죄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세계, 곧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바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죄의 세력 앞에 핍절하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보실 수가 없어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찢으신 육체를 통해 휘장이 갈라지고 그분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가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보좌에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잊지 않고 우리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당신에게 참회하는 모든 자녀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해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때로는 그분의 사랑을 죄로 갚고, 그분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데도 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용서를 빌면 참회의 보좌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끊임없이 버려도 언제나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랑으로 승복시키시고 우리로 돌아온 탕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불러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죄 가운데 있어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합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회개하고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20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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