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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렘3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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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11-14 http://www.yullin.org |
언약백성과 기도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33:1~9)
I. 본문의 배경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보내신 뜻을 상기시키셨고, 불순종과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축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갔으니,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시위대 뜰에 갇혀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됨과 포로귀환에 이르는 앞으로 전개될 역사, 곧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II. 언약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섭리적 방식 네 가지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A. 진노: 버려두심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덕스러운 삶을 살면 그것이 우리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같은 공식을 행악하는 데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마음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악을 행할 능력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들로 마음에 품은 죄악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막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완고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위반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악한 의지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게 하심으로써 그 고통을 맛보아 하나님 안에서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지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는 이방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진노가 그들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도록 정욕에 내버려 두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롬 1:24) 불신자들을 향한 내버려 두심은 절대적 방임인 반면, 언약백성들은 상대적으로 잠시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들이 악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지 몸소 체험하고 인격적으로 깨달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지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행악하고,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붙드신 손을 잠시 놓으셨고,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이 망한데 이어,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지 모릅니다. 행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데 일체의 속박을 느끼지 않고 양심의 가책마저 멈추었다면, 분명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잠시 버려두신 것입니다. 누구도 그 가운데 항구적인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얻으려는 자유는 잠깐 해방의 기쁨을 주지만 그것이 끝나고 난 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속박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한 포로생활 가운데 마음이 겸비해졌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B. 치료 : 고쳐주심
그때 하나님은 치료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내가 이 성을 치료하고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의 풍부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신적 성품 두 가지를 보이십니다. 하나는 바로 평강의 풍성함입니다. 이 평강(shalom)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안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평강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까지 포함합니다.
욕망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서 행악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말씀과 기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제일 먼저 마음의 평강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불안과 동요에 자신의 마음이 굴복하고, 그 속에서 거짓된 평화를 잠시 맛보고자 하는데,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 대한 탐닉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 무궁한 평강을 흉내 내고, 그것을 하나님 바깥에서 누려보려는 것입니다. 거짓된 평강 뒤에는 더 큰 악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과의 평화가 있으면 세상이 요동치고, 시련의 한복판을 지날 때에도 마음속에 평강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거기서 나오고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바로 그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옵니다. 곧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을 잃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뉘우치는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심과 당신과 평화를 맺는 모든 이들에게 험한 폭풍우 속에서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풍부히 드러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예고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성실하심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기초하여 인간과 맺으신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적인 행동의 일관성을 말합니다. 곧 자비와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행위의 신적인 일관성입니다. 그런데 언약 없이는 이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고유한 의미에서 성실하심은 자연 모든 세계보다 언약 백성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언약 관계 안에서의 성실하심을 가르쳐서 우리는 신실하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배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 종아리를 걷어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때리십니다. 그러나 피가 맺히도록 맞을 때 여러분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때리시는 주님의 마음에는 피가 흐릅니다. 그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가입니다.
당신을 멀리 떠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피가 흐르면서도 회초리로 모질게 때리시는 그 끔찍한 계를 통하여 범죄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고 역사 속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애가 속에서 선지자가 부른 것입니다. 아무 희망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내동댕이쳐진 것같이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심판의 장에서 그는 범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C. 용서: 회복시키심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평강과 성실의 풍성함을 보이시면서 세 번째로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되자 포로기간이 끝난 것을 미리 알리시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당신과의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 됨을 후회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자녀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불순종과 죄에 의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마다 용서의 길을 예비하셔서 다시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언약 관계 속으로 부르셨을 때, 특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성취하시고, 그의 몸에 한 지체로 삼으셨을 때, 은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특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든지 마음의 중심으로 용서를 빌면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아들이 우리를 위해 쏟으신 그 공로를 의지하여 용서해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용서 받기에 너무 무거운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불순종의 길에서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범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현저히 해치고 스스로 불행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돌이킨다면 그 끔찍한 죄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 속에는 우리를 그 끔찍한 죄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집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가 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신적 강제력에 사로잡히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 또 다른 구약의 율법을 부여받아서나 저주와 심판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같이 죄인 중의 괴수요, 흉악한 인간 중에 가장 포악한 핍박자였던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 깊이‘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지울 수 없도록 아로 새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아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같은 죄악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의심합니다. 아마도 얼마 전에 그들의 회개는 가식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회개한 것도 사실이고, 또 은혜에서 금세 미끄러져 믿을 수 없을 만큼 옛생활로 돌아간 것도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둘 사이의 모순이 바로 정결의 개념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용서만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을 깨끗케 해 주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때에는 그 죄가 끔찍하게도 밉지만 그 속에서 동일한 죄를 향해 기울어진 습성은 그렇게 뜨겁게 흐르는 한 번의 눈물로 씻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자신이 알 수 없는 그 타락한 본성과 죄 짓기를 원하는 악한 성향들을 말씀의 빛으로 탐사하여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매일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로 맨 처음 회개하고 돌아왔던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는 주님의 찢으신 육체로 갈라진 휘장을 지나 맨발로 그 길을 걸어 보좌 앞에 새롭고 산 길에서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놀라운 사랑은 오직 시작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한번 주님의 사랑을 받고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겸손해야 되는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에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 날마다 알아가야 합니다.
D. 기쁨: 강복하심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용서하신 이 사람을 정결하게 하시면서 그에게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복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게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마음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선까지는 하나님이 채근하지 않으실까 묻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성도의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낭떠러지가 아니고 벼랑이라면 끝까지 가보겠다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것이 확장 되어서 결국 자신의 인생을 벼랑 끝에 세우게 됩니다.
당신을 멀리 떠나서 죄로 어두워진 이 땅에 작은 반딧불이라도 하나 밝혀 사람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빛이라도 던져줄 수 있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구원해 주신 주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 마음 최대의 소원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III. 기도하는 자에게 알리심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언약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비밀을 알게 하시려고 선지자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심
주님은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짖음은 마음을 물같이 쏟는 간절한 외침이자 경외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는 것만이 아니며, 말 없는 탄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심으로 부르짖는 사람들 곁에 가까이 계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그들에게 미리 보이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이성의 능력이 뛰어나서 어려운 교리를 듣고도 남보다 잘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 속에 마음을 쏟지 않는 사람보다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는 사람이 훨씬 거룩해지고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많이 마음을 쏟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는 거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작은 새들이 그 나무 아래 깃들도록 하고, 물을 머금어 메마른 대지에 물을 공급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들과 얽혀 교회에 뿌리내릴 것입니다.
B. 기도하는 자를 기뻐하심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실 뿐만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여기서 비밀은 히브리어로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감추어 놓으신 것을 마음을 쏟으며 그분께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터인데, 이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가장 잘 아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진리들을 주님을 사랑할 때는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III. 결론: 기도하라
만약 우리가 불신자들이 포기하는 그 지점에서 포기하고, 불신자들이 잔재주를 부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지점에서 정면대결을 피하고 돌아갈 길을 찾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그 분과의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삶과 죽음 사이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돌아와 용서를 비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능력을, 그리고 갈 길을 몰라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생의 심각한 위기를 맞아서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절망하면서도 그 에너지를 기도에는 쏟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서 자신의 방황하는 모든 마음을 그대로 구하고, 주님만이 나에게 진정 위로가 되심을 분명히 깨닫고, 사람과 세상에 걸었던 모든 소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삶에 대하여 양심이 여러분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의 좋은 행실과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주님이 피 흘리심으로 여셨기 때문인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신실하고 충성되게 살 때만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생의 벼랑 끝에서 여전히 우리가 돌아오도록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쏟아 아버지 앞에 기도의 보좌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기게 만드시고, 도저히 극복할 길이 없는 그 난관을 생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극복하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벼랑 끝까지 걸어오게 된 자신의 악함을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어깨위에 날개를 달아, 주님을 향해 날아오르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렇게 열한 번에 걸친 기도 시리즈의 막을 내립니다. 설교의 시리즈는 막을 내렸으나 여러분의 기도생활의 시리즈는 막을 올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우리가 방황하고 때로는 넘어지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인 것을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보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의 피로 여러분을 사신 것을 기억하십시요.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신실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201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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