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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6: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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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조준 목사 |
참고 : |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편 146장 1 절- 10 절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 146편 말씀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 로 마쳤습니다. 이 시 편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의 말씀이고, 다음 부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는 히브리말인데 하나님을 찬양하라 는 뜻입니다. 다윗은 그의 영혼을 불러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평생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나의 평생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 니까? 평생 믿음으로 살며 승리하며 사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이상적인 생활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에는 이런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45편 1∼2절에 보아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 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성도의 생활에서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시편 147편 1절에 보아도 할 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
시편 148편 1절 이하에는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 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 도 찬양할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149편 1절 이하에 보면 찬양의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요리문답에도 인간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 양하는 것은 이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이 피조물 되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시간과 능력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71편에서 시인은 이 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세상에 무엇하러 왔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기계론적인 인생관과 목적론적인 인생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적인 인생관에 의하 면 사람이란 부정모혈(父精母血)로 출생해서 처음에는 기어다니고, 그 다음에 앉고, 그리고 나서 서고, 걷고, 소년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고, 장년기가 되고, 노년기가 되고 그러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인생관에는 인생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는 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론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식이위대(食而爲大)란 말이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번 캐나다 성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록키산맥을 구경했습니다. 그 웅장 함과 아름다움은 무엇으로 다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에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먹고 나서 구경을 할 수 있지 배가 고프면 구경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IMF시대를 맞이해서 각 방면에서 겪는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직장을 잃은 사람이 200만 명이니 딸린 식구를 합하면 적어도 800만 내지 1,000만에 육박하 는 셈입니다. 생계가 막막한 현실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들렀더니 우리나라에서 미국에 무작정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시내에는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직장 없이 앉아 굶느니 미국에 가서 어떻게 해서 밥이라도 벌어먹자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점심을 거르는 결식 학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IMF시대가 되면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우리 나라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산디에고 성회에 갔다가 멕시코 국경을 잠깐 들렀었는데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의 피난민촌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부자는 아주 적고, 가난한 사람이 대 부분입니다. 사업을 해도 대기업을 하면 그런 대로 현상 유지를 하지만 중소기업은 특수한 경우 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도산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어나는 것은 사기범과 강력범이고, 미처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침 한끼 끓여 먹으면 점심이 염려되고, 어떻게 해서 점심을 먹으면 저녁 준비가 걱정인 가정 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 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이 사람이 사는 것의 전부라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일하기 위해서 먹는다고 말합니다. 먹기 위해 산다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나 말도 일하기 위해서 먹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이 세상에 사는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를 보세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 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는 첫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 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 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기 위해 피를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이 몸을 드려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즐거워하여, 찬양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11)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는 생활 의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을 보세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몰려 왔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그 사람들을 향해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 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라고 했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 다. 나무는 좋다고 하면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좋은 나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실이 따라야 합니다. 사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포도나무라고 해서 심었는데 머루를 맺으면 머루나무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 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 로 시인하고 영접해서 새사람이 되었는데,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귀한 열매를 다 맺었습니까? 이 열매를 맺어야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말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말끝마다 할렐루야 라고 찬양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이 할렐루야가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에 다니 는 사람 중에 은혜 충만히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간증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 은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을 받은 그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물론 성령의 역사는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잘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생활과 인격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데, 조금 전에 말씀한 성령의 열매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우리가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으뜸이 되는 희락은 하나님 안에 서의 희락이고, 가장 그윽한 깊은 화평은 하나님과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첫째 열매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때 오순절 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니까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 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 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깨닫고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19∼21)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요긴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 닙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오는 기쁨은 변하는 기쁨입니다. 변하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참 신앙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슬퍼하는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뻐하는 생활 이야 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 하면 힘든 것을 모릅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소유해야 우리에게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고난을 이기는 힘이 생기며 어려움이 변하여 밝은 날이 될 것입니다. 전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준 것 때문 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밤중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방 안에서 기도하면서 찬 미했습니다. 한밤중의 찬미는 역경 속에서의 노래입니다.욥은 동방에서 큰 사람으로 훌륭한 자녀가 있었고, 많은 재산이 있었고, 덕망이 있어 많은 사람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 루 아침에 욥은 행복의 절정에서 불행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한밤중에 찬미를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세요.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잡수실 때 가룟 유다는 주님 을 배반하여 나가버렸고, 베드로는 큰소리치지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할 것 을 생각하며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가슴은 어두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찬 석상에서 일어나 어두운 밤길을 헤치며 찬미하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 니다. 우리 주님도 밤중에 찬미를 부르셨습니다. 한밤중의 찬미는 역경 속에서의 감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역경 중에서의 은총에 감사하며 부르는 찬미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순경에만 감사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참된 감사를 해보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역경 중에서도 깊은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면서 부르는 그 찬미에서 감사의 신비경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개인 적으로나 환경이 너무 어둡습니다. 밤같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가운데서도 감사의 조건 을 찾아가며 밤중에 찬미를 부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한밤중의 찬미는 알지 못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조건들 속에서 찬미했더니 가슴속의 의심과 원망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믿음이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과 과학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갈 길이 분명할 때에만 움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는 갈 바를 모르며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많으 면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참된 감사는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찬미를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는 것을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신앙이란 지금은 알지 못하여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 라도 장차는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또한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알지 못하면서 감 사하는 것입니다.
해답을 얻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후에 해답을 얻는 것이 믿음입니 다. 한밤중의 찬미는 기적을 불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더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감옥에 진동이 생기고,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결박이 풀렸습니다. 졸고 있던 간수가 깜짝 놀라 이 광경을 보고 죄수들이 틀림없이 다 도망했 으리라 생각하고, 그 책임을 느끼고 자살하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간수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너무 감격해서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해서 그날 밤에 간수와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야 바울에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일 들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밤중의 찬미는 기적을 불렀습니다. 한밤중 의 찬미로 놀라운 승리를 얻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 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 지 아니하니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평안입니다. 뇌물이나 지위나 권력으로 말미암는 평안은 세상 환경이 주고 그 환경이 또다시 빼앗아가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이 주는 평안은 참된 평안이 아닙니다.그러나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평안은 중심적이며, 항구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평안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생활 가운데서 오는 것입니 다.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생활할 때 오는 생명의 평안입니다. 세상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에 화평이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환경이 좋지 못해도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해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 의 열매를 맺어 여러분 자신에게 복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오늘 주신 말씀 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 님으로 모시고, 그를 섬기며, 그에게 예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며 그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어려운 세상에서도 승리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악한 세력의 역사 때문 에 마음이 상하고 좌절되었다가도 하나님께로부터 용기를 얻고 영이 소생함을 얻습니다. 하나님 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부끄럽지 아니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다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을 지키십니다.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은 혜를 베푸십니다. 속박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죄의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소경 의 눈을 여시듯이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혀 주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평생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찬양하면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밝아집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나약함이 강함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불평이 감사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기뻐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기뻐하라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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